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

만해 한용운

  • 소래섭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입력2014-01-21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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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은 누구인가. 만해 한용운이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노래한 후부터 임의 정체를 밝히려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자유를 잃은 조국, 사랑하는 이, 혹은 절대자 등. 정답은 없다. 만해는 종교에 귀의했지만 연애를 노래했고, 척박한 조선의 현실에 살면서도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고자 했던, 거리낌 없는 자유의 시인이었다.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
    “많으면 해가 되고 적으면 이로운 여덟 가지가 있다. 여행, 섹스, 부, 노동, 와인, 수면, 더운 목욕, 피 흘리는 싸움.”

    서기 500년경의 기록인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한 구절이다. 자고로 무엇을 금기로 규정하거나 자제를 권고하는 것은, 그만큼 욕망이 크거나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세의 예절에 관한 책들에는 ‘나이프로 이를 쑤시지 말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했다는 반증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자제를 권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노동’과 ‘피 흘리는 싸움’의 경우에는 예외가 있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람이 열광하는 대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목록에 ‘와인’이 들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오래전부터 서구인들에게 포도주가 탐식의 대상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포도주의 매혹

    포도주의 역사는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홍수에서 세상을 구한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맨 먼저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수확해 술을 만들어 마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실증적으로는 기원전 35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용기 안에 포도주가 들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렇듯 오래전부터 포도주는 서구인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술이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포도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최초의 인물로, 그는 “포도주가 인간에게 벌을 내리고 광란하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혼의 정숙, 건강, 심신의 강건함을 제공할 목적으로 주어진 값진 약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 또한 “신께서는 물을 만드셨지만, 인간은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말로 포도주를 예찬했다.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

    국내에서 출간된 여러 종류의 시집 ‘님의 침묵’ .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포도주는 대중적인 술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일상적으로 물 대신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권리가 시민에게도 허용되었고, 산업혁명으로 노동계급이 늘면서 술 소비도 대폭 증가했다.

    이에 발맞춰 포도주는 수많은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근대시의 개척자 보들레르는 ‘포도주의 혼’이라는 시에서 포도주를 인격화해 이렇게 노래했다.

    “노동에 지친 한 사내의 목구멍 속으로/ 떨어져 내릴 때면 내 기쁨 한량없기에/ 그의 뜨거운 가슴 속은 정다운 무덤이 되어/ 내 써늘한 지하실보다 한결 더 아늑하기에.”

    서양에서는 대중적인 술이었지만, 우리에게 포도주가 익숙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고종 때 서양의 포도주가 소개되었고, 1920년대 ‘동아일보’ 지면에서도 아카다마(赤玉) 포트와인 광고를 찾을 수 있지만, 포도주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술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만해 한용운이 1926년 간행한 시집 ‘임의 침묵’에 포도주가 등장한다.

    가을바람과 아침볕에 마치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고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들입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 잔에 가득히 부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

    님이여, 그 술은 한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님이여.

    -한용운, ‘포도주’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

    1929년 8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포트와인 광고.

    본래 불가에서는 술을 멀리한다. 승려의 계율을 기록한 ‘사분율’에 따르면, 부처는 “여덟 가지 술을 마셔도 좋다. 취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 때나 마셔도 좋고 취했거든 마시지 말라. 오늘 받은 술은 내일에 먹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마셔도 좋은데 취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사실은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술을 삼가거나 ‘곡차’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 불가의 상례인데, 당대의 대표적인 승려였던 만해는 임에게 포도주를 가득 부어드리겠다고 노래한다.

    의아한 점은 더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님의 침묵’이 발표된 1920년대는 포도주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서민이 즐겨 마신 것은 막걸리와 소주였고, 맥주는 신세대라고 으스대던 이른바 ‘모던 보이’들이나 마시는 술이었다. 그러니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출가해 평생 불가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만해가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혹여 막걸리와 소주라면 모르겠으나 서양 문물과 만해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1928년 잡지 ‘별건곤’에 실린 글에서 그는 근검절약만이 조선인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밥도 잘 먹을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양식(洋食)이 무슨 양식이며, 행랑방도 없어서 동서로 쫓겨 다니는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는데 양옥(洋屋)이 무슨 양옥이냐. 남이 비단옷을 입으면 우리는 무명옷을 입고, 남이 자동차를 타면 우리는 발로 걸어 다닌다 하여도 현재의 생활을 유지할지 의문이다.”

    하필 포도주를 바친 까닭

    만해는 임에게 바치는 술로 왜 포도주를 선택한 것일까? 먼저 그것이 ‘임에게 바치는 술’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가문학은 곧 ‘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임에는 전통성이 있다. 근대 이전의 시가에서 임은 대개 임금 또는 애인을 가리켰다. 1910년대 시문학은 국권 상실에 따른 좌절을 ‘부재한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근대시의 중요한 영역을 창조했다. 근대적 주체를 확립하려는 계몽적 기획이 좌절되었을 때, 임은 자아를 확충하고 현실을 자각하며 전망을 모색하는 시적 매개항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면 임은 시인들이 애용하는 관용어의 하나로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확인하고 망국민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효한 장치로 작동한다.

    만해의 임에 대해서는 네 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째는 빼앗긴 조국이나 민족의 정기 등으로 보는 민족적 견해다. 둘째는 중생, 불교적 진리, 무아(無我) 등으로 보는 불교적 견해가 있다. 셋째는 민족적 견해와 불교적 견해 등을 절충한 견해이고, 마지막으로는 생명적 근원, 사랑과 희망과 이상의 상징 등으로 보는 작품 중심적 견해가 있다. 어떻게 보든 만해에게 임은 인간 이상의 성스러운 대상이다. 그런 대상에게 소주나 맥주를 바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대상에게는 오래전부터 신성한 제의에 사용됐던 술이 어울리고, 그런 면에서 포도주는 제격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포도주는 바쿠스 등의 신과 연관되고, 이슬람교에서 포도주는 낙원에 살도록 선택된 자들만이 마시는 술이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가리켜 “이것은 나의 피니라”고 말한다. 아마도 붉은빛이 피와 가장 비슷한 술이라는 것은 만해가 하필 포도주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포도주’에서 화자가 임에게 바치는 것은 포도주이자 눈물이다. 임을 기다리는 간곡한 심정에서 흘리는 눈물, 그것은 곧 생명의 정수인 피와 다를 것이 없다.

    부드러운 여성적 여조 안에 감춰져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신성한 대상에 대한 지극한 경배와 피를 토할 만큼의 간절한 그리움이다. 그러니 포도주를 선택한 것은 만해의 천재적인 시적 감성의 발로다. 만약 여기에 막걸리나 요즘 포도주 대용으로 많이 즐기는 ‘복분자주’ 따위가 들어갔으면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당신’의 발견과 연애편지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

    만해 한용운의 손바닥과 필적.

    시집 ‘님의 침묵’에 임만큼 많이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임을 부르는 ‘당신’이라 말이다. 그런데 임을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로 부르는 것은 1920년대에는 무척 새로운 현상이었다.

    임이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닌 명칭인 데 비해, 당신은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야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임과 같은 극존칭 대상에 대한 호칭으로 당신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로 짐작된다. 이때에 이르러 당신이 존칭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20년을 전후로 당신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됐기 때문이다.

    1921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는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2인칭 대명사 경어로 ‘당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외에도 계명구락부는 1921년 ‘성명하경칭어(姓名下敬稱語)’로 ‘씨(氏)’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결의한다. 그들이 ‘씨’와 ‘당신’을 사용하자고 결의했다는 사실은, 역으로 그 말들이 그런 용례로 널리 사용되는 말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계명구락부는 민족 계몽과 학술 연구라는 목적을 내세운 단체였다. 문일평, 박승빈, 오세창, 윤치호, 이능화, 최남선 등이 주도해 만들어졌으며, 변호사, 사업가, 의사, 은행원 등 식민지 상류층 인사들이 회원이었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재력가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의 친목 단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들은 말과 글, 예의, 의식주 등 일상생활의 개선을 통해 민족 계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씨’와 ‘당신’을 사용하자는 그들의 결의 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의 사상을 수용하려는 계몽주의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계급주의 시대에는 언어 또한 계급에 따라 다르게 사용해왔다고 비판하면서, 평등제도를 이상으로 하는 시대에는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 용어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영어의 ‘미스터(Mr)’, 일본어의 ‘상(箱)’에 해당하는 말로 ‘씨’를 사용하고, 경어로는 ‘당신’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당대의 사교적 결함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근대화로 맞닥뜨린 낯선 경험과 관련되어 있었다.

    신분에 구속되고 소규모 공동체에 고립되어 있던 전근대와 달리, 근대 문물이 도입되고 도시가 확장되면서 낯선 사람과 대면할 일이 늘었다. 근대인들은 종래의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국민 혹은 인간이라는 평등한 대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서로를 호칭할 마땅한 말이 없었다. 경어법이 없는 영어의 경우에는 신분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you’라는 호칭을 쓰면 되지만, 경어법이 발달한 우리의 경우 ‘너, 그대, 자네’와 같이 하대하는 말을 처음 만나는 대상에게 쓰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볼 때 ‘씨’와 ‘당신’은 도시화와 평등주의라는 근대의 경험 속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은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평등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 낯선 사람과 만나는 데서 생기는 사교상 불편을 해소하는 동시에, 한국어의 특성인 경어법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 속에서 ‘씨’와 ‘당신’이 ‘발견’됐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계명구락부의 바람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실현된 장소는 근대적 연애와 연애편지뿐이었다. 낭만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연애는 낯선 타인과 처음 만나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이때 상대방의 계급적 지위나 연령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감정적 유대뿐이다. 또한 연애는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부르기 위한 호칭이나 2인칭 대명사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우리의 관습상 처음 만나는 상대를 하대할 수 없고, 낭만적 사랑은 상대에 대한 헌신과 숭배를 수반하기 마련이므로, 연애에 필요한 호칭이나 2인칭 대명사는 존칭의 자질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에 응답한 것이 바로 ‘씨’와 ‘당신’이었다.

    1920년대의 연애편지에 정착한 이래 ‘씨’와 ‘당신’은 현재에도 연애와 연애편지에서 보편적인 언어로 자리 잡았다. 일상에서는 누군가를 ‘당신’이라고 함부로 불렀다가는 시비에 휘말릴 만큼 쓰기 조심스럽지만, 연애의 최초 단계에서는 당신만큼 상대를 부르기에 적절한 말이 없다. 아마도 ‘씨’와 ‘당신’이 없이는 근대적 연애와 연애편지의 성립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1년 계명구락부에 의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이후 ‘연애의 시대’라는 1920년대를 통과하면서, ‘씨’와 ‘당신’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사랑의 언어’라는 또 다른 지위를 확보했던 셈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당신이 전면적으로 사용된 ‘님의 침묵’에서도 연애편지와의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다. 당대의 일반적인 연애편지가 ‘~씨, 당신은’이라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면, ‘님의 침묵’은 ‘임이여, 당신은’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라는 말에 주목하면 ‘님의 침묵’은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로 읽을 수 있다. 시집의 구성 또한 그렇다. 머리말이라 할 수 있는 ‘군말’과 창작 후기라 할 수 있는 ‘독자에게’를 제외하면 ‘님의 침묵’의 구성은 편지와 유사하다. 임과의 이별을 이야기하는 최초의 편지 ‘님의 침묵’에서 시작해 임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어지다가 ‘당신의 편지’에서 임의 편지를 받고, 다시 임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어진다. 물론 개별 시편들이 ‘첫인사-사연-끝인사-날짜-서명’이라는 편지 형식을 엄밀하게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구조, 어휘, 어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당대의 연애편지 형식을 시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연애편지 형식의 ‘님의 침묵’

    1920년대 소설에서는 편지 양식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당시 소설 속 편지는 개인의 내밀함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주로 근대적 주체가 사랑에 대해 갖는 번민과 관련된 것이었다. 편지라는 친밀성의 소통 방식이 소설 속에 이식됨으로써 근대적 개인의 내밀한 삶, 특히 성욕이나 사랑 등과 관련된 경험과 생각을 일정 부분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데에 1920년대 서간체 소설의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님의 침묵’에 나타난 편지 양식의 수용과 변용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편지는 분리와 소통이라는 역설을 지닌다. 분리된 상황 속에서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편지다.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을’ 때 편지 쓰기가 이루어진다. 반드시 이별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대상과 정서적 혹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편지 쓰기가 시작된다. ‘님의 침묵’은 임이 부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임과의 소통이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 이는 임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임과의 분리를 받아들이고 과도한 상실감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전의 시들과 ‘님의 침묵’이 차별되는 지점이다.

    전자의 시들이 계몽적 이념에 집착해 현실을 부인하고, 후자의 시들이 근대적 개인의 분열된 내면에 침몰하는 반면,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주체의 분열을 견딤으로써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만해는 ‘님의 침묵’에서 ‘임’과 ‘당신’을 결합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전개한다. 그는 ‘복종’이라는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라는 말로 자유연애를 숭배하던 당대의 통념을 전복하면서 사랑에 대한 독창적 관점을 제시한다. 만해는 자유연애론에서 자유라는 가치를 공유하되 그 해석에 대해서는 계속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즉 어떤 대상을 향해 사랑을 바치는지는 우연 혹은 자유의 문제이지만, 관건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헌신의 지속성이라는 점을 문제 삼고 있었다.

    無碍自在

    이는 ‘님의 침묵’도 마찬가지다. 연애편지가 개개의 특정한 ‘씨’라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면, ‘님의 침묵’은 ‘씨’의 자리에 불변하는 ‘임’을 대체해놓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적 ‘씨’에 대한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기 어려운 것이지만, 온갖 사랑의 대상을 모두 포용하는 ‘임’은 언제나 ‘당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며, 그러한 ‘임’에 대한 사랑은 시공을 초월해 지속돼야 하는 것이다.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또한 이 같은 점에 주목해 만해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만해의 시에 나타난 사랑의 헌신과 관대 등은 신문학운동에서 학대를 받던 연애를 적절히 대우하는 것이며, 만해가 “동양적 기품으로 단련됐다 할 연애”를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전통적 사랑을 대표하는 ‘임’과 서양식 연애를 위해 발견된 ‘당신’이 ‘님의 침묵’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근대적 연애가 옷차림에서 라이프스타일에 이르는 변화를 수반하는 사랑의 새로운 방식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의 보편적 감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전대의 사랑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님의 침묵’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전통과 접점을 지니면서 근대적 연애를 수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다시 만해의 포도주로 돌아가보자. 1932년 만해가 잡지 ‘삼천리’ 기자와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기자 : 석가께서 오늘 조선에 나셨다면 조선옷에 조선짚신을 신고 조선말을 하시면서 조선 산천에 떨어지는 우로(雨露)를 마시고, 조선인이 지키는 법률과 의무를 지키고 계셨을 터이니 역시 민족사상이 그 머리에 없었다고 할 수 없을 줄 압니다.

    만해 : 생활이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주의 혁명을 일야(日夜) 염두에 두시는 분에게 무슨 지역적으로 국한한 특수 운동이 있었겠습니까?

    임에게 포도주를 바치다
    소래섭

    1973년 전북 익산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저서 : ‘백석의 맛’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시는 노래처럼’ 등


    만해에게는 포도주가 서양을 대표하는 술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주의 혁명을 가슴에 품은 이에게 국적이나 지역 따위가 걸림돌이 될 리 없었다. 당시 만해가 머물던 심우장(尋牛莊)에는 ‘무애자재(無碍自在)’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자재한 것, 그것이 바로 만해의 사상과 문학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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