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한국형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 필요성 역설
이재명도 11월, 최적의 대안 찾았던 것으로 알려져
‘밤샘 근무’ 아닌 ‘자율 근무’와 보상이 핵심
日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 참조할 만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기업들의 요구는 근로 현장에서 제도화된 ‘주 52시간(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이 오랜 시간 연구와 개발에 매진해야 하는 반도체 R&D 인력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니, 이들에 대해서만큼은 법정 근무시간 적용에 예외를 두자는 것이 골자다. 미국의 유사한 제도명을 본떠 한국형 ‘화이트칼라 면제 제도(White Collar Exemption)’라고도 한다.
미국은 1938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고위 관리직과 전문직, 고소득자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기업들의 요구를 반영해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삽입한 ‘반도체특별법’의 본회의 상정을 주도했지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 법안 소위에서부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며 결국 2024년 11월 28일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이후에도 재계는 입법에 대한 불씨를 살리기 위해 여러 채널로 주 52시간제 예외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계엄령 선포 이후 조성된 탄핵 정국이란 변수 앞에 움츠러들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재계의 구체적 건의 사항을 들어보려 했던 정부, 국회의 관련 행사들도 모두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업계 입장에선 세계시장 경쟁을 위해 R&D 인력들의 주 52시간 근무 배제가 시급하지만, 현재로선 여러모로 의견을 개진하기가 어렵고 (빠른 시일 내) 주목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라며 “(탄핵 정국) 상황이 빨리 수습되길 바라고만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날씨보다 마음이 더 춥다”는 한 마디로 현재 상황을 표현했다.
정부도, 국회도 조금씩 호응 “분위기 좋았는데…”
반도체특별법의 본회의 처리는 무산됐지만, 반도체 R&D 주 52시간 예외에 대해 정부와 국회는 오히려 더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정확하게 요구 내용을 파악하고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져 가시적 성과가 나올 여지도 얼마든지 있었다.
형평성 문제로 반도체 R&D 인력에 대해서만 근무의 예외를 둘 수 없다며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더불어민주당부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정치권 소식통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지시로 당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최적의 대안을 2024년 11월 말께부터 찾아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11월 28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해 전문가들과 업계의 설명을 들었다. 김정회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도 경쟁력 강화를 위해 미국, 일본처럼 근로자와 기업의 근로시간 선택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장 관계자들은 “연구, 장비 세팅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30분만 더하면 결론이 도출되는 상황에서도 장비를 끄고 다음 날 다시 2시간 동안 장비를 세팅하면서 연구가 지연되기도 한다”며 실제 주 52시간 근무제로 연구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는 점을 전달했다. 이에 김 장관은 “반도체특별법으로 반도체 연구개발자의 근로시간 선택 확대, 건강 보호, 충분한 보상에 대해 노사가 합의하면 대한민국 반도체의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반도체 연구개발과 같이 시급한 분야에 대해서는 송곳처럼 원포인트로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며 호응했다.
“자유로워야 하는 작업…아이디어 떠올랐을 땐 무섭게 집중”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추경호 당시 원내대표가 2024년 10월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힘 초선의원 공부 모임 ‘왜 AI와 반도체를 함께 이야기하는가’에서 고동진 의원으로부터 반도체 웨이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여기서 ‘장시간 근무’는 밤을 새워 근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제약을 두지 않고 충분히 긴 시간을 보장해 주고 편안한 마음으로 연구와 개발에 매진해서 새로운 기술을 창출해 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실제 반도체 R&D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주 52시간제 예외 허용’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크게 개의치는 않지만 도움은 될 것”이라는 반응이 다수다.
연구자들은 R&D가 기본적으로 “시간과 장소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는 언제 어디서 떠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실에 앉아만 있다고 해서 아이디어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때론 휴식을 위해 공원을 산책하다가 나오기도 하고, 오히려 집에 있을 때 좋은 생각이 많이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만 생각이 떠올랐을 땐 매섭게 몰아친다. 한 관계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 폭풍처럼 몰아쳐서 연구하고 보고서까지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금방 밤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주 52시간에 맞춰 중도에 퇴근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흐름이 끊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으로, 재계 일각에선 올해 삼성전자가 반도체산업에서 위기를 맞은 배경 중 하나로 자유롭지 못한 학술 활동을 지적하기도 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던 황금기에는 R&D를 포함한 기술 연구원들이 퇴근 시간을 넘겨서도 대학가를 방문해 여러 논문을 찾아보고 세미나에도 참석해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확인, 논의해 보는 활동이 활발했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주 52시간제 적용을 받는 지금은 학술 활동 역시도 근무의 연장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결국 학술 활동을 하려면 주 52시간 테두리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회사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연구·개발 업무까지 생각하면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반도체는 시간 싸움…TSMC는 ‘밤샘 근무’
우리 기업들과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의 동향도 반도체 R&D의 주 52시간 배제 논쟁을 촉발한 큰 이유다. 세계를 주름잡던 삼성전자가 메모리 등 반도체의 주요 핵심 분야에서 예전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원인을 여러 곳에서 분석하고 있던 와중에 업계에서 근무시간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업계는 “반도체는 결국 시간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적절한 시간 안배가 이뤄져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앞서가는 기술을 내놓을 수 있는 신속함이 있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면밀하고 집중도 있는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차분함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주 52시간 근무제 등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특히 우리보다 기술이 한참 뒤처져 있다고 평가받던 대만, 그들의 간판 기업 TSMC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는 배경으로 ‘밤샘 근무’가 조명된 것이 자극제가 됐다.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해야 하는 우리 기업들이 시간 제약 없이 밤새 기술을 연구·개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보장하는 TSMC와는 애초부터 경쟁 자체가 어렵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최근 들어 반도체에 힘을 주고 있는 일본과 비교해도 우리의 주 52시간제는 시장 상황을 반영치 못한, 다소 뒤처진 제도임이 확인된다. 일본은 2018년부터 고소득 전문직을 노동시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금융상품 개발, 애널리스트, 신상품 연구개발 등 생산직이 아닌 근로자 중 연 1075만 엔(약 97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는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한다.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농부가 배가 고프다고 뿌릴 종자를 먹는 행위와 같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생전에 자주 했다는 이 말은, R&D가 기업에는 더없이 중요한 과제란 점을 일깨워주는 말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 선대회장 재임 시절 삼성전자는 약 160조 원이 넘는 돈을 R&D에 쏟아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기반으로 반도체산업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반도체를 만드는 일도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예술’ 작업이라고 한다면, R&D는 영감을 떠올리는 시작점이다. 어떻게 머릿속에 떠올라 시작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진리 아래, R&D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기업들은 반도체 경쟁이 격화된 최근에 R&D의 중요성을 더욱 말하고 투자 역시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실적 부진에도 매년 R&D 투자를 늘려갔다. 2024년 3분기에는 R&D 비용 집행 규모는 8조8700억 원으로 역대 분기 최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2030년까지 20조 원을 들여 반도체 사업 태동지인 기흥캠퍼스에 R&D 단지 ‘NRD-K’를 조성하기로 했다. 2024년 11월 18일에는 설비 반입식을 했다.
SK하이닉스는 자사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력이 R&D로부터 비롯됐다고 밝혔다. ‘2024 산업기술 R&D 종합대전’에서 산업기술진흥(기술개발 부문) 유공자로 선정돼 은탑산업훈장을 받은 김춘환 SK하이닉스 부사장은 HBM의 핵심인 TSV(Through Silicon Via) 요소 기술을 15년간 연구하고 개발한 것이 지금 자사가 자랑하는 HBM 제품들을 만들어냈다고 강조했다. TSV는 칩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상·하단 칩을 전극으로 연결하고 적층해 고용량, 고대역폭을 구현하는 기술이다. 김 부사장은 “TSV 공정 기술 안정화와 인프라 구축에 중점을 두고 연구개발에 더욱 매진했다. 양산 품질 개선 활동도 진행해 마침내 HBM 양산에 성공하게 됐다”며 “이 모든 성과의 단초였던 TSV는 현재 MR-MUF와 함께 HBM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고 했다.
국회 정상화돼도 ‘난관’ 넘어야
이로 볼 때, 기업들이 반도체 시장에서 좋은 활약을 하기 위해선 R&D가 잘 이뤄져야 하고, 국가 차원에서도 이에 걸맞은 지원이 이뤄져야 하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주 52시간 근무 배제는 지원책 중에서 최우선 순위에 올라 있다.
국회가 정상화되더라도 반도체 R&D가 주 52시간 적용에서 예외가 되기까지 여러 ‘난관’을 넘어야 한다. 노동계와의 합의가 일단 우선 과제다.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각 반도체 기업 사내 노조 모두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2024년 11월 15일 낸 논평에서 반도체특별법을 두고 “한국 반도체산업의 발전을 명분으로 재벌 퍼주기, 장시간 노동체계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노동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우리 반도체의 위기는 “노동시간이 적어서가 아니라 급변하는 반도체산업에서 경영전략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주 52시간제 배제가 곧 ‘밤샘 근무’를 뜻하지 않는다는 재계의 입장을 노동계에 잘 전달하며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R&D 인력 역시도 예상외로 장시간 근무에 매진하게 되는 경우 그에 합당한 보상과 복지가 이뤄지도록 추가적 제도개선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