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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의술로 치유하는 100세 프로젝트 시동”

‘폐 건강 전도사’ 서효석 편강한의원장

“활인의술로 치유하는 100세 프로젝트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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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친 설득에 무역 꿈 접어…“한의사는 운명의 길”
  • ● 편강탕은 흔한 약재로 만든 ‘용도의 발명’ 결과물
  • ● 美 NYT 광고, ‘서효석 Day’ 명명…한의학 韓流 선봉
  • ● “등산으로 폐에 맑은 공기 가득 담아야 건강”
“활인의술로 치유하는 100세 프로젝트 시동”
스트레스 받는다, 열 받는다, 실제로 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대부분 열은 심폐를 지나 빠져나가고 일부는 남는다, (우리 몸의) 폐포는 5억 개다, 5억 개의 방이 있는 셈이다, 방을 지나다 잔열이 있으면 적열(積熱)이 생기고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이 나온다, 코코르티솔의 혈중농도가 높아지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편도가 붓고 폐 기능도 떨어진다….”

짐짓 기괴했지만, 그의 진지함에 웃지도 못했다. 기자가 폐 건강에 대해 묻자 그는 주술에 걸린 듯 정면을 쳐다보며 한동한 한의학 원리를 읊조렸다. 어릴 적 구구단을 외울 때처럼 일정한 운율과 성조를 유지하면서.

한의(韓醫)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신문, 지하철, 버스, 옥외·극장광고 등을 통해 ‘아토피, 비염, 천식은 편강탕(한의원)’이라는 카피 문구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의 뜻으로 ‘편강탕 같은…’이라는 비유법이 유행할 정도다. 편강탕을 개발해 한약 수출 1호 한의사가 되고, 딱딱한 한의원 광고를 마니아층이 형성될 만큼 ‘대박’으로 연결한 한의사가 서효석(69) 편강한의원장이다.

상복도 터졌다. 지난 4월 글로벌 의료서비스 비염천식한방부문 대상·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았고, 6월에는 5년 연속 한의원 부문 ‘소비자가 선정한 품질만족대상’으로 뽑혔다. 내친김에 태평양도 건넜다. 6, 7월 미국 주요 도시에서 세미나를 열었고 뉴욕 주는 6월 26일을 ‘닥터 서효석 데이(Day)’로 명명했다. 지난해에는 ‘뉴욕타임스’에 폐 건강 관련 전면광고를 게재해 ‘한의학 한류(韓流)’ 바람을 일으켰다. 추석 연휴 직전인 9월 25일, 카페를 연상케 하는 서울 서초동 편강한의원에서 그를 만났다. 명절을 앞둔 터라 자연스럽게 가족 얘기부터 나왔다.

녹비(鹿皮)에 가로왈(曰)



▼ 어릴 때부터 한의학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내가 2남6녀 중 장남인데, 아버지께선 장남에게 유난히 관대하셨어요. 용돈 2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3만 원을 주면서 ‘아껴 쓰라’고 눈짓을 하셨는데, 그만큼 기대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전북 이리(현재 익산)에서 큰 서적상을 하셨어요. 아마 전북 지역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을 겁니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책 속에 파묻혀 살았어요. ‘서유기’ ‘소공녀’ ‘삼총사’ 같은 명작들을 많이 읽었죠. 부친은 한방 애호가였어요. 한방서적 50여 권을 통독하셨는데, 가족이 아프면 직접 한약재를 사와서 다려 먹이셨죠.”

▼ 부친을 통해 한의학에 관심을 가졌군요.

“그래도 대학은 무역학과로 가려고 했어요. 시간 나면 아버지 장사를 도와드렸는데, 종업원이 팔 때와 내가 팔 때 단위시간당 매출액이 확연히 달랐어요. 책 대신 비행기를 팔면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역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 부친이 반대했나요.

“반대하셨다기보다는…. 우리 대학 입시 때는 전기대, 후기대가 있었어요. 전기대 의대 시험에 떨어졌는데, 솔직히 나는 잘됐다 싶었어요. 후기대 무역학과에 갈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후기대인 경희대 무역학과 입시원서를 샀는데, 아버지는 경희대 한의학과 원서를 사오셨어요. 고교(익산 남성고) 한문선생님 등을 모시고 와서 나를 설득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선택은 운명의 길이고, 행운의 길이었습니다.”

▼ 한의학과의 첫 대면은 어땠습니까.

“이론적이지 않아 참 모호한 느낌이더군요. ‘녹비(鹿皮)에 가로왈(曰)’이라고, 사슴 가죽에 해일(日) 자를 써놓고 옆으로 당기면 가로왈(曰)자가 되는 것처럼 명쾌하질 않았어요. 나는 명쾌한 게 좋았거든요. 그래서 명쾌한 서양 의학에 심취했어요. 거꾸로 간 거죠. 우리 학교에 강의하러 오신 서울대 의대 장가용 교수가 특히 나를 예뻐하셨는데, 강의를 마치고 용두동 자취방까지 나를 데려다주시곤 했죠. 그분이 장기려 박사의 아드님인데, 내가 해부학에 큰 관심을 보였더니 여름방학 때 공부하라고 시체 한 구와 병리학 슬라이드 100개를 보내주셨어요. 그 집안 DNA인가봐요. 그때 참 열심히 공부했죠.”

장기려(1911~1995) 박사는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아내와 5남매를 북한에 둔 채 차남(장가용)만 데리고 월남했다.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인술과 봉사활동을 펼친 의사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해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서 원장의 ‘DNA’ 얘기는 장가용 교수의 배려심이 그의 아버지 장기려 박사 희생정신과 닮았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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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강 |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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