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들에게는 두 햄버거를 차례로 먹어본 뒤 더 맛있는 것을 골라달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테스트에 응한 이들은 한 번도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버거킹이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맛의 테스트’를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한 광고 이벤트였다.
두 햄버거를 먹어본 이들은 최종적으로 버거킹이 만든 와퍼의 손을 들어줬다. 버거킹이 ‘와퍼 버진(처녀)’이라는 주제를 붙여 벌인 이 이벤트를 광고에 대대적으로 활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맥도날드와 버거킹 간의 버거 시장 광고전(戰)은 대학 광고 마케팅학의 대표적 비교광고 사례로 인용될 만큼 치열하다. 한번은 버거킹이 빅맥 상자에 와퍼를 담으려 했으나 상자가 작아서 와퍼가 들어가지 않자 ‘와퍼! 이 바보야, 그건 빅맥 상자야!(와퍼가 빅맥보다 크다는 것을 강조)’라고 핀잔을 주는 광고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걸 보고 가만있을 맥도날드가 아니다. 맥도날드는 햄버거 크기를 XL, L, M, S의 기호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며 ‘너희가 우리보다 크다고? 대신 우리는 칼로리가 낮지!’라고 반격을 가한다.
버거킹은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로날드’ 아저씨가 긴 외투로 온몸을 가린 채 버거킹의 햄버거를 사 먹으려고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는 모습을 광고로 만들기도 했다. 버거킹의 햄버거가 로날드가 몰래 사 먹을 정도로 맛있다는 것을 표현한 비교광고다.
맥도날드는 곧바로 더욱 자극적인 광고로 맞불을 놓았다. 한 소년이 맥도날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사서 공원에 앉아 먹으려는 순간 갑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 먹어치운다. 울상이 된 소년은 다시 햄버거를 사와 먹으려고 했으나 또 빼앗기고 만다. 결국 소년이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버거킹 봉투로 가리고 먹자 그제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간다.
열정의 크록, 명석한 맥라모어

1954년 작은 주방용품 회사 영업사원이던 크록은 미국 전역의 식당을 돌아다니며 한꺼번에 5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멀티믹서를 팔았다. 하지만 성과는 기대만큼 시원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캘리포니아 주 샌베르나르디노의 작은 드라이브인 식당에서 멀티믹서를 8대나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호기심이 발동한 크록은 이 식당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야 멀티믹서가 왜 그렇게 많이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사려는 손님들이 줄을 지어 식당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크록은 순간 ‘이 식당을 전국의 도로변에 세우면 성공하겠다’고 확신했다. 이 식당은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던 ‘맥도날드(Mcdonald′s)’였다.
당시 맥도날드는 햄버거, 치즈버거, 감자튀김, 밀크셰이크, 소다수 등을 판매하는 일반적인 식당이었다. 하지만 간편하고 효율적인 시스템과 청결한 분위기에서 싸고 맛있는 버거를 팔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크록은 즉시 맥도날드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고, 쌍방은 매장 이름은 물론 메뉴, 매장 구조, 운영방식, 상징인 금색아치 등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크록은 당시 52세였다.
이듬해 4월 15일, 크록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연고지인 시카고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1호점을 개장하며 사업 첫걸음을 뗀다. 맥도날드를 만나기 전 크록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파란 많은 삶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사업에 재능을 보인 크록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5세 때 나이를 속이고 적십자 구급차 운전사로 처음 취직했다. 이후 종이컵 판매원과 피아니스트, 재즈뮤지션, 외판원, 라디오DJ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이에 반해 맥라모어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 토머스 밀턴은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맥라모어가 다 자라기도 전에 전 재산을 잃는다. 아버지는 칠면조 농장 일을 시작해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어머니 마리안 플로이드 휘트먼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