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가 개발한 브라질 유전.
울산공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잔뼈가 굵은 직원들은 회장의 방문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정유회사 SK를 IT회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2세 회장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직원들은 ‘굴뚝회사’에 다닌다는 멍에를 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 회계 혐의로 수감됐다가 출소한 뒤 4개월 만의 회장 방문에 직원들은 섭섭하다는 감정을 대놓고 표출하지는 않았다. 최 회장을 내보내려는 외국 투자자 소버린의 공격이 있던 때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직원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상황이 어려울 때만 현장을 찾는 회장이 원망스럽다는 감정도 있었다.
“대단히 야심 찬 계획”
이제 최 회장에게 그런 비난은 하기 힘들 것 같다. 석유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쿠웨이트 방문은 최 회장이 앞으로 어디에 힘을 집중할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은 최 회장이 SK건설과 쿠웨이트 국영 석유회사 KOC의 석유플랜트 공사 계약식에 참석한 것으로 보도했으나, 비밀리에 또 다른 거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SK와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쿠웨이트 는 SK와 손잡고 한국·중국·일본 3국에 공급할 석유비축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기지 규모와 유치 지역 등 세부 사항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연내 최종 계약서에 서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쿠웨이트는 유가 급등 덕분에 넘치는 오일 달러를 투자할 새로운 사업을 확보하고, SK는 석유를 독점 정제하고 동북아 국가에 공급하게 된다. SK로서는 정유사업에서 한 단계 도약한 석유물류사업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석유산업에 정통한 업계의 한 전문가는 “SK가 석유물류산업에 뛰어든다면 그것은 대단히 야심 찬 계획”이라며 놀라워했다. “이는 세계적 석유회사인 엑슨모빌이나 BP와 같은 반열에 오르는 첫걸음이며, 동북아의 석유 수급을 조절하는 열쇠를 쥔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한국은 거대 유전 한 곳을 확보한 셈이기도 하다”는 것.
쿠웨이트는 SK와 최종현 선대회장 시절부터 40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사업 파트너다. 1962년 SK 공장을 첫 가동할 때 들여온 원유가 쿠웨이트산이었다. SK는 쿠웨이트에서 연간 5900만배럴의 원유를 들여온다. 이는 SK 전체 원유 수입량의 20%. 이렇듯 끈끈한 관계 때문인가. SK가 소버린에 대항해 우군을 끌어모으던 2004년 말, 쿠웨이트의 국영 석유기업 중 하나인 KPC는 3000억원을 투자해 SK의 지분 4%를 매입했다. 최 회장은 이에 답례라도 하듯 지난 2월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독일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전, 한국과 쿠웨이트 경기에서 쿠웨이트 응원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이어 지난 5월 쿠웨이트는 SK건설에 대형 석유플랜트 공사(1조2000억원)를 맡겼다.
중·일·한, 세계 석유소비 2·3·7위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쿠웨이트는 SK를 통해 새로운 투자처를 발굴하고 있다. SK 관계자는 “쿠웨이트와 함께 아시아 시장 진출 확대를 위해 다각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쿠웨이트가 투자처 발굴에 열을 올리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유가 폭등 때문이다. 지금은 유가가 올라 재미를 보고 있지만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언제까지 유가가 오를지 예상하기 힘들고,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는 세계 각국의 노력으로 새로운 에너지원이 개발될 수도 있어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일찍이 석유로 번 돈으로 선진국의 증권과 부동산 매입 등 투자처를 다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