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도 못 풀던 문제 전부 풀어낸 빈민가 소년
고단한 삶 속 경험에서 퀴즈 답 찾아내
사실적 촬영, 감각적 편집 통해 영화 몰입감↑
아카데미 8개 부문, 골든글로브 4개 부문 수상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주인공 자말 말릭이 극 중 유명 TV 퀴즈 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에 출연해 문제를 푸는 모습. IMDB
인도의 이 같은 면모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인도 영화인 ‘볼리우드’다. 인도의 최대 도시 뭄바이를 중심으로 하루에도 수십 편이 쏟아지는 볼리우드 영화는 화려한 노래와 춤, 과장된 감정으로 절망을 견디는 인도인의 또 다른 언어다.
인도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냈지만, 그 화려한 외피 뒤에는 여전히 고질적인 문제가 웅크리고 있다. 첨단 IT 산업의 중심지, 글로벌 기업의 고층 빌딩이 솟아 있는 도시의 한 모퉁이만 돌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쓰레기와 먼지로 뒤덮인 빈민가 풍경이다. 철제 판잣집이 이어진 골목, 하수구 옆에서 노는 아이들, 하루 벌이를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인도의 화려함과 빈곤은 한곳에 공존한다.
익숙한 틀 깨는 영화, 새로운 언어 만들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등장과 동시에 화제가 됐다. 영국인 대니 보일(69) 감독은 볼리우드 영화의 전형인 ‘화려한 노래와 춤, 세 시간짜리 러브스토리’를 과감히 비틀었다. 대신 뭄바이의 가장 좁고 더러운 골목, 햇살이 닿지 않는 판잣집과 아이들이 달리는 거리를 스크린 한가운데로 가져왔다.보일 감독은 전작 ‘트레인스포팅’(1996)에서도 영국 하층민의 삶과 마약중독의 세계를 냉정하면서도 화려하게 담아냈다. 짧고 역동적인 장면을 촘촘히 배치해 관객을 사로잡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도 그의 특기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보일 감독은 뭄바이의 빈민가를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한 리듬으로 담아냈다. 카메라는 숨이 찰 정도로 흔들리며 아이들과 함께 달린다. 빈민가의 땀과 먼지가 섞인 공기가 관객에게 닿는 듯하다. 볼리우드의 화려한 음악 대신 카메라가 짧은 호흡으로 장면을 담아내는 셈이다. 화면은 마치 심장박동과 닮은 리듬이 된다. 절망 속에서도 달려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춤을 대신한다.
짧은 장면들이 빠르게 교차하는 추격 장면에서 느껴지는 호흡, 군중 속으로 파고드는 긴박감, 좁은 골목을 질주하는 속도감은 화면을 넘어 관객의 맥박을 두드린다. 빠른 컷 편집은 도시의 혼돈을 고스란히 전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카메라는 단순히 기록하는 눈이 아니라, 관객을 그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심장의 고동처럼 작동했다. 그 시선은 차갑지도, 관음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을 찾아내려는 눈빛이었다. 카메라는 절망을 응시했지만,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음악도 발군이다. 인도의 작곡가 A.R. 라흐만이 영화음악을 맡았다. 그가 만들어낸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영화의 또 다른 심장이다. 인도 전통 선율에 현대적 비트를 섞어 만들어낸 ‘Jai Ho(승리가 뒤따른다)’는 희망의 언어다.
이 영화의 힘은 배우들에게도 있다. 주인공 ‘자말 말릭’ 역할을 맡은 배우 데브 파텔(35)은 당시 거의 무명이었지만, 자말이라는 인물을 통해 놀라운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의 눈빛은 말보다 강했고, 절제된 표정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끝내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 라티카 역의 프리다 핀토(41)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여성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이야기를 중심에서 받쳐주었다.
데브 파텔은 영국 해로에서 태어난 인도계 영국인이고, 프리다 핀토는 인도 뭄바이 태생이지만, 두 사람 모두 인도 영화계에서는 낯선 얼굴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은 오히려 진정성을 더했고, 관객은 그 안에서 ‘배우’가 아닌 살아 있는 ‘인물’을 보았다. 이 낯선 얼굴들이야말로 사랑과 절망, 희망을 가장 순수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거울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이 이 이야기와 하나가 되도록 만든 힘이었다.

유명 배우의 사인을 받겠다며 분뇨 더미에 뛰어든 어린 자말의 모습. 네이버영화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정답 고르는 용기
영화는 퀴즈 쇼에서 시작한다. 눈부신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열여덟 살 소년, 자말. 직업은 콜센터 보조 직원. 그는 인도의 인기 프로그램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에 출연한다. 의사나 변호사는 물론 당대 지식인도 이 프로그램의 퀴즈를 전부 정복하지 못했을 정도로 난도가 높은 퀴즈를 다룬다. 자말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단 한 번도 정답을 놓치지 않고 우승했다. 빈민가 출신 콜센터 보조 직원이 퀴즈를 풀어내자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진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사회자의 신고로 자말은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그의 대답은 단 하나였다. “나는 그냥 알았을 뿐이에요.” 영화는 그 말의 의미를 따라 그의 과거를 보여준다. 퀴즈 쇼의 무대는 결국 자말의 인생 자체였으며, 각 문제는 그의 삶에 남은 상처와 맞닿아 있었다.뭄바이의 슬럼가. 좁고 습한 골목, 먼지와 악취가 뒤섞인 공기, 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 그곳에서 자말과 형 살림이 태어났다. 두 소년의 삶은 하루하루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웃었다. 유명 배우의 사인을 받겠다며 분뇨 더미에 뛰어든 어린 자말의 모습은 절망 속 피어난 희망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종교 갈등이 폭발한 날, 불길이 마을을 덮쳤다. 부모는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형제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그날의 불길과 비명은 자말의 기억에 깊은 상처로 새겨졌다.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는 순간, 어린 소년의 세계는 깨져버렸다.
거리로 내몰린 두 형제는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연명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큰 지옥이었다. 고아들을 납치해 구걸에 이용하는 갱단에 붙잡힌 것이다. 갱단은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아이들이 불쌍해 보일수록 더 많은 동정이 모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의 눈을 멀게 했다. 갱단 우두머리가 노래하는 소년의 눈에 산성 용액을 붓는 순간, 자말은 깨달았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 순간 자말의 어린 눈빛에는 공포가 아니라 결심이 번뜩였다. 그 결심이 훗날 정답을 고르는 용기로 이어졌다.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선택은 계속되고 있었다.
자말과 살림은 목숨을 걸고 탈출한다. 그 혼란 속에 라티카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빛처럼 나타났다. 자말은 어린 마음에도 그녀를 사랑했다. 세 아이는 함께 달아났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연민을 베풀지 않았다. 기차가 떠나는 순간, 자말은 라티카의 손을 붙잡았지만, 그 손은 미끄러져 갔다. 그날 이후, 자말의 인생은 단 하나의 목표로 수렴한다. 라티카를 다시 찾는 것.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더럽고 비참한 골목에서였지만, 그곳에서야말로 영원의 빛이 피어났다. 그 빛은 눈부시지 않았다. 거칠고 불완전했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 삶의 진짜 얼굴이었다. 빛은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손끝에 움켜쥔 작은 희망에서 피어났다.
판잣집에서 시작된 서사, 전 인류의 공감을 얻다
세월이 흘렀다. 두 형제는 기차 지붕 위에서 잠자며 전국을 떠돌았다. 관광객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타지마할에서 신발을 훔쳐 팔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자말은 세상을 배웠다. 화폐에 그려진 인물의 얼굴, 볼리우드 배우의 이름, 경찰을 피하는 법 등이다. 이 모든 지식이 훗날 퀴즈 쇼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 그의 배움은 책에서가 아니라 거리와 기차, 배고픔과 도망 속에서 얻어졌다.성인이 된 자말은 콜센터에서 일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라티카가 있다.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들은 순간, 그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한다. 라티카는 여전히 갱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말은 그녀를 되찾으려 한다. 퀴즈 쇼에 출연한 이유는 단 하나, 라티카가 TV를 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퀴즈 쇼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자말의 메시지였다.
퀴즈 쇼에서 자말은 맹활약한다. 문제 하나하나가 자말의 기억과 연결된다. 볼리우드 스타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는 분뇨 더미에 뛰어들던 어린 시절을 소환해 대답했다. 화폐 속 인물은 갱단에서 도망친 뒤 경찰에게 붙잡혔을 때 본 지폐를 떠올린다. 자말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삶이 그에게 가르쳤다. 삶이 그에게 던진 고난이라는 질문은 상처로 남았다. 그 상처는 지식이 됐고, 그 지식은 마지막 순간을 지탱하는 힘으로 성장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퀴즈 쇼에서 우승한 자말이 기차역에서 라티카를 만나는 장면. IMDB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나 로맨스가 아니다. 절망을 껴안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의 방식에 대한 증언이다. 영화는 조용히 일깨운다. 답은 내일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흔적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영화는 찬사와 함께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일부 인도인들은 이 작품이 서구의 시선으로 인도의 빈곤을 착취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영화가 슬럼가를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시각에서는 이 영화가 인도의 사회문제를 국제 담론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의의를 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아카데미 8관왕(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 편집상, 촬영상, 주제가상, 음향상), 골든글로브 4관왕(감독상, 작품상, 음악상, 각본상)을 휩쓴 것은 단순히 색다른 풍경이 주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 영화가 가진 힘은 뭄바이의 좁은 골목,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거대한 인류 서사로 확장됐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누군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사랑을 지켜내며, 어떻게 존엄을 끝까지 놓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체험이 됐다. 바로 그 울림이 세계인을 울리고 흔들었다.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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