
스탕달이 47세에 완성한 소설 ‘적과 흑’은 문학성과 재미를 두루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는 비단 쥘리앵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다. 소위 나폴레옹 신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분’은 숙명처럼 주어지는, 고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급’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 어쩌면 운을 통해 어떻든 조금이나마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혁명, 특히 코르시카 섬 출신의 자그마한 군인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된다. 개천에서 용이 태어난 셈인데, 나폴레옹이 증명한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다.
나폴레옹을 향한 쥘리앵의 모방욕망에 늙은 군의가 심심파적으로 베푼 교육의 영향까지 가세한다. 그는 틈나는 대로 ‘세인트헬레나의 기록’을 읽고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성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아비의 집을 떠난 이래 그는 예비 사제로서 주로 검정색 옷을 입지만(‘흑’), 그 내면은 나폴레옹적 야망과 열정으로(‘적’) 가득 차 있다.
“쥐라 산맥의 가련한 농사꾼이나, 평생 동안 이 음울한 검은 옷을 걸치고 있어야 할 내가 아닌가! 아아! 이십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들처럼 군복을 입었을 것이 아닌가! 그때라면 나 같은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아니면 ‘서른여섯 살에 장군이 되었을 텐데.’”(2권, 106쪽)
그렇다면 ‘적’과 ‘흑’은 단순히 군직과 성직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현실적 타협, 혁명의 시대와 왕정복고(반동)의 시대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은 차선책이었던 셈이다. 셸랑 신부는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자네 성격의 밑바탕에는 어두운 격정이 엿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네. 그것은 성직자에게는 꼭 필요한 절제라든가 세속적 이득의 완전한 포기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단 말이야. 자네의 재주는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 성직자가 될 경우 나는 자네의 구원이 염려되는 바일세.”(1권, 78쪽)
그러나 목표가 설정됐다면 움직여야 한다. “쥘리앵에게 출세한다는 것은 우선 베리에르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기 고향이 질색이었다.”(1권, 43쪽) 더욱이 그에게는 야망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능력(특히 신약 성경을 다 외우고 라틴 고전 문학까지 섭렵할 만큼 뛰어난 라틴어 실력)이 있다. 그리하여 이 19세 청년은 아비의 집을 떠나 베리에르 시(市) 시장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이어 브장송의 신학교, 파리의 드 라 몰 후작의 저택 등 계속해 대처(大處)로 나간다. 쥘리앵의 동선, 즉 시골 청년의 상경 스토리는 19세기 근대소설의 일반적인 구성을 반복한다. 자, 쥘리앵은 ‘검은 옷’의 나폴레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순수에의 집착
쥘리앵 소렐은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즉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비의 집에서 거의 기생충 취급을 받았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는 어딜 가나 그를 따라다닌다. 우선 지방 귀족 사회에 가정교사로 편입된 청년의 지위는 제법 애매하다. 지적인 능력과 야망의 크기에 비해 그 사회적 처지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이며, 쥘리앵처럼 성격이 예민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는 추상적인 의미의 상류 사회는 흠모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가령 가난하되 오만한 사람의 특징인바, 추상적인 돈은 동경하되 구체적인 돈은 경멸하고 대체로 이해타산과 축재에 둔하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유일한 가치인 ‘순수’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의 산물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출세욕이 강할수록 속물적 가치에 대한 혐오는 더 커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것이 그가 시장 집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편 브장송의 신학교는 그야말로 시련의 도가니다. 성직에 대한 소명감보다는 최대한 손쉽게 빵과 안정을 얻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온 거친 평민의 아들들이 모두 쥘리앵의 적이 된다. 그의 장점(우수한 성적, 순수에의 집착, 성취욕구, 성실성 등)이 질투와 힐난을 불러온다. 일등을 하면 세상살이가 피곤해진다. 이런 현실을 통감할수록 쥘리앵의 소외감은 더 커진다. 피라르 신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 우울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