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정수동이가 그랬다던가. 수동의 마누라가 아이를 낳았다. 미리 미역을 준비하지 못한 터라 마누라가 수동에게 장에 가서 미역을 좀 사오라고 했다. 수동이 시장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데 때마침 바삐 어디론가 행차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자네들, 어디 가는가?”
“어이, 마침 잘 만났네. 우리 지금 금강산 유람 가는 길인데 자네도 같이 가지 않으려나?”
“그래?”
수동이 그 길로 친구들을 따라붙었다. 금강산 구경을 잘 하고 돌아와 봤더니 그새 아들놈은 두 돌이 지나 있었다던가. 자고로 여행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요즘 세상에 이랬다간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법하다.
벌써 10년은 됐음직하다. 대전에서 살던 때인데 서울 친구 둘이 사전 기별도 없이 대전의 내 직장에 쳐들어왔다. 내가 수동이처럼 물었고 친구들이 수동이처럼 말했다.
“자네들 어디 가는 길인가?”
“응, 지리산 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않으려나?”
“좋지.”
그렇게 남원으로 내뺐다. 그곳에서는 후배인 이모 시인까지 불러내어 지리산 백무동으로 들어갔다. 겨울, 산길에 눈이 쌓여 있어서 자동차가 애를 먹었다. 영원사 절간 못 가서 차를 세우곤 등산을 했다. 서로들 정처 없이 나섰다가 즉흥으로 “도솔암에나 올라가보자” 해서 시작한 산타기인지라 신발 하나 제대로 갖춰 신은 이가 없었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땀을 흘리며 올랐다.
다들 ‘글장이’여서 그런지 전해주는 이야기도 그럴싸했다. 이태 전 겨울이었다지. 두 친구가 처음으로 도솔암을 찾았는데 산중 암자에는 스님조차 없더란다. 이미 날도 저문지라 두 친구는 염치 불고하고 빗장을 따고 법당 내실까지 쳐들어갔다. 쌀을 찾아내 밥을 지어 먹곤 군불까지 지펴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 날 돈 몇 만 원이랑 편지 한 장을 불전에 남기곤 산을 내려왔단다.
그 겨울의 지리산 백무동
한 시간 넘게 힘든 산행을 한 끝에 도솔암 절 마당에 올라섰다. 맞은편으로 훤칠한 천왕봉이 빤히 쳐다보이는 명당이었다. 이 겨울엔 젊은 비구승 한 분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어렵게 청을 놓아 더운밥도 얻어먹었다. 친구들이 그 겨울에 신세진 바를 토설하며 용서를 구했는데 스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정말, 친구들이 지어낸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암자를 나와서는 굳이 임간도로를 걸었다. 다시금 눈발이 분분히 뿌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강설 속에 서 있는 적막한 겨울 지리산의 정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산을 내려와서는 잠깐 실상사에 들렀다가 이 시인의 안내로 만수천 개울 너머의 간판 없는 찻집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낡은 기와채의 좁은 마당에 갈탄 난로가 켜져 있어 금세 심신이 훈훈해졌다. 지리산이 좋아 굳이 이곳에 옮겨와 산다는 노처녀 주인이 끓여주는 뽕잎 차의 향이 참 좋았다. 후덕하며 섬세한 배려는 동동주 한 잔과 두부김치 한 접시에도 그대로 배어 있었다.
해 질 무렵에는 만수천 냇물을 따라 생초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찻집 여주인이 일러준 냇가 숙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득한 높이의 천왕봉 기슭을 돌아 흐르는 산골 냇물을 따라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풍광 또한 눈을 즐겁게 했다.
주인의 취향을 일러주듯, 암석으로 통문을 만들고 돌담 안에다 반듯한 집을 세운 업소에서 여장을 풀고 취흥을 즐겼다. 아침에는 간밤 숙취가 있음에도 상쾌한 산 공기와 명랑한 물소리를 곁들인 덕에 심신은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이후, 나는 두세 번 더 지리산을 찾으면서도 이 여정을 반복했다. 계절 따라 동행 따라 정취가 다른 경우는 있었지만 자연과 사람에게서 받는 아름다운 감흥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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