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에요. 성전환수술에 대해서도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은 없어요. 작가로서 그 어떤 현상을 보고 ‘왜 저럴까?’ 골똘하게 생각하곤 해요. 하리수도 여성으로 살기 위해 호르몬주사까지 맞아가며 수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비난을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어요. 일부러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소설에서는 특히 ‘도덕’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하더라도 작가는 그 인간들을 옹호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 모든 짓거리가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이 세상과 우리 사회가 지닌 모순덩어리가 곪고 곪다가 저절로 터진 것이기 때문이죠.”
▼ 장편소설 ‘미실’이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작품집도 꽤 많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는 ‘독고다이’예요. 10년 정도 무명작가였지만 한 번도 원고청탁을 받고 글을 쓴 적이 없어요. 그 때문에 문학에는 무한한 빚을 지고 있지만 문단에는 빚이 없어요(웃음). 어렵게 글을 썼죠. 하지만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공부할 수 있었어요. 세계문명사와 인류사, 고대사, 라틴아메리카, 마야문명 등 공부를 참 많이 했죠. 그 덕분에 고대 역사를 다룬 ‘미실’과 중세 역사를 다룬 ‘영영이별’ ‘논개’, 근세 역사를 다룬 ‘백범’ ‘열애’ ‘가미가제 독고다이’ 등의 소설을 펴냈죠. 라틴아메리카와 마야문명을 다룬 장편 소설 ‘축구전쟁’을 펴낸 뒤 곰곰이 생각하니 문득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무리 잘 쓴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반면 소서노와 미실 이야기를 다룬 ‘미실’은 우리 고대사에 얽힌 여성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 썼어요. 그때부터 고대사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마침 ‘화랑세기’ 필사본 논쟁이 일었죠. 지금도 논쟁 중이긴 하지만. ‘화랑세기’를 읽다가 소서노와 미실 이야기의 힌트를 얻었어요. 소서노와 미실 이야기는 특색 있고 재미있는 소재여서 거침없이 썼어요. 지금은 소설을 쓰는 방식이 조금 세련된 것 같지만 그때는 알몸 그대로였어요. 그때 밀교 이야기 등도 담았는데, 문제가 될까봐 책을 낼 때 많이 삭제했어요. 조만간 무삭제 개정판 ‘미실’을 다시 내려고 해요. ‘삭제판’을 냈을 때 ‘이런 여자가 있을 수 있느냐’ ‘그런 역사는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분이 많았는데 걱정이에요(웃음).”
‘빨리빨리’ 외치는 현대사회는 좋지 않아
▼ 현대 여성들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쓸 생각은 없나요?
“조선시대 여성들이 겪은 사랑이야기를 두세 편 더 쓸 계획이에요. 특히 억압과 좌절 속에서도 극적인 삶을 산 여성, 어마어마한 벽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런 여성들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나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숨 가쁘게 달려가는 현대사회를 좋게 보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상상력이 역사 속으로 자꾸 기울어요.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현미경 같아요. 제대로 쓴 역사소설은 교육효과도 크죠. 예전에는 남성작가들이 역사소설을 많이 썼지만 지금은 여성작가들이 역사 속에 나오는 여성들 이야기를 다룰 게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 한국 문학작품, 특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해외로 번역돼 나가면 한국 홍보에도 좋을 거 같은데요.
“제 소설 여러 권이 일본과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에서 번역됐어요. 그런데 제 소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죠. 그보다는 우리 역사를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캐나다에 있을 때 도서관에 가니까 우리나라 책은 한 권도 없는데 일본 책은 아주 많아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일본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지원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책을 세계 곳곳에 있는 도서관에서 볼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왜 작가가 되려고 했나요?
“나는 ‘독고다이’였어요. 어릴 때부터 그 어떤 집단이 주는 억압에 대한 반감이 많았어요. 내가 자란 마을은 강릉 정동진에서 10리나 더 들어간 곳에 있었고, 텃세가 세고 보수적인 마을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나 스스로 그 어떤 집단이나 전체주의를 싫어하는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주류가 되지 못했어요. 나도 모르게 ‘독고다이’가 될 수밖에 없었죠. 전교생이 63명인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강릉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어릴 때부터 시인이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초·중·고교에 다닐 때 말 그대로 ‘백일장 선수’가 되어 상도 많이 받았어요. 고 2때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썼어요. 시는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산문만 썼죠.”
▼ 개인주의자라….
“부모님이 맞벌이 교사여서 양육환경이 불안정했어요. 외할머니를 비롯해 친척집 등을 자주 떠돌다보니 나도 모르게 불안한 정서가 생긴 거 같아요. 학교에서는 10년 동안 반장을 했지만, 그리 활동적이지는 못했어요. 어머니 앞에서 밥상을 차고, 도시락을 던지는 등 폭군처럼 굴었어요. 학교에서는 맞은 기억밖에 없어요. 오죽했으면 정신과 의사인 친구가 저보고 ‘소아 우울증’이라고 했겠어요?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눌림’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어요.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죠. 유명해지려고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해지지 않아도 문학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 지금도 가장 행복한 때는 글을 쓸 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