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옌볜 출신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장률 감독은 원래 소설가다. 1986년까지 그는 글을 썼다. 그리고 모든 글쟁이의 로망처럼 갑자기 글쓰기를 집어치웠는데, 그건 순전히 남의 글이 자신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이란 보르헤스를 얘기한다.
그가 보르헤스보다 더 잘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소설에 대한 창작욕이 고갈돼가는 걸 감지하고 스스로 정리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그런 문학적 불행이 영화적으로는 새로운 작가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장률 얘기는 여기서 잠깐 멈춘다. 그의 영화 ‘경주’와 고도 경주의 관계를 얘기하려다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장률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현대 영화 중 경주를 올곧이 배경으로 한 영화는 장률의 ‘경주’뿐이다. 지명을 제목으로까지 끌어다 쓰는 데는 그곳이 가져오는 영화적 이미지를 아무리 용을 써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경주’는 경주에 온 베이징대 중문학과 교수의, 일종의 여행담이다. 거기엔 과거의 여자가 얽히고 현재의 여자가 얽힌다. 한중관계의 미래를 놓고 시비를 거는 한국의 정치학과 교수 얘기도 얽힌다. 술이 있고 춘화가 나오며 중국의 유명한 한시도 나온다.
누가 경주를 안다 하는가

영화 ‘경주’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무의미한 일상을 담아내는 척하는 장면들이 ‘경주’에서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주인공 최현(박해일)이 경주역사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릴 때 벌어지는 일이 그런 것이다. 맨 앞줄에는 비루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이현정)이 있고 그런 엄마에게 칭얼대는 듯한 소녀 한 명이 매달려 있다. 여느 버스 정류장에서라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며, 저 여자도 사는 게 참 힘든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에서 이 여자가 아이와 동반자살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자신을, 특히 자신의 아이를 해치는 장면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관객에게는 그 ‘팩트’가 충분히 전달된다. 그제야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서 여자의 표정, 몸짓,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장률은 이 아무것도 아닌 장면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활용한다. 이름도 없는 단역배우(사실은 후배 감독)를 등장시켜서는 무심한 척, 무의미하면서도 사소해 보이는 현대사회의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가차없는 폭력이 존재하는지 드러내려 한다. 영화 ‘경주’는 그렇게 시작한다.
경주 여행을 남들 다 하듯 보문관광단지니 불국사니 하는 곳을 둘러본다는 식으로 휘젓고 다니는 것은 천박한 짓이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경주는 천년고도다. 천년 전 휘황찬란한 역사를 만들어낸 도시를 여행하려면 그만큼의 ‘리스펙트’를 지녀야 한다. 경주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도시이고, 실제로 도시 어느 한복판에 있다 한들 그 존엄성이 끈끈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니 외곽부터 구경하는 것이 좋다. 1박에 불과한 일정이라면 천마총 등등의 유물과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스케줄을 짜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