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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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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말테의 수기<br>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77쪽, 1만원

때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침대에 잠시 그대로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해보곤 한다. 이곳은 아주 먼 곳, 아니 아주 오래전, 보름달 형상의 창문이 있던 생 미셀의 고미다락방은 아닌가. 때로 잠이 들려고 할 때면, 찰나적으로, 어떤 장면이 의식과 전(前)의식 사이로 왔다간다. 나는 파리 센 강 옆의 어느 거리, 바렌가(街)를 걸어가고 있다. 나는 어느 웅장한 건물 앞에 서 있고, 정문은 활짝 열려 있다. 나는 문을 통과하고, 드넓은 정원을 갖춘 성관(城館)과 마주한다. 앞뜰에는 조각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나같이 낯익은 형상들이다. 그중 중앙에 있는 조각상은, 오른쪽 팔로 오른쪽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남자, 일명 ‘생각하는 남자’다. 나는 ‘생각하는 남자’ 앞에 서 있기도 하고, ‘칼레의 시민들’ 앞에 서 있기도 하다가, 어느새 성관 1층에 들어가 마룻바닥에 울리는 발소리를 조심하며 두 남녀의 격렬한 ‘입맞춤’ 앞을 지나가기도 하고, 로댕의 비운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의 앙상한 청동 조각상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나는 천천히 걸어들어갔던 문 밖으로 나오고, 처음 멈췄던 자리에 서서 내가 방금 들어갔다 나온 집의 주소와 정체를 확인한다. 바렌가 77번지, 비롱 공(公)의 성관, 공식명 국립 로댕 미술관. 꿈을 꾼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이 꿈속 현실처럼 선명하다. 그런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침대 맡 탁자에는 한 권의 소설이 놓여 있게 마련인데, 방금 전까지 나를 파리의 고미다락방으로, 그 아래 강과 다리와 대성당과 광장, 그리고 광장에서 뻗어나간 골목골목으로 이끌던 주인공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분신, 말테다.

나는 지금 파리에 있소.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기뻐하고 또 대부분 부러워한다오. 그들 생각이 옳아요. 파리는 별별 유혹으로 가득 찬 대도시라오. 나 자신 고백하자면,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유혹에 굴복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오. (중략) 그 덕분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소. 성격상으로는 아니더라도 나의 세계관이나 내 삶에서 말이오.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물들을 완벽히 다르게 보는 관점이 내 안에서 형성되었소. (중략) 변화된 세계, 새로운 의미들로 가득 찬 삶이오. 모든 게 다 새롭다 보니 지금 당장은 좀 힘이 드는군요. 내가 겪는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초보자에 불과하다오.





소설 속 말테가 지금 있는 곳은 파리 한복판, 센 강 지척의 툴리에가(街). 프라하 출신의 릴케가 파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의 나이 스물일곱, 1902년 8월. 바로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 삼은 툴리에가 11번지다. 툴리에가(rue toullier)로 말할 것 같으면, 파리 센 강 좌안(左岸) 6구에 위치한 뤽상부르 공원과 팡테옹 언덕 사이에 있는, 파리에서 길이가 짧고 폭이 좁은 골목 중 하나다. 덴마크 청년 말테를 주인공으로 파리를 무대로 펼치는 ‘수기’라는 형식의 소설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릴케의 출신 성분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릴케는 독문학사에 빛나는 세계적인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지배 아래 있던 체코의 프라하 출신. 프라하란 어떤 곳인가. 소설가 카프카와 쿤데라, 위대한 작곡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태생지 아닌가. 릴케가 태어나 자란 19세기 후반 프라하는 파리에 버금가는 예술의 성도(聖都). 릴케의 프라하는 ‘먼 곳에의 그리움’을 몸의 비늘처럼, 아니 피의 부름처럼 거느린 유럽의 문청(文靑)들이 꿈꾸는 도시 중의 하나. 그런 프라하를 두고 그는 왜 파리를, 그것도 덴마크 청년 말테를 주인공으로 ‘수기’ 형식의 소설을 썼을까.



그래, 이곳(파리)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거리에 나가 보았다. 여러 병원을 보았다. 한 사람이 비틀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중략) 나는 손에 든 지도를 살펴보았다. 산부인과병원이었다. (중략) 조금 더 가니 생 자크 거리가 나왔고, 거기엔 둥근 지붕의 큰 건물이 있었다. 지도에는 발 드 그라스 군인 병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안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골목길 사방에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분간할 수 있는 데까지 분간해 보면,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 튀기는 기름 냄새, 그리고 불안의 냄새가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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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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