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명장이 된 그를 보고 “내 덕으로 당신이 명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슬프지만 사실이었다. 그 긴 번민과 시름의 세월 속에서 그는 수양하듯 바느질을 했고, 당장 생계와 아이들 교육을 위해 바느질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바느질하고 염색하고 옷 짓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토록 좋아했던 바느질이 결국 이런 곡절을 거쳐 그의 인생이 되어버릴 줄은 그도 몰랐다.
“제가 바느질하기 좋아하는 걸 보고 친정아버님이 걱정 많이 하셨지요. 여자가 재주 많으면 박복하다고, 그 재주로 밥 빌어먹는다고…. 지금도 힘들 때면 문득 아버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전남 광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고명딸로 태어나 얌전하게 자란 그는 아버지가 아끼는 딸이었다. 화초처럼 곱게 자란 딸이 시집가서 고생할 때마다 아버지는 애를 끓이곤 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그의 나이가 더 많아진 지금 돌이켜보건대 생전의 아버지가 그렇게 염려했던 대로 그는 바느질 재주로 밥을 벌었고, 마음의 위로를 삼았으며,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결국 그 재주로 명장의 반열에 올랐으니 오늘날 그를 본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을까?
한 번 보고 똑같이 만드는 재주
그의 이름 영재(永才)는 ‘오래가는 긴 재주’를 뜻한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특별히 지어준 그 이름은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그는 한 땀 한 땀 부지런히 손을 놀려 하염없이 시간을 잡아먹는 바느질 재주를 가진데다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옷을 짓고 있으니 과연 ‘길고 요원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긴 재주’라는 그의 이름은 이 재주가 이생에서 얻은 평범한 재주가 아니라, 몇 겁의 연이 쌓인 역사가 아주 긴 재주라는 뜻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릴 때부터 누가 옷 짓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해도 금방 따라 할 수 있었겠는가.
“열댓 살 때인가? 예전 촌에서는 아이들 저고리 소매를 일부러 짧게 만들어 입혔어요. 때 타기 쉽고 일하는 데 거추장스러우니까요. 소매가 짧으니 겨울이 되면 손목이 잘 텄죠. 그래서 제가 입던 명주저고리를 뜯어서 콩물에 염색하던 차에 저고리 원단을 찾아내어 같이 염색하고 소매를 이어 붙였지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명주 바지저고리를 보라색으로 염색할 때 검정콩을 삶아 물들이는 것을 봤거든요.”
그는 소매 단을 덧붙인 저고리를 곱게 풀칠하고 손질해 꾸며 입었다. 물론 집에 어른들이 안 계시는 틈을 타서 살짝 한 일이었다. 나중에 이를 본 할머니가 집안사람들에게 “어린애치고는 어북(제법) 잘했제”라며 그의 솜씨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고 몇 해 지난 열여덟 살 어느 날에는 이웃의 딸 부잣집에 놀러갔다가 그중 바느질 잘하는 셋째언니가 무명으로 남자 겹배자(조끼) 호주머니 만드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와 금세 똑같이 만들어냈다.
“장롱에서 무명 한 필을 꺼내 호주머니도 제대로 잘 파서 넣고 그럴듯하게 만들었지요. 나중에 어머니가 보시고는 ‘아버지 일하실 제 입을 순 있겠네’ 하시더군요.”
배자 호주머니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그가 이렇게 눈으로만 보고 뚝딱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택이다. 그가 열 살 때 광복을 맞았는데, 그때 집에 재봉틀이 있었다. 재봉틀이 귀하던 그 시절 어머니는 식구들 옷은 물론이고 이웃의 바느질감도 종종 맡았다.
“치마저고리도 많이 지으셨지만, 남학생 교복도 자주 만드셨어요. 그때 호주머니 만드는 것을 많이 봐뒀지요. 어머니가 저고리를 한 장 만들어주면, 이웃이 와서 하루 일을 해주곤 했습니다. ‘품바꿈’(품앗이)이었지요.”
열아홉 살 무렵 그는 광양군수의 딸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문을 연 양재학원에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어요. 학생이 한 예순 명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네요.”
그러나 이 좋은 것도 몇 달 못 가 끝이 나고 말았다. 불면 꺼지랴 애지중지하며 키운 귀한 딸이기에 국민(초등)학교도 마지못해 보냈던 아버지는 다 큰 처자가 된 딸이 밖으로 나돌면 헛바람 든다고 극구 반대했다. 안 그래도 딸이 솜씨 좋은 것을 불안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대놓고 양재학원을 다니는 딸이 그 재주로 팔자가 사나워지지 않을까 두려웠으리라.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학원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는 딸에게 화가 나 나무 재떨이를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왼쪽 어깻죽지에 맞았다.
“바느질하면 오른쪽 어깨와 팔이 아프게 마련인데 10년 전부터 왼쪽이 자꾸 아픈 거예요.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기에, ‘왼쪽은 따라만 가는 팔인데 왜 아프지?’ 하고 곰곰 생각해봤더니 그때 아버님께 맞은 것이 떠오릅디다.”
그 당시는 까맣게 멍이 들었다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아픔이 40년도 더 지나 다시 살아나다니 사람의 몸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통증은 그가 무리할 때면 어김없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경고를 하는 듯하다. 그때 아버지가 걱정하고 야단했던 것처럼.
친정아버지는 곰방대를 두드리고
양재학원은 곧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는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고향 어른 가운데 환갑을 맞은 이가 있어서 모시 중의와 적삼, 두루마기 일습을 지어 선물로 보냈다.
“그 어른이 양복점을 하는 분이어서 바느질과 옷에 대해 잘 아셨죠. 잔치 때 아버지께 ‘걔가 바느질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고 칭찬을 하셨던가 봐요. 그 뒤로는 아버지의 야단이 조금 줄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