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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이미자 ‘흑산도 아가씨’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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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산도 아가씨’를 함께 불러본 이들은 안다. 이 노래는 중반을 넘어가면 대개 합창으로 바뀐다는 걸. 폭탄주에 취해 졸던 이도, 손바닥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이도 마지막 대목에선 저마다 목청껏 냅다 따라 지른다.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하늘에서 본 흑산도 풍경. 드론을 이용해 100m 상공에서 촬영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른바 ‘문화교실’이라는 것을 갔다. 문화교실이란 한 달이나 한 학기에 한 번 단체로 영화 보러 가는 것을 말한다. 문화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럽던 1970년대, 문화교실로 영화 한 번 보면 문화인이 되는 줄 알았다.

작게는 한 학년이, 크게는 전교생이 모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학년별로 행진하며 극장엘 가게 했다. 교통편은 아예 없고, 당연히 40~50분 거리를 걸어서 간다. 새끼줄처럼 꼬여서 이리저리 신작로를 돌고 돌아가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엄청난 양의 콘텐츠를 손바닥에 쥐고 있는 지금의 풍요로운 세대가 알기나 하겠는가. 바로 어제 일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섬마을 선생님’의 섬?

그때 본 영화가 ‘작은 꿈이 꽃필 때’였다. 지금의 교육부 격인 문교부가 강제로 보게 하는 이른바 계몽영화. 그래서 지금의 중년세대는 대부분 기억할 것으로 짐작된다.

남해안 다도해의 어느 외딴섬에 사범학교를 갓 나온 풋내기 남녀 선생이 부임한다. 고아 출신인 총각 선생과 부잣집 외동딸인 처녀 선생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외딴섬에 꿈을 심어주기 위해 무지와 가난을 상대로 끈질긴 투쟁을 벌인다. 우여곡절 끝에 섬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교사(校舍)를 신축하지만, 예기치 않은 폭풍으로 좌절을 맞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절 영화들이 대개 그랬듯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자료를 뒤적여보니 1972년 작품이고 11회 대종상 장려상, 고(故) 김희갑 선생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가 극중 섬마을 고집불통 영감으로 나와 주인공들을 사사건건 애먹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한동안 김희갑 선생을 무척 미워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영화의 주인공은 ‘섬마을 선생님’이다. 그 영화에 이미자 선생이 부른 ‘섬마을 선생님’이 흘러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봐도 거기까지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영화의 얼개는 국민가요쯤 되는 노래 ‘섬마을 선생님’과 많이도 닮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언젠가 또 다른 유년 시절, 역시 이미자 선생의 ‘흑산도 아가씨’라는 노래를 어머니의 콧노래를 통해 듣게 되고, 대뜸 아득한 시절 본 그 영화의 무대가 틀림없이 흑산도일 거라고 단정하게 된다. 흑산도. 매년 홍어축제를 여는 홍어의 본고장이자 상록수림 산이 푸르다 못해 바다 멀리서 바라다보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나는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만 보다 가슴이 검게 타버렸다’는 노랫말이 흑산도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흑산도 대통령’ 이미자

흑산도로 가는 길은 서울에서는 가장 먼 길이 된다. 용산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포행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 다시 목포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연락선을 타야 한다. 흑산도의 위성 격인 홍도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사나흘 일정은 잡아야 하는 간단치 않은 여정이다. 부두에서 탄 배는 두 시간 조금 더 걸려 (대)흑산도에 내려준다. 프로펠러를 사용하지 않고 제트 엔진을 사용해 물을 뒤로 뿜어내는 쾌속선 덕분이다.

그러나 안심하면 안 된다. 두 시간 뱃길은 결코 녹록한 일정이 아니다. 중간 기착지인 도초도와 비금도까지는 내해(內海)여서 잔잔하지만, 나머지는 외해(外海) 구간이라 사방에 파도가 넘실대는 완전한 망망대해다. 바람이 없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배는 마치 돌고래가 유영하듯 거친 파도에 높이 올랐다 내동이쳐지기를 반복한다. 평생 멀미를 해본 적이 없어 자신만만하던 나도 속이 울렁거려 무척 고통스러웠다. 흑산도고 뭐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눈만 감고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한참 만에 부두에 닿았다.

흑산도는 이미자 선생의 세상이다. 이미자 선생은 이 섬의 도주(島主)요 대통령, 알파요 오메가다. 흑산도에서 이미자 선생은 고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 분)과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극중 커츠 대령은 미국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전설적인 군인인데도 메콩 강 정글에 숨어들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군림한다.

흑산도에서 이미자 선생은 절대지존이다. 섬사람들의 사랑을 몽땅 차지하는 영원한 아이돌이다. 10대가 많지 않은 흑산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딱 3가지,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동백아가씨’다. 모두 이미자 선생의 노래다. 일설에 의하면 그나마 연전에는 ‘흑산도 아가씨’ 딱 한 곡뿐이었는데 노래비 옆의 노래 자동 생성기가 고장 나 수리하면서 세 곡으로 늘었다고 한다. 공중화장실 문을 열면 ‘흑산도 아가씨’가, 식당에 들어서면 ‘섬마을 선생님’이, 버스 정류장에선 ‘동백아가씨’가 구성지게도 흘러나온다. 가히 ‘이미자 천하(天下)’라 하겠다.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열창하는 이미자와 ‘섬마을 선생님’이 수록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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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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