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1961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흑산도 주민의 가족사진. 일제 때 일본인 어부 15가구가 정착해 고래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고래뼈로 만든 일본식 기둥문(도리)이 보인다. (오른쪽) 1972년 9월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에 온 흑산도 성무중학교 학생들.
흑산도에서 가장 사람이 붐비는 곳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예리항이다. 배가 부두에 들어서면 건너편 터미널 귀퉁이에 붙은 구닥다리 양철 스피커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오는데….” 아득한 옛날 어머니 치맛자락을 쥐고 따라다니며 듣던 그 노래다.
그러나 노래의 탄생 계기는 섬 아가씨의 절절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다. 작사가 정두수 선생이 1965년 봄 어느 날 여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다방에서 우연히 동아일보 석간 사회면 톱기사를 보게 된다. 섬 아이들이 거센 풍랑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하게 됐다는 딱한 소식을 접한 청와대의 육영수 여사가 해군에 부탁해 함정을 동원해서 아이들의 소원, 즉 서울 구경을 시켜줬다는 뉴스였다. 정두수 선생과 콤비를 이룬 작곡가 박춘석 선생이 곡을 붙여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된다. 노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탄생 배경이야 어찌됐든 노래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광풍 속 1970년대 보통 한국인들의 고달픔을 위무하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가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청년을 노래했다면, ‘흑산도 아가씨’는 섬마을에서 떠나지 못한 채 서울로 상징되는 도시를 그리는 섬처녀의 애환을 담은 셈이다. 그래서 노래는 산업화 시대 한국인들에게 엄청나게 불려졌다. 아득한 외딴섬 아가씨의 숙명적인 슬픔과 그 시대의 애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노랫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1절에서는 흑산도가 고향인 ‘진짜’ 흑산도 아가씨의 뭍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함께 아파했는데, 2절은 육지에서 흑산도까지 강제적으로 팔려온 작부(酌婦)들, 이른바 ‘색시’들의 귀양살이와 다를 바 없는 강퍅한 운명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흑산도 아가씨와는 전혀 상관없이 흑산도 어린이 때문에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하다.
흑산도는 옆구리에 끼고 있는 홍도와 더불어 관광업으로 먹고산다. 그런데 흑산도 사람들은 홍도에 대해 좀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대개 ‘내지 손님’들이 널리 알려진 홍도를 가기 위해 잠깐 거쳐가는 섬으로 흑산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실 홍도와 흑산도는 여행 방법부터 다르다. 홍도는 해상에서 유람선을 타고 섬 외곽을 둘러봐야 한다. 기암괴석이 특징인 홍도는 바다에 나가서야 그 진경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홍도에 발을 딛고 서면 그저 그런 보통 섬에 불과하다. 많은 육지 사람은 여행 하이라이트로 단연 홍도를 꼽고, 이 때문에 흑산도를 저평가하는 손님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흑산도는 고군분투하고 있다. 돌아다니다 보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갖가지 노력이 섬 전체에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흑산도 중앙 방파제에 설치된 ‘흑산도 아가씨’ 조형물.
고래공원도 그중 하나다. 흑산도 예리항 방파제로 가는 길은 고래 파시(波市, 생선시장)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고래 파시가 성행할 때 고래 위판장과 해체장이 있었다. 지금 흑산도에서 고래 파시를 추억하기는 어렵다. 타일로 복사된 사진 몇 장과 고래공원이 적힌 안내표지판 하나가 그 시대를 보여주는 전부다.
하지만 200여 년 전 흑산도 인근 바다는 엄청난 수의 고래가 몰리는 번식장이었다. 희귀종인 귀신고래도 흑산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다 무분별한 남획으로 고래 파시는 1960년대 후반을 끝으로 사라졌고, 그 대신 조기 파시가 연평도와 함께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노래 ‘흑산도 아가씨’는 활황을 누리던 조기 파시와 시대적으로 일치한다. 파시가 절정이던 1960~70년대 흑산도는 풍요로운 부자 섬이었다. 예리항은 요릿집, 술집, 색싯집에서 흘러나오는 ‘니나노 장단’으로 밤마다 들썩거렸고, 때맞춰 나온 ‘흑산도 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이다.
흑산도는 왕조시대 귀양지로도 유명했다. 당시 악명 높은 귀양지이던 제주도처럼, 육지에서 멀고 바닷길이 험해 귀양을 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무사히 섬에 도착해도 식량을 구할 길이 없어 굶어 죽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정약전이 있다. 그래서 흑산도에선 일단 정약전 유배지부터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초가집 하나만 덜렁 복원됐지만, 그의 삶은 지금 시대에도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불어닥친 천주교 탄압으로, 당대의 명문가이던 정약전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정약종은 처형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인 정약전이 이 궁핍한 절해고도에 왔을 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럼에도 그가 남긴 국내 최초의 해양생물 안내서 ‘현산어보(자산어보)’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아마도 무지한 왕조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그는 물고기 관찰로 삭혔으리라.

노래 ‘흑산도 아가씨’의 모티프가 된 심리초교 자리. 폐교 후 교실은 닭장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