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진아일랜드 토트톨라 해변.
미국계 중국인 여성 비비안(가명)은 홍콩 금융계에서 일한다. 30대 후반의 미혼인 그는 자신의 직업을 ‘금융 전문가’라고 소개한다. 세계 각국 고객을 상대하는 터라 밤낮 구분 없이 일하는 데다 휴가도 마음대로 못 간다고 했다. 비비안은 홍콩에 조세피난처와 관련된 법인을 세우려는 개인과 기업에 회사 설립 및 법인 관리 대행 업무, 회계결산 및 감사, 세무 업무 등 토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컨설팅 업체 소속이다.
조세 회피의 천국 카리브 해
비비안이 회사에서 주로 하는 일은 조세피난처 관련 업무다. 조세피난처에 합법적으로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세워주는 일을 돕는다. 법인 실제 발생 소득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대해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을 가리켜 조세피난처라고 한다.
비비안이 받는 수수료는 최소 수천 달러에서 많게는 수십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원래 미국 마이애미 주 소재 은행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친절하고 성실하기로 소문이 나면서 이 은행의 VIP 담당 업무를 맡았다. 마이애미는 카리브 해 지역과 가깝다. 카리브해에는 조세피난처로 불리는 섬나라가 즐비하다.
비비안은 VIP 고객의 조세 피난을 도우면서 비밀스러운 업무에 눈을 떴다. 홍콩의 컨설팅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은 10년쯤 전이다. 그는 “우리가 하는 일은 철저한 비밀주의와 깔끔한 일처리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조세피난처로 자산을 옮기려는 개인이나 법인이 비비안의 고객이다. 그는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우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기업들이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외국 기업과 합작 사업을 벌일 때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하는 것은 비즈니스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우는 것은 합법이다. 다만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세금 회피 목적으로 재산을 빼돌리거나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은 국가에 따라선 불법이다. 합법을 가장한 ‘돈의 해방구’라는 싸늘한 시선이 조세피난처에 쏟아진다. 독재자가 조세피난처의 유령회사를 통해 비자금을 축적하는 수도 있고, 내야 할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조세피난처가 이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각국의 조세당국은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를 합법을 가장한 탈세의 거점으로 보곤 한다.
비비안의 회사처럼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등록, 관리해주는 대행 회사는 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아시아의 기업이나 개인은 주로 홍콩, 싱가포르의 에이전시를 이용한다.
사람보다 법인이 많은 곳
조세피난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테네를 비롯한 도시국가가 외국산 물품 거래 때 약 2%의 세금을 물리자 무역상들은 거래세를 내지 않고자 지중해의 섬들을 물품 창고로 이용했다.
21세기 조세피난처도 상당수가 섬이다. 룩셈부르크 등은 육지에 있지만 버진아일랜드, 버뮤다 제도, 쿡아일랜드 등 50여 곳의 섬이 조세피난처로 각광받고 있다. 버진아일랜드가 조세피난처로 이용된 것은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로를 발견한 직후부터라고 전해진다. 15세기 말부터 조세피난처 구실을 했다. 버진아일랜드를 시작으로 카리브 해의 많은 섬나라가 조세피난처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카리브 해의 휴양지 케이먼 제도. 마이애미에서 비행기로 1시간 30분쯤 걸리는 이곳은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많다. 케이먼 제도의 수도 조지타운은 관광지답게 늘 활기차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고 비치타월을 허리에 두른 연인들이 오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