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서 나고 자란 최백호는 1977년 어머니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했다. ‘가을엔~ 떠나지 마세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노랫말은 30년이 넘은 지금도 가을 타는 남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최백호는 아주 ‘낭만’적인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베이지색 진에 갈색 구두, 진녹색의 재킷, 하얗게 센 머리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떠오른다. 짙은 경상도 사투리엔 바다냄새가 스며 있었다.
▼ 선생님은 가을에 뵀어야 하는데….
“좀 그런 느낌이 나지요? 성격은 안 그런데, 하하.”
▼ 요즘 ‘낭만시대’가 화젭니다. 색소폰 때문에.
“예. 요즘 색소폰이 상당합니다.”
▼ 하고 많은 악기 중에 왜 색소폰입니까.
“(색소폰 부는 흉내를 내며) 폼이 멋있으니까. 대단한 분이 많습니다. 이번 주엔 여성분이 1등을 했는데, 50대 중반 되신, ‘베사메 무쵸’를 아주 기가 막히게….”
▼ 하여튼 생각지도 않게 라디오에서 히트를 하셨어요.
“방송국에서도 한 1년 생각하고 맡긴 것 같은데…, 실험적인 케이스로. 그런데 저는 길게 갈 줄 알았습니다. 벌써 3년이 됐지요. FM 103.5Mhz에서 지금 최장수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짤렸는데(웃음).”
▼ 선생님은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원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화가가 되려고 그랬고,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 가세가 기울어서?
“어머님이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이셨어요. 그 수입으론 누나와 제가 대학에 못 가죠. ‘다음해에 대학 가라’ 그랬는데, 제가 스무 살 때, 재수하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그냥 멍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러다 군대에 갔지요.”
참고로, 최백호의 부친은 29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국회의원(2대 민의원)에 당선됐던 최원봉이다. 최백호가 태어나던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길을 갔다. 6·25 전쟁 당시 북진하던 연합군(터키군) 트럭과 최원봉이 탄 지프가 충돌하는 사고였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정치적인 암살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가족들은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 그럼 노래는 언제부터….
“군대도 결핵으로 의병제대했지요. 1년 만에. 나오니까 뭐, 아무 기술도 없지요. 친구들하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건 좋아했지만, 직업이 될 정도라고는 생각 못 했지요. 친구의 매형이 부산 서면에서 통기타 업소를 차렸는데, 이름이 ‘나들이’인가? 거기서 가수들 노래하는 거 보니까 ‘야, 저 정도면 나도 되겠다’ 싶더라고요.(웃음) 생활도 어려운데 그냥 ‘해보자’ 그랬죠.”
▼ 그림은 포기하시고?
“사실 중학교까지는 열심히 그렸는데,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안 했지요. 고등학교도 가야고등학교라고, 어머니가 어거지로 넣어줬는데, 그땐 이름도 가야가 아니고 항도고등학교, 3차 학교였어요. 탁 들어가니까 정말, 굉장히 독특해요.”
▼ 뭐가요?
“복싱하는 놈이 없나, 깡패들 다, 부산에서 유명한 애들 다 모여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