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호

“마음의 평안 원하는 중년에게 종교학 공부를 권합니다”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하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종교 문해력’ 책 낸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7-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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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템플스테이는 느는데 불교 인구는 줄어

    • 영적 엑스터시는 내적인 기쁨의 발견

    • 삶과 죽음의 서사를 제공하는 종교학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는 지역사회나 공간을 기반으로 인문 가치를 고민하고 이를 새로운 시대의 언어와 메시지로 알리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다섯 번째 주인공은 최근 발간된 ‘종교 문해력 총서’(불광출판사)에서 총론 격인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를 쓴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다.

    성 교수는 서울대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과 논문으로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탄트라의 종교 사상 비교’, ‘무종교의 종교개념과 새로운 종교성’ 등이 있다. 종교체험의 비교 연구를 통해 영성과 종교성을 탐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다.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홍태식 객원기자]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홍태식 객원기자]

    성해영 교수는 미국 유타주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유타라고 하면 모르몬교 성지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저도 방문은 처음이었습니다. 주도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 내릴 때부터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넓은 평야를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중심가에는 19세기에 지어진 큰 석조건물의 교회가 많았습니다. 모르몬교도들은 종교적 탄압으로 이곳에 몰려 정착했는데 그래서인지 약자나 힘든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많이 하는 종교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민들 표정이 밝고 편안하더라고요.”

    거기서 무슨 발표를 하신 건가요.

    “한국의 무종교인이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종교의 미래에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무종교인이라고 할 때는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는 한국 갤럽 응답을 토대로 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네.”

    우리는 얼마가량 되나요.

    “60%가량 되는데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외국도 그런가요.

    “19세기나 20세기에 비해 느는 건 맞아요. 그런데 우리가 압도적입니다. 미국은 23% 정도 되고 전 세계 평균이 16~17%가량으로 추정되니까요.”

    왜 그럴까요.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무종교’라고 하면 흔히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거나 인간의 영혼 혹은 사후 세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종교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굉장히 많은 수가 종교적 문화를 향유한다고 할까요. 단적인 예가 ‘템플스테이’에요. 2002년에 처음 시작됐는데 작년까지 참여 인원이 640만 명이라고 합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불교 인구는 300만 명이 줄었는데 말이죠. 굉장히 아이러니하죠.”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교

    종교가 없는데도 절이나 교회, 성당을 찾고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도 가지 않는 사람도 많아 보여요.

    “크게 한두 가지 대목에서 곱씹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인간의 합리성이 증가한 거죠. 과학, 법률, 정치, 교육, 경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독립했잖아요. 종교의 역할이나 영향력이 굉장히 축소됐죠.

    덧붙여 현대사회는 인류 역사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최초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졌죠. 과거보다 오래 살면서 삶의 의미를 직접 찾고 그렇게 찾은 의미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 종교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느냐는 물음이 최초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에 대한 선택지가 늘어난 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동시에 선택에 대한 결과를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점에서 또 최초의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 졸업하면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게 누구나 하는 룰이었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결혼할지 안 할지부터 시작해서 아이를 낳을지 안 낳을지 선택해야 하고요. 자유도 신장됐지만 책임이라고 표현해야 되나요? 결과에 대한 부담이 말할 수 없이 커졌다고 봐야죠.”

    지금은 성직자들이나 경전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시대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종교인들이 예전에는 정치, 경제, 교육 모든 분야에서 발언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신도들이 너무 똑똑해져서 성직자들이 과연 어떤 전문성을 갖고 이분들한테 어떤 얘기를 해줘야 되는 건가 하는 물음이 생긴 거죠. 경전에 나왔으니 여성 차별을 받아들이라고 얘기하면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종교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해야 하는데 거기에 맞게 변화하고 있지 않죠.

    이와 함께 삶의 불확실성이 커지니까 도피 혹은 대응하는 방식으로 근본주의적 종교가 등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삶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몇 가지 종교의 근본 원리만 충실하게 지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태도가 20세기 이후에 강력하게 등장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종교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죠.”

    요즘은 유튜브로도 성직자들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1인 종교 시대’라 할까요.

    “유튜브가 성전일 수 있는 거죠. 무종교인이 60%라고 하지만 이 가운데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탐구하고 찾아나가는 영적 탐구자가 많습니다. 영어로 ‘시커(Seeker)’라고 합니다. ‘I’m spiritual but religious’ 즉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도권 종교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조직화된 종교 바깥에서 혼자 영성을 추구하는 거죠.

    본래 ‘영성’이라는 단어는 나보다 더 큰 차원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럴 때 내 삶에서 존재 의미가 찾아진다고 하는 거죠. 육체적 존재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를 포함해 자연 너머의 차원까지 나의 정체성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꾸준히 확대하면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을 ‘영적인 노력’이라고 부르게 된 거죠.”

    과거에는 그 자체가 매우 위험했죠.

    “중세 기독교 시절에는 개인적으로 경전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심지어 다른 종교 경전들을 가져다 읽는 행위 자체가 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지요. 중세 가톨릭 시대에서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나 영어로 번역하는 것만으로도 화형을 당했으니까요. 21세기는 유튜브뿐 아니라 영적인 추구를 하는 개인들에게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대죠.”

    그런 점에서는 ‘종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뒤집어 말하면 그렇죠. 혜초는 불경을 구하러 인도까지 갔지만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으로 모든 종교 경전뿐 아니라 해석이나 설명을 다 구해서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죠.”

    무종교의 시대를 걱정하는 건 성직자들 아닌가요. 신자도 오지 않고 무엇보다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이 줄어드니까요.

    “종교가 예전에는 철저하게 공급자 중심이었죠. 독점적으로 뭔가를 믿으라고 얘기하고 믿지 않으면 처벌을 가하거나 파문당하거나 말이죠. 영적 탐구자들이 왜 생겼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이건 제도권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저 같은 종교심리학이나 신비주의를 전공한 학자 관점에서 보면 좀 다르게 보입니다.”

    어떻게요.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자기보다 더 큰 차원과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확대하려고 하는 능력과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존재론적으로 ‘엑스터시적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능력을 통해 접하게 된 초월적 차원 혹은 자기 존재의 더 깊은 차원에 대한 얘기들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전통적인 종교 혹은 제도화된 종교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거죠.

    불교도 붓다가 생로병사의 궁극적 의문에 사로잡혀서 온갖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누구나 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 전통이 된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붓다의 개인적인 종교 체험이 제도화되고 역사화됐다고 볼 수 있는 거거든요.

    수운 최제우 이후에 동학도 그렇지만 그런 방식으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넘어선 어떤 차원과 접촉하고 그다음에 그것들을 만나고 그 만남의 경험이 제도로 혹은 역사로, 조직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금 일어나는 시커들의 영적 추구라고 하는 건 제도화된 종교를 부정해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영적 추구 욕구가 현대사회로 갈수록 더 많이 개인이 직접 추구하고 경험하도록 장려하거나 허락하는 시기가 됐다는 거죠.

    사실 동서양 종교 전통 안에는 개인의 의식이 바뀌는 체험을 통해 그 체험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영적 통찰이 있다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현대에서는 그 체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제도화된 종교 조직 테두리 바깥에서 막 일어나고 있는 거죠.”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종교는 지혜의 전통”이라며 “현대인이 말씀과 삶에서 위안을 얻게 하고, 살아가야겠다는 용기를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홍태식 객원기자]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종교는 지혜의 전통”이라며 “현대인이 말씀과 삶에서 위안을 얻게 하고, 살아가야겠다는 용기를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홍태식 객원기자]

    삶의 기쁨에 대한 내적 체험

    아까 ‘엑스터시적 영적 능력’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엑스터시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자신을 잊고 완전히 도취 상태가 되는 현상이라고 나옵니다. 말씀하시는 영적 엑스터시에 대한 체험은 그런 걸 말하나요.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건 한마디로 ‘삶의 기쁨에 대한 내적인 체험’입니다. 존재가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게 아니라 더 큰 차원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경험인 거죠.

    이걸 저는 영적 기쁨의 대중화로 봅니다. 무종교인이 급속하게 늘어가는 걸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죠. 사람들이 유튜브가 됐든 요가 모임이 됐든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시키는 엑스터시 체험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 거죠.

    제가 서울대에서 동료 교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명상과 수행’이라는 수업이 있어요.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여러 종교 전통의 명상법들을 실습해 보면서 자신만의 명상법을 찾는 거예요. 한 학기에 100명 이상씩 와요.

    종교적 깨달음을 얻거나 어떤 종교를 갖기 위해서 명상과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 각종 스트레스와 우울감, 심리적 트라우마를 스스로 극복해 보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게 엑스터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밖으로 나가보는 연습이죠.

    지금까지 전통 종교들이 이런 체험과 그 체험에 도달하는 길을 독점해왔다면 지금은 더는 그런 시대가 아니죠. 전통 종교는 이런 변화된 시대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뭔가요.

    “가짜와 진짜 기쁨을 구분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마음속으로는 아닌데 하면서 남들이 기쁜 거라고 얘기하니까 나도 기뻐해야 되나 하는 거죠. 한마디로 자신의 진짜 감정이나 기쁨을 못 찾는 거죠. 감정도 거짓말을 한다는 걸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진짜 기쁨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나의 기쁨이 남의 기쁨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겁니다. 남을 괴롭히면서 기뻐하는 사람들 너무 많잖아요. 정말로 위험하죠. 여기서 전통 종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종교를 구원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개인이 어떤 식으로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종교적 용어로는 이걸 수행이라고 표현하지요.

    불교에서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잖아요. 우선 계,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선한 행위를 하며 두 번째 정, 선정이나 명상이라고 하는 걸 통해서 존재의 더 큰 차원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지성적으로 훈련을 해서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명확하고 냉정하게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세 번째는 지혜라는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져야 됩니다.”

    성 교수는 그런 점에서 “혼자서는 힘들다”고 했다.

    “각자가 자기 주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불완전한 존재이니 서로 힘을 합해 가면서 도와주고 의지하지만 그렇다고 누구 밑에 들어가거나 위에 서거나 하지 않는 방식의 조직이라는 게 만들어져야 하는 시점인 거죠.

    지금 현대인들의 개인적 영적 추구 열망은 명상 혹은 직관적 존재에 대한 통찰이어서 지성적이고 윤리적 측면이 간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동체 속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약해질 가능성이 많고 그 과정에서 지적으로 훈련되지 않으면 더 큰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것들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도피하거나 은둔해서 나만의 비범한 종교 체험이나 뭔가 놀라운 엑스터시적 체험을 계속 찾겠다는 건 유지되기가 어렵다는 얘기죠. 지적이고 윤리적 측면에서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해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엑스터시라고 해서 굉장히 뭔가 다른 차원인 걸로 생각했는데 기쁨의 발견이라는 대목이 와닿네요.

    “힌두교 신비주의 전통 중에 탄트라라고 불리는 전통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이 ‘궁극적 합일도 엄청난 큰 기쁨이지만 그 가는 길에 대한 가이드로 지상의 여러 가지 삶의 경험 속에서 느끼는 기쁨’을 얘기합니다.

    좋은 대화를 하거나 좋은 영화를 보거나 좋은 책을 보거나 아름다운 자연 공간에 있을 때 나라고 하는 작은 자기가 타인,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더 큰 존재가 되어 기쁨을 맛보게 되거든요. 이걸 몰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런 방식으로 탄트라 종교 전통은 궁극적 기쁨의 상태가 우리 삶의 다양한 국면에 내재한다고 얘기하는 거죠. 일상의 기쁨을 가급적이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키워나가면 나도 기쁘고 상대방도 기쁘잖아요. 그러면 그게 천국이 되는 거죠.”

    ‘내 안에서 나를 벗어나기’가 그런 말씀이셨군요.

    “자기 안에 갇혀 조개껍데기처럼 움츠러들어 있으면 존재 밖으로 서기 힘들어요. 자책, 원망, 이기적 욕망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존재의 더 깊은 차원에서 내면의 큰 기쁨을 찾는 것이 바로 엑스터시적 체험입니다.”

    그는 이어 “더 큰 존재로의 확장에는 일단 건강한 자존감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흔히 컴플렉스라고 하는 것도 건강한 자존감이 뒷받침돼야 더 큰 차원에 대해서 눈을 뜨는 거잖아요. 자기 자존감이 부족한데 남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종교적 엑스터시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자기를 확장시켜서 예전의 자기보다 더 넓은 자기가 되는 것을 항상 강조하거든요. 작고 고립돼 있는 개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큰 차원. 더 큰 공동체, 더 큰 존재론적인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는 거고 그렇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자비와 사랑입니다.”

    목욕물은 버리되 어린아이는 버리지 말라

    이번에 내신 책이 ‘종교 문해력’의 일환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요.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 문해력이 있어야 기기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치면 종교도 그런 거죠. 그저 믿기만 하면 안 되고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고 있고 혹시 자신이 택한 종교가 있다면 주된 가르침이 뭐고 특히 한국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와 어떻게 평화적으로 공존하는지를 배우는 거죠.

    종교에 대해 앎과 지식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효용성과 더 큰 기쁨,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문해력이 필요한 거잖아요. 특히 최근에는 종교를 둘러싸고 엄청난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고 종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도 누구랑 의논할 데가 없잖아요. 종교에 대한 공부는 특히 인간이 실존적 물음에 가장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중년 이후에 정말 필요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중년의 한 사람으로 깊이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영역 중에서 종교만큼 인간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 이후를 맞이하는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게 없거든요. 자기 삶의 의미를 더 큰 삶의 맥락에서 회고하고 성찰하고 종국에는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까지를 사실은 종교가 해야 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종교 전통의 사후 세계관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물질적 차원을 벗어난 또 다른 차원까지 연결이 되는가, 각각의 종교는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가, 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삶에 도움이 되는가와 같은 방식의 얘기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거죠.”

    종교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아닌가요.

    “문해력이 높아지면 지적 측면, 윤리적 측면 그다음에 명상과 직관이라는 측면이라는 세 분야가 골고루 계속해서 밸런스 있게 갑니다. 그리고 전통 종교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이 듭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바라본다고 하는 것처럼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시점에도 예수와 붓다를 얘기하는 이유는 이분들이 들려준 말씀과 보여준 행동이 너무나 거대한 울림을 만들었고, 그 울림이 우리한테도 여전히 현대인한테도 의미가 있다는 얘기인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쨌든 그분들은 인간이 갈 수 있는 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라고 할까, 그걸 굉장히 멀리 또 깊이까지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한테 귀감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 거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삶이 힘들고 우울하고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말씀과 삶에서 위안도 얻고 살아가겠다는 용기를 얻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게 제가 볼 때는 종교가 현대인들한테 줘야 될 가장 큰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더군다나 지금은 사람들이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교리라고 하는 것과 무관하게 이분들의 가르침, 특히나 그런 여러 종교의 성인들과 창시자들의 가르침을 직접 비교해서 내 필요에 따라서 바라볼 수 있게 됐잖아요.

    누구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해석의 주체로서 이것이 왜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접하고 그걸 통해서 내 삶을 바꾸려고 하는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엄청난 삶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하지만 반대편으로 굉장히 축복받은 측면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종교를 다른 말로 지혜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삶의 위기, 삶에 여러 가지 처하게 되는 인간으로서 해결하기 쉽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종교인들 혹은 종교 창시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알려준다는 거죠.

    지금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 너무 많이 이뤄져서 종교가 그 가르침마저 희석되고 사라졌다고 하는데 ‘목욕물은 버리되 어린아이는 버리지 말라’ 이런 말을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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