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경제계 최대 이슈이자 전국민적 관심사인 한국통신(이하 KT) 민영화 과정에 관계 기업간 밀실 협의가 있었음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SK텔레콤과 KT가 공개청약 직전, 지분 참여의 폭·조건 등에 대해 치밀한 사전 논의를 벌인 것. 그러나 두 회사는 일이 뜻대로 풀려가지 않자 협의내용은 공개 못한 채 상대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이는 딜레마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지극히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돼야 할 민영화가 ‘밀약’의 희생물이 돼 방치되고 있음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5월22일, 15년을 끌어오던 KT 민영화가 사실상 마무리됐다. 2~3개월 전만 해도 ‘성사되기 힘들 것’이란 부정적 시각이 많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KT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SK텔레콤이 전체 지분의 11.34%를 획득해 대주주로 부상했다는 것. 법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으나 재계와 KT 경영진은 물론 정부조차 이를 ‘충격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며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SK텔레콤이 연막 작전으로 대지분 획득에 성공, 향후 KT의 실질적 주인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SK텔레콤은 “생존을 위한 방어일 뿐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며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정당한 권리 행사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쪽은 오히려 KT”라고 맞받아쳤다.
그 과정을 취재하던 중 예기치 않은 사실과 맞닥뜨렸다. KT 민영화 과정에서 KT와 SK텔레콤 사이에 비밀 협의가 있었음을 확인케 된 것이다. 협의내용에는 지분 매입 규모, 양사가 보유하고 있는 상대방 주식의 매물압박(오버행) 해소 방안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계약 내용을 담은 ‘협약서’의 실체에 대해서는 양사 모두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더 큰 문제는 양사가 주장하는 협의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 두 회사 중 한 쪽은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기업 도덕성이란 측면에서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쪽 말이 사실이냐에 따라 SK텔레콤이 KT의 대주주가 된 데 대한 양측의 공방과 그로 인한 상황 전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 게임’의 승패를 떠나, 공개청약 방식으로 진행되는 민영화 과정에서 국가 소유 주식 처리 문제를 놓고 사전 비밀 협상을 한 것 자체만으로도 논란이 예상된다.
KT는 LG전자 등 다른 입찰참여 업체와도 다각도로 협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KT측은 “큰 딜을 성사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수준의 논의였을 뿐”이라 주장하고 있다. SK텔레콤-LG전자 사이에도 지분 참여율 조절을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KT와 SK텔레콤의 주장은 어떻게 다른가. SK텔레콤 측은 “KT는 SK텔레콤이 9% 이상의 지분을 가져갈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스와핑(주식 맞바꾸기)은 없다는 내용에 합의했으면서도, 막상 결과가 나오자 SK텔레콤을 비난하며 스와핑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KT측은 “애초 SK텔레콤은 5% 지분만 획득키로 했다. 그럴 경우 KT가 보유한 SK텔레콤 주식 지분율을 같은 수준(5%)으로 낮추기로 합의했으나 상대편이 상한 5%라는 약속을 깨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KT는 협약서의 존재가 문제시되자 “SK텔레콤과 ‘약속’ 했다는 것은 발언한 임원이 전후사정을 잘 몰라 한 말”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면서도 “SK텔레콤은 5%만 들어오기로 했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팽팽히 맞서고 있는 양측의 주장을 포함, 민영화 막전막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KT 민영화는 국민의 정부가 추진해 온 공기업 개혁의 핵심이다. ‘2002년 6월내 민영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투자자 한 사람이 한번에 취득할 수 있는 지분한도를 5%에서 15%로 확대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특정 기업이 KT의 ‘주인’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주관 증권사에 LG·현대·삼성증권 등 국내 3사 외에 JP모건을 포함시켜 선진 금융기법을 적극 수용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대규모 교환사채(EB: 일정 기간 경과 후 발행회사가 보유한 자사 혹은 타사 구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 발행과 전략적 투자자(30대 재벌)를 선순위·후순위로 나눠 그 권리 및 매입가능지분을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게임의 룰은 복잡했다. 여기에는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 인수 예상 기업간 경쟁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기한 내에 정부가 원하는 모양새로 민영화를 달성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매각해야 할 지분 28.4% 중 5.7%는 일찌감치 우리사주로 할당했다. 남은 것은 22.7%. 이 중 8.83%는 주식으로, 나머지 13.83%는 EB 형태로 팔기로 했다. 주식 판매 물량 8.83% 중 5%는 전략적 투자자에게, 2%는 기관투자가(금융기관)에게, 1.83%는 일반투자자에게 배정됐다. 주식을 산 투자자들에게는 EB를 우선 배당받을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됐다. 대기업은 취득주식의 두 배까지, 기관 및 일반 투자자는 매입 주식만큼 EB를 살 수 있었다.
게임의 묘미는 주식 5%와 그로 인한 EB 10%를 합쳐서 15%의 지분을 배분하는 방식에 있었다. 전략적 투자자를 선순위와 후순위로 나눈 것. 30대 재벌에 속하더라도 금융기관이거나 컨소시엄에 금융기관이 포함된 경우는 후순위로 밀려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선순위지만 삼성생명은 후순위다.
5월17~28일. 드디어 공모주 청약이 시작됐다. 정통부와 재계의 촉각은 전략적 투자자 몫인 주식 5%를 어느 회사가 얼마만큼 가져가느냐에 모아졌다. 애초 정통부가 원한 것은 삼성·LG·SK·포스코·현대자동차 등 재벌그룹들이 지분을 ‘황금분할’하는 것이었다. ‘소유-경영 분리’ 구조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편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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