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시마당] 먹던 것을 먹고 하던 일을 하고

  • 류휘석

    입력2023-08-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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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째 호우가 계속되었다
    이따금 창틈으로 물이 새 휴지를 덕지덕지 붙여두고 자야 했다

    꿈에서는 뭉뚱그려진 사람의 뒤통수가 나왔다 뒤따라 걷다 보면 제법 큰 물웅덩이가 길을 막고 있었다 힘껏 뛰어도 반대편 땅에 닿지 않을 것 같아
    매번 멈춰 서곤 했다

    일어나면 불어 터진 소면 같은 것이 바닥에 뚝뚝 으깨져 있었다 집어내려 해도
    자꾸 손가락 사이로 흘러 벽 쪽으로 밀어두었다 혼자라서 다행인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젖은 옷을 말리고 몸을 닦아내는 일 냉장고에서 말라비틀어진 파 조각을
    발견하는 일 두 사람분의 국수를 삶고 멍해지는 일 냉장고에 남은 음식을
    넣어두는 일 호우와 관계없이 지속해야 할 일들

    좀처럼 빨래가 마르지 않았다 눅눅한 나무 의자에 맨몸으로 앉아
    물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초인종이 울린 것 같아 문을 열어보기도 했다
    잘 마른 옷이 놓여 있는 상상을 했다



    어느 날의 꿈에서는 앞서 걷던 사람이 물웅덩이에 빠졌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물처럼 빛이 출렁거렸다 나는 젖은 소매를 안쪽으로 말아 쥔 채 파동이 멈출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날에는 꿈을 꾸지 않았다 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깨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아냈다 눌어붙은 자국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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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휘석
    ●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 문예 월간지 ‘an usual’ 고정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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