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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함 ‘GM號’ 탑승 2년, 대우차가 아직도 고전하는 이유

거함 ‘GM號’ 탑승 2년, 대우차가 아직도 고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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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대우의 성적표를 작성하려면 옛 대우차의 실패 원인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부분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중간평가’의 근거가 나오기 때문이다.

대우차 붕괴의 원인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주도한 외부 차입 위주의 성장 일변도 정책,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세계경영’이다. 대우차는 연 200만대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메이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1990년대 초부터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확장경영에 나섰다. ‘국내 100만대·해외 100만대 생산체제’가 목표였다. 자동차 보급기이던 당시 차 수요의 급속한 증가 추세가 계속되리라는 믿음도 확장 드라이브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대규모 라인 증설로 풀 라인업 구축을 완료한 199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업계는 공급과잉 시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국내 승용차 시장은 연 120만대 규모. 1개 업체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만한 시장을 두고 현대, 기아, 대우 3사가 각축을 벌였으니 결과는 자명했다. 경쟁력이 뒤처지는 2개 업체는 결국 떨어져나갈 운명이었다.

자동차산업은 초기 투자규모가 큰 장치산업이라 설비 가동률을 높여 자금 회전을 원활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국내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무작정 생산라인을 돌려댈 수는 없는 일. 파격적인 무이자 할부판매 공세에도 한계가 있다. 대우차는 해외시장, 특히 제3세계 신흥시장을 돌파구로 삼았다. 동유럽, 동남아, 중국, 남미 등지에 거대한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밀어내기’에 주력한 것.

출혈수출도 감수했다. 한창 밀어낼 때는 국내 판매가보다 20% 가까이 싸게 팔았는데, 자동차 가격에서 공임(工賃)이 차지하는 비중이 20%쯤 되니 마진은커녕 재료비만 겨우 뽑고 판 셈이다. 재무구조의 부실화는 불 보듯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해외 채무의 만기 연장이 거부되고 환율 하락으로 손실폭은 더욱 커져 결국 2년을 더 못 버티고 워크아웃 기업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대우차의 보다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규모에 대한 맹신에 빠져 기술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빠른 시간 안에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고 생산설비와 판매조직 구축에는 무리할 만큼 집중 투자했지만, 그 밑바탕을 이루는 기술 투자에는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 모델 개발능력도 경쟁사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대우차는 1978년 산업은행과 GM이 50%씩 지분을 갖고 있던 새한자동차의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고, 1982년 사명을 ‘대우자동차’로 바꿨다. 1980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합리화조처’로 기아는 중소형 상용차 전문으로 일원화하고,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이원화했다. 새한에게는 현대와 함께 승용차 업계의 양대 산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였지만, 이때도 독자 모델 개발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바람에 실기(失機)하고 말았다. 현대가 독자 모델인 포니로 승부를 건 데 비해 대우는 1986년 GM이 월드카로 개발한 오펠 카데트를 들여와 이를 바탕으로 르망 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대우차의 독자 모델 개발이 부진했던 것은 합작사 GM의 입김 탓이기도 하다. 대우차를 단순한 생산 하청기지쯤으로 활용하려던 GM은 대우차의 신차 개발과 해외 수출을 가로막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마침내 대우차는 1992년 GM 지분을 사들여 GM과 결별했고 이후 뒤늦게 신차 개발에 열의를 쏟아 1996년 말 라노스·누비라·레간자 3개 차종을 동시에 내놓는 기염을 토했지만, 이듬해 불거진 외환위기로 오히려 부담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술은 사오면 된다”

GM대우의 한 간부는 대우차가 경쟁사보다 기술개발에 소홀했던 배경을 CEO들의 철학 차이에서 찾는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산업자본으로 성장했기에 기술 도입이 여의치 않으면 돈과 사람을 쏟아부으며 직접 개발했다. 하지만 무역으로 기업을 일군 대우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장 선점을 최우선시한 그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기보다는 일단 대규모 생산·판매 네트워크부터 깔고 시작했다. 기술은 나중에 용역을 주거나 사들이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연구인력이 800명에 달하는 영국 워딩연구소를 통째로 사들인 것도 김 회장의 그런 기술관(觀)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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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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