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달리 산사나무는 유럽에서는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민속나무다. 유럽에서도 약재로 쓰긴 한다. 유럽 산사나무의 열매를 크라테거스(Crataegus)라고 하는데, 강심제로 많이 쓰인다. 그보다는 5월을 대표하는 나무로 삼아 ‘메이플라워(May flower)’라고 할 정도로 그 꽃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고대 희랍에선 산사나무 꽃이 희망의 상징으로 봄의 여신에게 바치는 꽃이었다. 지금도 5월1일이면 산사나무 꽃다발을 문에 매달아두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아테네 여인들은 산사나무 꽃을 행복의 상징으로 여겨 결혼식날 머리장식으로 썼고, 로마에서는 산사나무 가지가 마귀를 쫓아낸다고 생각해 아기 요람에 얹어두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5월이 되면 태양숭배와 관련된 축제를 열었는데 이때 활짝 피어나는 산사나무 꽃은 5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전통주 산사춘 원료
얼마 전 지인이 이 산사나무 열매를 한 자루 가득 가져왔다. 산에 갔더니 이 열매가 잔뜩 열려 있어서 땄다는 것. 꽃사과 열매는 아닌 듯하고 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전통주 산사춘의 재료라고 했더니 산사주를 한번 만들어보겠단다. 그가 들고 온 열매는 검붉게 너무 잘 익어서 약재로 쓰기는 곤란했다. 산사는 적당히 익어 시고 떫을 때 따서 약용으로 쓴다. 또 오래 묵은 것일수록 약성이 좋다. 과육이 물컹해지도록 익으면 신맛이 거의 없다. 달달한 맛이 난다. 수분이 많아서 효소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알코올에 재어두면 곧바로 산사 와인, 즉 산사춘이 된다.
산사와 관련된 옛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마을에 계모가 전 부인의 아들을 심하게 구박해 매일 설익은 밥을 주고 밭일을 시켰다. 흉칙한 계모는 아이를 병들게 해 일찍 죽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설익은 밥을 매일 먹고 위장이 상해 점점 몸이 마르고 복통이 심해지게 된 아이는 산에 올라 슬피 울다 산사나무 열매를 보게 됐다. 붉게 익은 산사 열매가 먹음직스러워 이를 따 먹었더니 신통하게도 배도 아프지 않고 소화가 잘돼 속이 편해졌다. 아이는 이후 설익은 밥을 먹고는 꼭 산사 열매를 따 먹었다. 점점 살이 오르고 몸이 건강해졌다. 뒤에 이 이야기가 알려져 산사는 소화력을 돕고 위장병을 치료하는 데 긴요한 약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산사에 대해 “식적(食積)을 내리고 묵은 체증(滯症)을 푼다. 기가 뭉친 것과 적괴, 담괴, 혈괴 등 몸속에 뭉친 덩어리를 삭힌다. 비장을 튼튼히 한다. 답답하게 막힌 흉격을 연다. 이질을 다스린다. 종창이 빨리 곪아 터질 수 있게 한다”고 쓰고 있다.
식적은 음식물이 소화되지 못하고 남은 노폐물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소 속이 더부룩하고 가슴이 답답하며 배가 아프고 가스가 잘 차고 대변을 시원하게 보지 못한다면 위와 장에 식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몸의 컨디션이 좋을 리 없다. 만성적인 피로 상태와 담음두통, 목덜미가 무겁고 아픈 항강증, 경우에 따라선 식적요통 등을 수반한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이 식적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양방병원에 가서 내시경으로 진단한다면 바보짓이다. 한의학의 식적은 언어와 대상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서양의학의 실체론적 세계관과 부합하는 개념이 아니다. 증상과 상태의 집합이지 종양덩어리처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 만성적인 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시경 진단을 받아봐야 서양의학은 체기(滯氣)의 존재를 밝혀내지 못한다. 체증 자체가 실체론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것은 서양의학이 이런 증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양방 병원에서는 위장에 염증이 없으니까 큰병이 아니다, 신경성이라는 말이나 듣기 십상이다.
내시경으로 볼 수 없는 체증
산사는 소화흡수 기능을 증진시키고 위장을 튼튼히 하는 최고의 건위제다. 현대인은 고기를 많이 먹고 식품첨가물이 들어간 빵이나 인스턴트식품을 많이 먹기 때문에 소화기질환을 달고 사는 이가 많다. 산사는 식적, 특히 육류의 과다섭취로 인해 육적(肉積)이 생겨 소화가 안 되고 늘 배가 더부룩한 증상을 다스리는 데 탁효가 있다. 산사의 과육에 지방분해효소가 많아서 지방이 많이 든 음식물을 잘 소화시키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예부터 이런 산사의 성분을 이용해 육류를 요리할 때 산사를 쓰기도 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의 ‘물류상감지(物類相感誌)’에 “늙은 닭을 삶을 때 산사 열매를 넣으면 고기가 부드러워진다”는 기록이 있다.
산사는 장위의 소화흡수 기능이 많이 떨어져 식욕이 없고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음식이 내려가지 않는 증상에 효과가 좋다. 이로 인해 몸이 여위고 늘 변비에 시달릴 때 산사 40g에 맥아(엿기름) 40g, 빈랑 12g을 환제(丸劑)로 만들어 복용하면 큰 효과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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