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신동아 만평 안마봉] 몰려드는 사람들: 2024년 vs 1931년

  • 황승경 문화칼럼니스트·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4-08-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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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창간호에 실린 ‘신동아’ 만평(아래)에서 영감을 얻어 약간의 그림 수정과 색채를 더했다. ⓒ정승혜

    1931년 창간호에 실린 ‘신동아’ 만평(아래)에서 영감을 얻어 약간의 그림 수정과 색채를 더했다. ⓒ정승혜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밖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가수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는 요릿집에 들른 신사가 돈이 없어 뒷문으로 도망치다가 겪는 에피소드를 해학적으로 담았다. 아버지가 모아준 전 재산을 털어먹고 차비도 없이 덜렁덜렁거린다는 가사는 당시 시대상을 잘 표현한다.

    1931년 고급 요릿집은 단순히 조선·궁중 음식을 먹는 식당이 아니다. 시, 서화, 음률을 갖춘 기생들의 가무를 향유하는 공연장이자 무도회장이었다. 음식값에다가 기생과 악사들 일당까지 치면 요릿집 한 번 다녀가는 비용은 가정집 한 달 생활비보다 많았다. ‘천향원’을 연 기생 출신 김옥교는 오늘날 돈으로 시가 6억 원 상당의 자동차를 운전해 화제가 됐고, 당대 최고 요릿집 ‘명월관’ 본점에는 직원 120여 명이 연 20만 원(260억 원) 매출을 올렸다. “땅을 팔아서라도 요릿집 기생 노래 들으며 취해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은 당시의 인기를 대변한다.

    ‌‌1931년 ‘신동아’ 창간호에 실린 만평(아래)은 오늘날 의대 입시를 위해 등골이 휘는 ‘에듀 푸어’ 부모와 닮은꼴이다(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입시반이 생긴 지도 오래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3040 직장인들도 의대 입시학원으로 줄을 선다. 하긴 정부와 ‘맞짱’ 뜨는 직업군이 의사 외에 또 있을까. 93년 전 요릿집이나 오늘날 의대 입시학원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31년 ‘신동아’ 11월호(창간호)에 실린 ‘조선의 표정’ 풍경 2제 중 한 컷. [동아DB]

    1931년 ‘신동아’ 11월호(창간호)에 실린 ‘조선의 표정’ 풍경 2제 중 한 컷. [동아DB]

    위 만화는 신동아 창간호의 ‘조선의 표정’ 풍경 2제(題) 중 한 컷이다. 만화의 왼쪽 제목 옆에는 아예 ‘說明(설명)은 省略(생략)’이라고 적었다. 만화가 ‘열린 결말’처럼, 독자의 판타지를 동반한 성찰의 장을 선사하려는 목적임을 명확히 한다. 이처럼 만화는 해답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독자가 토론할 화제를 던져 사색의 기회를 준다. 이를 간파한 신동아 편집진은 만화를 이용한 풍자와 해학을 마음껏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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