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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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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조선시대 대표 유학자 류성룡이 배향된 경북 안동 ‘병산서원’

안동 하회마을에서 낙동강 상류 방향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병산서원이 있다. 낙동강 경치가 수려한 이곳에 자리 잡은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이다. 이 서원에는 류성룡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이 배향됐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 인근에 있지만 마을과 떨어져 있어, 하회마을 반대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시골길과 낙동강의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고갯길에 올라서면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풍산읍 주변의 넓은 벌판이 보이는데, 어느 누구도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나는 2008년 여름, 이곳에 있었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 혜원 신윤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영화 ‘미인도’를 촬영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100여 명에 가까운 영화 스태프와 약 열흘간 머물며 병산서원과 고산정, 만휴정과 군자마을 등 안동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병산서원 출입문인 복례문에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고집스럽게 쌓아올린 돌계단을 지나자 만대루(晩對樓)가 시야에 펼쳐졌다.

앞면 7칸, 옆면 6칸의 만대루는 고풍스럽다는 말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답다. 특히 자연목으로 투박하게 세운 기둥은 칠을 하지 않아 지난 세월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만대루의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따온 말이다.

류성룡 선생의 혼 담긴 병산서원



이곳 만대루는 입교당(立敎堂)과 마주보고 있어, 유생들의 행사 때 대강당 구실을 했다. 낙동강을 향해 시원하게 열려 있어 서원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마도 서원의 규율과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유생이 이곳에 서서 숨통을 틔웠을 것이다. 나는 그 옛날 수많은 유생이 올랐을 만대루에 올라, 낙동강 경치를 감상했다. 낙동강을 병풍같이 감싸는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점차 영화 ‘미인도’ 시나리오를 쓰며 상상했던 모호한 배경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맛있는 과자를 아껴 먹는 심정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병산서원 강학공간의 중심이 되는 입교당이 보였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 병산서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소박함과 엄격함이 묘한 긴장감을 준다. 나는 입교당 마루에 앉아 만대루를 바라보았다. 만대루에서 바라본 낙동강 풍경도 빼어났지만, 입교당 기둥 너머로 바라본 풍경은 입체감의 극치를 보여줬다. 이곳은 유생들이 강당에 앉아서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스태프들과 병산서원 내 촬영 분량을 확인하고 리허설을 진행했다. 며칠간 용인민속촌에서 촬영이 진행됐던 탓에 피로가 덜 풀려 휴식도 취하고 연출노트도 정리하고 싶었지만, 낙동강에 발 한 번 담글 여유도 없었다. 예산은 한정됐고 스케줄은 빠듯했다. 석 달 안에 총 73차 촬영을 소화해야 하는 일정이니,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하고 잠자고 밥 먹고 가끔 수액 맞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매일 촬영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촬영 오기 전 안동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며 “촬영과 더불어 역사탐방을 함께 하겠다”던 계획은, 예상했던 대로 물거품이 된다.

몸은 정확히 안다. 언제쯤 쉬어줘야 하고 언제까지 버텨줄 수 있는지. 나는 이미 시나리오 작업과 캐스팅과 로케이션 헌팅 등 사전 작업 단계부터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과연 이 시나리오가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배우가 출연 약속을 해줄까? 촬영 장소는? 날씨가 안 좋아 일정이 밀리면 어쩌지? 그럼 개봉 날짜는? 영화 주간지와 포털의 별점은 몇 개나 받을까? 이 작품이 차기작을 담보할 만큼 흥행할 수 있을까?’

육체노동과 더불어 정신을 어지럽히는 온갖 번뇌와 싸우다보면, 어느새 지방 촬영장의 낯선 여관에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밀고 들어서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소독약 냄새나는 여관 이불 속에서 매일 밤 곯아떨어진다.

밤샘의 연속, 불의의 사고

‘그 사건’이 있던 날은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이틀째 밤을 새운 날이다. 며칠 밤을 새워보면 안다. 만대루의 풍경 너머 보이는 낙동강 경관이 더 이상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해지기 직전 만대루 위에 올라 배우들과 리허설을 끝냈다. 여름의 짧은 일출 시간 탓에 서둘러 준비하지 않으면 모두가 곤란해진다. 카메라와 조명 세팅이 끝나고 막 촬영하려고 돌아서는데 뭔가 묵직한 물체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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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영화감독·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dkall@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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