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호

사람은 변해 가도 구찌는 영원하리

  • 이지현 서울디지털대 패션학과 교수

    입력2022-03-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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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찌는 창업주 구초 구치가 상류층 스포츠이던 승마 마구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가죽 제품을 시초로 오늘날 명품 브랜드가 됐다. ‘뱀부 백’ ‘홀스빗 로퍼’ ‘재키 오 백’ 등 아이템은 지금도 구찌의 정체성을 잘 설명해 준다. 이제 구찌에는 구치가(家)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지만 여전히 매력적 디자인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패션 브랜드 구치 가문의 스토리를 다룬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2021’가 개봉돼 구치 가문의 비극이 다시 한번 세간에 알려졌다. ​구치 가문의 며느리 파트리치아 레지아니 역을 맡은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올해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만큼 욕망 가득한 악녀를 완벽하게 재현해 호평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애덤 드라이버, 제러미 아이언스, 알 파치노, 셀마 헤이엑 등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가 총출연해 화제가 됐다. 감독 역시 ‘델마와 루이스’(1991), ‘글래디에이터’(2000), ‘마션’(2015) 등 수많은 영화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이다. 스콧 감독은 2008년 구치 가문을 다룬 영화 제작을 앤젤리나 졸리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으로 추진했지만 구치가의 반대로 한 차례 무산된 바 있다.

    영화 제작 전인 2001년, 구치 가문의 경영권 내분과 청부살인 사건 등 충격적 이면을 담은 책 ‘하우스 오브 구찌’가 출간됐다. 이 책 저자는 이탈리아에서 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15년 넘게 패션 산업을 취재한 사라 게이 포든이다. 그는 구치 가문과 관련된 100명의 인물을 인터뷰하고, 신문과 잡지 등 관련 문헌을 취재하며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창업주 구초 구치 시절부터 3대에 걸친 구치 가문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소설처럼 재구성했다. 책에 이어 영화로까지 제작돼 더 주목받는 브랜드 구찌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1938년 이탈리아 로마에 처음 오픈한 구찌 매장. 사진은 1959년 매장을 방문한 그레이스 켈리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든 모습을 포착했다. [Gettyimage]

    1938년 이탈리아 로마에 처음 오픈한 구찌 매장. 사진은 1959년 매장을 방문한 그레이스 켈리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든 모습을 포착했다. [Gettyimage]

    구찌는 구초 구치가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자신의 성을 따 설립한 가죽제품 전문점으로 시작됐다. 창업주 구초 구치는 1881년 마구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8년 열여섯 나이에 영국 런던 사보이 호텔 벨보이로 취직했는데 호텔을 이용하는 상류층의 안목과 취향을 접하면서 패션에 눈을 떴다. 특히 가죽으로 만든 상류층 여행 트렁크에 관심이 생긴 구초 구치는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수공예 업체인 프란지(Franzi)에서 가죽을 공부했고, 1906년 피렌체에 작은 마구상을 오픈했다. 1921년 상류층 스포츠 문화가 승마에서 자전거로 유행이 바뀌었는데 구치는 변화에 맞춰 피렌체에 ‘구찌’라는 이름의 작은 가방 가게를 오픈했다. 1938년에는 가게를 로마로 확장 이전했다.

    대안으로 탄생한 ‘뱀부 백’

    구초 구치. [위키피디아]

    구초 구치. [위키피디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구찌는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이름을 알린다. 그 주인공은 ‘뱀부 백(Bamboo bag)’이다. 당시 전쟁 때문에 가죽 품귀 현상이 빚어지자 구초 구치는 대안으로 대나무에 열을 가해 곧게 뻗은 모양을 둥그렇게 굴려 가방의 손잡이로 사용했다. 대나무를 가방 디자인에 사용한 것은 새로운 소재를 개발한 성공 사례다. 당시로서는 혁신적 발상이기도 했다. 그렇게 뱀부 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찌를 대표하는 아이템 중 하나가 됐다. 2010년에는 뱀부 백을 재해석해 ‘뉴 뱀부 백’을 출시했는데, 뱀부 손잡이와 버클 디자인은 유지하면서 다양한 컬러와 소재를 적용한 제품들로 큰 인기를 끌었다.

    구찌 상징 된 ‘홀스빗 로퍼’

    구초 구치는 사망하기 전까지 직접 회사를 관리하며 4명의 아들 바스코, 우고, 알도, 로돌포를 주주로 참여시켰다. 1953년 사망 이후 4명의 아들 중 셋째 알도와 넷째 로돌포가 각각 50%씩 경영권을 갖게 된다. 구찌를 대표하는 아이템들은 구찌의 주고객인 상류층이 즐기던 스포츠 승마 마구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게 많았다. 대표적으로 ‘홀스빗 로퍼(Horsebit Loafer)’와 ‘GRG(Green-Red-Green) 가죽 끈 웹’이 있다.



    1950년대 알도 구치는 승마 시 밟는 안장 발판에서 영감을 얻어 ‘홀스빗’ 디자인을 창안했다. 처음에는 가방 장식으로 사용하다가 1953년 신발 장식으로 변용했는데 이렇게 탄생한 ‘홀스빗 로퍼’는 구찌의 상징적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금속 장식물을 구두 발등에 부착하는 획기적인 시도로 인정받았고, 이후 1985년에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영구 전시됐다. 2013년에는 홀스빗 로퍼 60주년을 맞아 구찌에서 ‘익스클루시브 1953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1951년에는 안장 끈에서 영감을 받아 초록색, 빨간색 줄무늬 ‘GRG 가죽 끈 웹’이 탄생했다. GRG 웹은 다양한 구찌 아이템에 적용돼 스포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구찌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GRG 웹을 응용한 ‘블루-레드-블루’ 컬러 조합은 ‘BRB’라고 불린다.

    창업주 2세 알도 구치는 1952년 미국 뉴욕에서 최초의 구찌 부티크를 열었다. 1960년대 아시아 시장을 공략해 홍콩과 일본 도쿄에 차례로 매장을 오픈했다. 당시 알도는 아버지인 구초 구치의 이름을 딴 GG 로고를 개발해 이를 캔버스 소재에 사용해 주목받았다.

    1950~196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실크 스카프가 유행했는데, 이 실크 스카프의 ‘플로라(Flora) 패턴’은 1966년 모나코 왕비가 된 켈리와 남편 레니어 3세가 밀라노 구찌 매장을 방문해 제작을 의뢰한 것에서 비롯했다. 로돌프는 구찌의 고문이던 화가 비토리오 아코르네로에게 꽃무늬 스카프를 만들기 위해 디자인을 요청했고, 그는 사계절을 대표하는 꽃과 열매, 곤충이 어우러진 일러스트를 패턴으로 제작했다. 이후 구찌의 플로라 패턴은 스카프뿐 아니라 구찌의 다양한 아이템에 현재까지 응용된다.

    구찌의 시그너처 아이템 중 하나인 ‘재키 오 백(Jackie O bag)’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인이며 1960년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구찌에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에 경의를 표하며 1958년 첫선을 보인 이 핸드백은 1960년대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후 구찌는 2009년 재키 백을 재해석해 ‘뉴 재키 백’을 출시했다. 뉴 재키 백은 둥근 모서리라는 특징을 유지하면서 바이올렛, 에메랄드 등 다채로운 컬러와 악어, 타조, 송아지 가죽 등 여러 소재를 적용했다. 또 뱀부와 긴 가죽 태슬(Tassel·술) 장식을 더한 역동적 디자인으로 재탄생했다.

    구찌 부활시킨 디자이너 톰 포드

    톰 포드. [뉴시스]

    톰 포드. [뉴시스]

    알도 구치(왼쪽 사진 가운데)와 마우리치오 구치. [Gettyimage]

    알도 구치(왼쪽 사진 가운데)와 마우리치오 구치. [Gettyimage]

    로돌포는 1975년 향수, 1979년 액세서리 컬렉션을 론칭하고 브랜드 라이선스 사업도 시작했다. 알도는 아들인 로베르토에게 향수 부문을 맡기고, 구찌의 액세서리 라인 홍보에 주력해 성공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당시 구찌의 디자이너였던 알도의 둘째 아들 파올로가 ‘구찌 플러스(GUCCI Plus)’라는 세컨드 브랜드를 론칭했는데 라이선스를 남발해 구찌의 명성이 추락한다. 이에 알도는 아들 파올로를 해고하고, 파올로는 아버지 알도를 탈세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1986년 1월, 여든한 살의 알도 구치는 뉴욕에서 700만 달러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창업주 3세이자 로돌포 구치의 아들인 마우리치오 구치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50%의 구찌 지분을 상속받고, 1989년 새로운 구찌 그룹을 구축했다.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버드대 법대 출신 전문 경영인 도메니코 드 솔레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으며 제프리 빈, 캘빈 클라인, 톰 포드 등 젊고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발탁했다.

    특히 톰 포드는 구찌의 부활을 이끌었다. 1990년 입사한 톰 포드는 4년 만에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됐는데 1995년 벨벳 힙스터스, 스키니 새틴 셔츠와 금속 페이턴트 레더(에나멜 가죽) 부츠 등을 제작하며 글래머 요소를 패션으로 부활시켰다. ‘1995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마돈나가 구찌의 의상을 착용하고 “구찌, 구찌, 구찌”를 외쳐 톰 포드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그는 패션뿐 아니라 광고와 마케팅 재능까지 겸비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구찌의 콘셉트를 글래머, 에로티시즘, 모던 등으로 각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끔찍한 비극, 청부살인

    마우리치오 구치와 파트리치아 레지아니. [위키피디아]

    마우리치오 구치와 파트리치아 레지아니. [위키피디아]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는 1987년부터 구찌의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1989년에 이르러 구찌 주식 50%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93년에는 로돌포 구치의 아들 마우리치오 구치가 보유한 50% 지분까지 모두 사들인 인베스트코프는 2년 뒤 마우리치오를 해임하기에 이른다.

    마우리치오는 1970년대 후반부터 회사 경영에 참여했으나 결혼과 이혼, 사업 실패를 겪으며 회사 지분 매각 시점에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1978년 사회적 신분 차이와 가족 반대에도 허영심이 많은 파트리치아 레지아니와 결혼했다. 1991년 마우리치오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파트리치아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문제가 돼 두 사람은 이혼했다. 파트리치아는 합의 이혼하며 1년에 500만 달러의 생활비와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모나코 등의 아파트, 빌라, 토지와 임야, 요트 등을 위자료로 받았다.

    두 사람이 이혼하고 4년이 흐른 1995년 3월, 마우리치오는 출근길에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파올라 프랑키와 재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전 부인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를 청부 살인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1997년 파트리치아는 29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경찰에 체포돼 구속되는 순간에도 “모피 코트를 입어야 하니 잠깐 기다려달라”고 했다고 전해질 만큼 끝까지 사치를 멈추지 않았다. 파트리치아가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던 날, 톰 포드는 피렌체 구찌 매장에 은으로 제작한 수갑을 제작해 전시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파트리치아가 반려동물과 화초를 키우며 수형 생활을 한 것과 모범수로 가석방을 앞둔 사실이 논란이 됐다. 또 그녀는 2016년 가석방 당시 “자전거를 타고 웃느니, 롤스로이스를 타고 우는 게 낫다”라는 말을 해 이탈리아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레이스 켈리의 플로럴 스카프 착용 사진 구찌 재키백을 든 재클린 케네디. [구찌코리아]

    그레이스 켈리의 플로럴 스카프 착용 사진 구찌 재키백을 든 재클린 케네디. [구찌코리아]

    구찌에는 구치 성(姓) 가진 이가 없다

    2000년 구찌는 ‘구찌 그룹(Gucci Group)’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PPR(Pinault Printemps Redoute·피노 프랭탕 레두트) 그룹과 제휴를 맺고 복수 브랜드 그룹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2003년 11월 구찌의 변화를 주도한 톰 포드와 도메니코 드 솔레가 재계약 문제를 놓고 PPR 그룹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구찌를 떠났다. 2004년 마크 리가 구찌의 CEO가 됐고, 이후 2009년에는 보테가 베네타의 CEO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가 구찌의 CEO 자리에 오른 뒤 2010년 6월 아동 브랜드 제품을 출시했다.

    구찌의 모기업 PPR 그룹은 2013년 설립자 프랑수아 피노의 아들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이 경영을 맡으면서 ‘케링(Kering) 그룹’으로 사명을 바꿨다. 2014년 말 그룹의 대표 브랜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와 6년간 회사를 이끌어온 CEO 파트리지오 디 마르코를 경질했으며, 스텔라 매카트니와 보테가 베네타 등 여러 패션 브랜드의 CEO를 맡아 성장을 이끈 마르코 비자리를 CEO로 선임했다. 마르코 비자리는 구찌의 실적 회복에 기여해 2015년 1분기부터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이익 증가율을 이끌어냈고, 영국 브랜드 파이낸스에서 선정한 2021년 럭셔리 브랜드 가치 순위 2위에 이름 올렸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2021’의 엔딩은 “이제 구찌라는 회사에 구치라는 성(姓)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문구로 마무리된다. 이 말처럼 구초 구치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는 세월이 흐르면서 능력 있고 감각적인 사람들로 채워져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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