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에는 마치 구구단처럼 자리 잡은 목록이 있다. 금산 인삼, 경산 대추, 공주 밤, 가평 잣, 상주 곶감, 충주 사과, 장호원 복숭아, 포항 과메기, 영광 굴비, 돌산 갓, 양구 시래기, 벌교 꼬막, 제주 감귤 따위다. 나뿐만이 아니다. 밥 짓고, 부엌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만한 것들이다. 지금은 이 목록을 재정리할 때다. 그런데 구구단처럼 머리에 또렷이 새겨진 덕에 새로운 정보로 수정하는 데 꽤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섭씨 1도의 놀라운 나비효과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해 과일의 산지가 북상하고 있다. 무화과(왼쪽)는 충북 충주, 복숭아는 경기 파주까지 올라왔다. [Gettyimage]
특히 과일 재배지가 변화무쌍해졌다. 겨울의 맛과 제주 풍경의 상징이던 감귤은 제주도를 벗어나 대한민국 서해의 북쪽 끄트머리인 인천까지 올라왔다. 초등학교 때 귀한 과일이라고 한 개씩 겨우 받아먹던 바나나가 제주도에서 재배된다니 ‘참으로 기쁘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경기 안성까지 올라와 자란다. 여름 끝물에 반짝 나왔다가 자취를 쏙 감춰 늘 그리던 전남 영암 무화과는 충북 충주에서도 생산된다. 충청도의 으뜸 과일이던 사과는 강원도 여러 지역에서 재배된 지 벌써 꽤 오래됐고, 그 맛도 ‘원산지’ 못지않게 좋다. 작년 가을 강원 원주로 사과를 따러 간 적이 있는데 큼직하고, 물 많고 아삭한 맛이 일품이었다. 포도 역시 강원 영월까지 재배지를 넓혔고, 복숭아도 파주까지 올라왔다. 과일은 아니지만 보성의 녹차가 고성에서도 재배되며, 금산과 풍기에 펼쳐져 있던 드넓은 인삼 재배지가 인천에도 생겨나고 있다.
과일이나 채소가 나오는 시기가 들쭉날쭉해지고, 종류도 다채로워지는 것에 겨우 익숙해지는 중인데 저마다의 고향까지 바뀌니 헷갈린다. 산지가 바뀌면 출하되는 시기도 조금씩 달라질 테니 내 머릿속에 있던 ‘제철 과일’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써야 하나 싶다. 재배지가 바뀌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기후변화다. 코로나19의 탄생 역시 넓게 보면 기후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하니, 과일 재배지가 이쯤에서 변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기온이 1℃ 올라가면, 기존의 생장 온도를 맞추기 위해 작물의 재배한계선이 81㎞ 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고도 역시 154m 높아진다. 섭씨 1도가 일으키는 놀라운 나비효과다.
무늬만 해외파, 고향은 한국
애플망고(왼쪽), 드래곤프루트 같은 해외파 과일이 한국에서 자라고 있다. [Gettyimage]
재배지가 이동한 것 중에 수입과일의 ‘이주’도 빼놓을 수 없다. 모양은 영락없이 ‘외국산’인데 원산지가 ‘국산’인 것이 부쩍 늘었다. 뜨겁고 습한 동남아 여행지의 기억을 새콤새콤 산뜻하게 각인시켜 준 패션프루트가 우리 엄마 고향 근처인 경북 김천에서 자라고 있다, 통조림에 든 것보다 10배는 더 맛있지만 손질하기 까다로운 파인애플이 전남 해남에 있다, 참외와 닮았는데 과육이 부드럽고 먹을 게 한참 더 많은 멜론은 전남 곡성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다가 시래기가 유명한 강원 양구에도 뿌리를 내렸다. 하도 비싸서 쉽게 맛볼 수는 없지만 용과(드래곤프루트)는 해남과 경남 진주에서, 애플망고는 제주와 경북 경주에서 재배 중이다. 이런 변화가 나 같은 소비자에게는 낯설기도 하지만 맛의 기회가 넓어지는 것 같아 반갑기도 하다. 물론 우리 땅으로 이주해오는 과일이 있다면 떠나야 하는 무언가도 생길 것 같은 걱정스러움도 남는다. 봄과 가을이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은 모두가 몸으로 느끼는 변화이니까.
패션푸르트(왼쪽). 패션푸르트 음료. [Getty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