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그저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김사장은 그런 실패를 통해 ‘재무장’의 각오를 다졌다. 어쩌면 돈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알량한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한국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극적인 전략으로는 사업을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겠다면 현지화한 비즈니스로 인민폐(人民幣)를 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한번 듣고 날려보내는 방송 외에 무언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건’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중국 땅에서 한국음악 붐을 일으키고 한국 스타를 키워 이들을 기반으로 음반사업, 콘서트, 이벤트 같은 다양한 비즈니스를 펼쳐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돈은 못 벌었지만 1년 동안 성실하게 방송을 진행하면서 중국 음악팬들의 취향을 분석한 것도 큰 자산이 됐다. 그는 1960년대 ‘뽕짝’에서부터 발라드, 댄스뮤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유행음악을 소개하면서 중국인들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폈고, 이 과정이 중국에서 한국음악을 뿌리내리게 하는 자양분이 됐다. 궁리 끝에 그는 한국의 댄스뮤직으로 중국의 틈새시장을 파고들기로 했다.
“당시 중국 대중음악계는 홍콩과 대만의 발라드풍 노래가 주류를 이뤘어요. 한국에도 좋은 발라드 노래가 많았지만, 한국 음악을 처음 소개하는 단계에서 발라드 노래를 갖고 뛰어들면 차별화를 기하기 어렵겠더군요. 더구나 발라드 곡은 가사의 의미가 웬만큼 전달돼야 팬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홍콩, 대만 가수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10대 위주의 댄스뮤직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이 분야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확실한 강세를 보이고 있었어요.”
방송을 통해 접해본 중국 청소년들도 발랄한 댄스뮤직을 무리없이 받아들일 것으로 파악됐다. 어떻게 보면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했다. 정부의 산아제한정책 탓에 대부분 독자(獨子)인 중국 청소년들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가정과 학교에서 입시공부 때문에 쌓이는 스트레스가 한국 청소년 못지않았다.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마당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홍콩, 대만 가수들에 비해 비주얼한 요소가 강한 한국 댄스뮤직 가수들은 그런 면에서 먹혀들 법했다.
우선 한국의 음반사들을 찾아다니며 중국 판권을 얻어냈다. 국내 음반사들은 중국 음반시장에 큰 기대를 걸진 않았지만, 별도의 투자 없이 마스터 음반과 홍보자료만 챙겨주면 됐기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김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중국에서 음반을 발행하는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국영 음반회사에서만 음반을 낼 수 있는데, 그가 CD 몇 장을 들고 뛰어다니며 접촉한 대형 국영 음반사들은 “중국인들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음반을 발행하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어 판매가 부진할 것”이라며 한결같이 난색을 보였다. 특히 그가 첫 음반으로 결정한 H.O.T의 댄스뮤직이 그들에겐 영 낯설게만 여겨졌다.
김사장은 중국 최대의 음반회사인 상하이셩샹(上海聲像)출판사를 거의 반 년 동안 집중 공략했다. 처음엔 베이징지사의 말단직원을 만나 설득하고, 그를 통해 베이징지사장과 안면을 튼 뒤 마침내 상하이 본사 사장과 마주앉을 수 있었다. 한 보따리의 음반을 풀어놓고 “홍보는 내가 책임질 테니 한·중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자”며 무작정 매달렸다. 상하이에 다녀온 지 보름 후 발행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회의를 거듭한 끝에 H.O.T 음반을 발행하기로 했다. 수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김선생의 열정에 감동해 내린 결정이다”고 했다. 한류의 ‘씨앗’이 뿌려진 날이었다.
H.O.T 신드롬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즉각 홍보전에 돌입했다.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음악잡지와 신문을 발행부수 순으로 리스트업한 후 기자들을 찾아다녔다. 사진과 음반, 보도자료를 지겨워할 정도로 챙겨줬다. 처음엔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 대접을 했지만 밑천이 간들간들해지자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밥을 해먹였다. 나중엔 그의 주머니 사정을 알게 된 기자들이 먼저 음식점 초대를 사양하고 “김선생댁 김치가 맛있던데, 그거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1998년 5월17일 마침내 H.O.T 음반이 중국시장에 출시됐다. 사상 최초로 한국 음반이 중국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고 중국 땅에서 발행된 것이다. 그의 각개전투식 홍보전은 음반이 나온 후에도 계속됐다. 온종일 베이징 시내의 음반 매장을 돌며 H.O.T 음반을 틀어달라고, 포스터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달라고 사정했다. 어느 거리에든 잠시라도 차를 세워둘 때는 H.O.T 음반을 크게 틀고 차창을 죄다 열어놓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H.O.T의 노래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첫 작품인 H.O.T 음반 판매가 시원찮으면 중국에서 다시 음반을 낼 생각은 접어야 할 게 뻔했다. 그로서는 발품을 아낄 처지가 아니었다.
당초 상하이셩샹측은 H.O.T 음반이 잘해야 5000장쯤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도 너무나 열성적인 김사장이 안쓰러웠던지 “많이 안 팔리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이번에 실패해도 우리는 계속 당신을 돕겠다”며 지레 위로해줄 정도였다.
하지만 출시한 지 겨우 한 달 만에 판매고가 5만장을 넘어서자 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무렵부터는 H.O.T를 홍보하는 자원봉사대가 가동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음반을 들어본 10대들이 입에서 입으로 ‘H.O.T 예찬’을 전하면서 판매고가 수직 상승한 것. 거리에는 H.O.T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중국 음반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대형 음반회사 간부들이 속속 우전소프트를 방문, ‘후속타’를 청했다. 그 결과 H.O.T 음반 출시 한 달 후인 1998년 6월 클론의 ‘쿵따리샤바라’가 2호 음반으로 선보인 데 이어 구피 박미경 NRG 김현정 유승준 안재욱 베이비복스 등 50여 종의 음반이 한 달이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3년 전만 해도 그토록 냉담했던 중국 음반사들이 요즘은 김윤호 사장이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이번엔 뭐 좋은 거 안 들고 왔어요?”하며 물어온다.
지난해 2월1일 베이징 공인체육관에서 열린 H.O.T 콘서트는 한류의 열기를 실감케 했다. 1만2000명을 수용하는 대형 체육관인데다, 티켓값이 최하 80위안(1만2000원)에서 최고 1000위안(15만원)으로 중국 청소년들에겐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어서 누구도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다. 음반이 많이 팔렸다고 해서 그 구매력이 콘서트로 직결되진 않는 것이다. 일부 입장권의 매표업무를 맡은 국영 이벤트회사 간부들은 티켓 매진을 자신하는 김사장에게 “공인체육관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며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공연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그들은 웃음을 거둬야 했다. 자신들에게 배분된 티켓으로는 예약 물량도 충족시킬 수 없어 김사장에게 티켓을 더 달라고 사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콘서트는 폭발적이었다. 중국 청소년들은 100분 동안 목이 터져라 H.O.T를 연호하며 흥분했고, 기성세대는 아들, 딸들의 눈물과 함성을 보고 들으며 경악했다. 베이징의 신문들은 ‘H.O.T, 공인체육관 불사르다’는 제목을 내걸고 대서특필했다. 그 후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형 체육관에서 연 NRG, 베이비복스 등의 콘서트도 성황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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