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한국 포장밥 대명사 햇반 성공 비결

신 영역 개척, 대기만성 마케팅

  • 이방실│동아비즈니스리뷰 기자 smile@donga.com

    입력2011-11-22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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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은 ‘집에서 엄마가 정성스레 해주는 것’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고집스러운 소비행태를 거슬러, 새로운 식문화를 창출한 제품이 있다.
    • 바로 CJ제일제당의 ‘햇반’이다.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고품격 경영저널 ‘동아비즈니스리뷰(DBR)’ 93호에 게재된 기사 ‘카테고리 창출로 신 시장 개척한 햇반, 비상용에서 일상식으로 도약하다’를 통해 ‘햇반’의 성공 비결을 알아보자. <편집자>
    한국 포장밥 대명사 햇반 성공 비결
    올해로 출시 15주년을 맞은 CJ제일제당의 ‘햇반’은 국내 상품밥 시장에서 ‘무균 포장밥’ 카테고리를 처음으로 만들어낸 브랜드다. 2002년 이전까지만 해도 상품밥 시장은 햇반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1996년 12월12일 처음 출시돼 1997년 470만개, 이듬해 720만개가 팔리는 등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하지만 2002년 농심, 2004년 오뚜기 등 경쟁사가 잇따라 무균 포장밥 시장에 뛰어들며 ‘빨간 불’이 켜졌다. 2004년까지 80%대를 유지해오던 시장점유율(포장 맨밥 물량 기준)이 2005년 처음으로 60%대로 떨어진 것. 2008년 70%대로 점유율을 끌어올렸지만 동원F·B(2007년)까지 경쟁에 가세하자 다시 점유율이 곤두박질치더니 급기야 지난해 59%라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까지 주저앉았다.

    CJ제일제당은 그러나 올해 햇반 점유율을 66%(1∼9월 누적)까지 끌어올리며 다시금 수성 다지기에 들어갔다. 과열 양상을 보이는 시장에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점유율이 7%포인트나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지난달에는 연간 누적 판매 물량이 햇반 출시 후 처음으로 1억개를 넘어섰다. 15년간 햇반의 총 누적 생산량이 7억개이고 불과 4년 전인 2007년 한 해 생산량이 6000만개 남짓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가파른 상승세다. 위기 때마다 CJ제일제당은 출혈 경쟁을 자제하고 품질 개선이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다른 업체들이 무분별한 가격 할인에 나설 때 CJ는 가격은 거의 그대로 두면서 품질, 즉 밥맛을 개선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금액 기준 햇반 점유율(2011년 9월 76%)이 물량 기준 점유율(69%)보다 월등히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소모적인 가격 경쟁 대신 품질 기반 경쟁에 주력한 성과다.

    연간 누적 판매량 1억개

    핵가족화의 확산, 1인 가구의 급증, 건강식과 맛을 기반으로 한 편의식에 대한 수요 증대 등 사회 트렌드를 타고 햇반은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한식 세계화 열풍 속에 멕시코 현지 대형 할인점에 제품을 공급하는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1위의 상품밥이 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제록스와 크리넥스, 햇반의 공통점은 뭘까. 모두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고유명사란 점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제록스(Xerox) 브랜드는 ‘복사하다’는 뜻의 동사로 쓰인다. 사람들은 사각통에서 한 장씩 뽑아 쓰는 휴지는 모두 크리넥스라고 말한다. 햇반 역시 CJ제일제당의 고유한 상품 브랜드일 뿐이다. 하지만 대개의 소비자는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즉석밥은 모두 햇반이라고 부른다.

    이런 강력한 브랜드 인지도 덕분에 많은 이가 햇반을 국내 상품밥의 효시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햇반은 국내 최초의 상품밥은 아니다. 1993년 냉동식품 전문업체인 천일식품 등에서 볶음밥, 필라프 등의 형태로 내놓은 냉동밥이 국내 첫 상품밥이었다. 1995년에는 비락과 빙그레에서 레토르트 공법을 적용한 상품밥을 팔기 시작했다. 무균 포장밥인 햇반이 나온 것은 국내 첫 상품밥인 냉동밥이 출시된 후 무려 3년여가 흐른 1996년 12월이었다.

    ① 1989년 알파미, 1993년 동결건조미 프로젝트의 잇단 실패

    한국 포장밥 대명사 햇반 성공 비결

    햇반은 대한민국 포장 맨밥 시장을 76% 이상 점유한다.

    CJ가 상품밥 관련 신제품 기획에 돌입한 것은 1989년이다. 핵가족화의 확산,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밥 짓는 절대 횟수는 물론 한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드는 등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인스턴트 식품 형태의 상품밥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CJ는 이에 따라 알파미(정백미로 밥을 지은 후 상압 또는 감압 상태에서 급속 탈수해 수분율을 5% 이하로 건조한 쌀)로 상품밥 시장에 진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얼마 못 가 곧 중단됐다. 시제품까지 만들어 여러 차례 내부 품평회를 거쳤지만 CJ가 추구하는 수준의 품질(밥맛)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원재료가 갖는 구조적 한계에 있었다. 알파미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되기 때문에 주로 군용 전투 식량 등으로 비상시에 먹을 수 있게 개발된 쌀이다. 편의성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생존’을 위한 식량 성격이 강하다보니 허기진 배를 채워줄 뿐 맛에서는 기대할 게 별로 없었다. 제아무리 기발한 기술을 접목한다 해도 알파미로는 소비자의 입맛을 충족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1993년 천일식품 등 경쟁사들이 먼저 냉동밥을 시장에 내놓았다. CJ제일제당으로서는 상품밥 시장에서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알파미로 한번 실패를 경험한 CJ제일제당은 이번엔 동결건조미를 활용해 상품밥 시장에 재도전하기로 결정했다. 1인 가구 수나 기혼 여성 취업률 증가 추세 등을 볼 때 즉석밥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어물쩍거리다가 경쟁사에 뒤통수를 맞을 수는 없다는 위기감도 한몫했다.

    그러나 동결건조미 프로젝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알파미 프로젝트 때처럼 원료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동결건조미는 밥을 지은 후 동결한 다음 얼음을 승화시켜 수분을 제거한 쌀이다. 제품 복원력은 우수하지만 동결을 거치면서 조직 구조가 나빠져 쉽게 부스러지는 등의 단점이 있다. 최동재 CJ제일제당 햇반팀장은 “동결건조미를 동결건조 블록 형태의 기존 즉석국 사업과 연계하면 북어국밥, 미역국밥 등 그럴듯한 상품밥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당초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치 스펀지를 씹는 듯한 느낌을 없앨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② 일본 시장 벤치마킹 통해 찾은 돌파구 ‘무균 포장밥’

    상품밥 신제품 개발을 위한 돌파구 찾기에 골몰하던 CJ는 1995년 우리와 식문화가 비슷한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일본에서 상품밥 시장을 석권한 ‘무균 포장밥’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의 상품밥 시장은 920억엔 규모로 연평균 14%의 성장세를 달리고 있었다. 일본에선 1980년에 레토르트밥, 1984년에 냉동밥이 출시되는 등 우리보다 10년 정도 앞서 시장이 태동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조차 상품밥 시장이 본격적 성장을 맞은 것은 1988년 무균 포장밥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무균 포장방식은 갓 지은 밥을 무균 상태로 포장해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 알파미, 동결건조미처럼 원재료 단계에서 인위적인 수분 제거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갓 지은 밥맛과 식감을 살리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상품밥을 기획할 때마다 밥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CJ로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솔루션을 찾은 셈이었다. 문제는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무균 포장을 하기 위해선 세미(洗米), 침지(沈漬), 취반(炊飯) 등 일련의 밥 짓는 공정 외에도 반도체 공장 수준의 클린룸을 갖추고 밥이 담긴 용기 내·외부의 미생물을 완벽하게 제거한 후 자외선으로 살균한 필름을 덮어 포장해야 한다. 이런 무균 포장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기 설비 투자비만 최소 100억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게다가 무균 포장 기술은 기본적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하기가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즉, 맨밥이나 잡곡밥 등 곡물류만 활용한 밥에 적용하기는 쉽지만 쌀, 채소, 육류 등 조성 성분 차이가 확연하게 다른 재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볶음밥류에 적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기술이었다. 원재료 성분 조성이 달라지면 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술도 각각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원재료 간 성분 차이가 커질수록 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최적화된 기술을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 시장 벤치마킹을 통해 상품밥 시장에 진입할 가능성이 꽤 있는 해법을 찾기는 했지만 회사 내부에선 의견이 갈렸다. 막대한 투자비 부담에 더해 향후 제품 확장 가능성이 낮은 사업에 과연 투자해야 할지를 놓고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1995년 경쟁사들이 레토르트밥을 시장에 선보이자 무균 포장 대신 레토르트 방식의 제품 개발을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일부에서 나왔다.

    레토르트는 밀봉 포장 후 고압솥에서 통상 120℃ 이상의 열을 가해 멸균하는 방식이다. 과도한 압력과 온도를 가하기 때문에 밥맛은 무균 포장방식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곡류뿐 아니라 채소, 육류 등 종류에 상관없이 무엇이든 밀봉 후 고온 가열하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제품군 확장성 측면에선 가장 유리한 방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CJ로서는 초기 설비 투자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당시 CJ에선 레토르트 방식을 활용해 자장, 카레, 미트볼 등을 생산하는 ‘레또’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레또의 레토르트 설비를 활용하면 처음부터 설비투자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무균화 포장 방식의 5분의 1 수준에서 상품밥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게 내부 판단이었다.

    ③ 1996년 이천쌀로 만든 ‘햇반’ 출시

    한국 포장밥 대명사 햇반 성공 비결

    햇반은 30가지 제품군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CJ는 과도한 투자비 부담 때문에 품질(밥맛)에서 타협을 보기보다는 면밀한 시장조사와 대대적인 소비자 조사를 통해 사업 타당성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제품 콘셉트 조사를 통해 소비자가 갖고 있는 밥에 대한 일반적 욕구와 기존 상품밥에 대한 인식, 불만 사항 등을 파악했다. “담백한 맨밥을 먹고 싶을 때가 많은데 시중에 나와 있는 상품밥 종류는 볶음밥 일색이다” “레토르트 밥은 먹을 때 왠지 이상한 냄새가 난다” “맛도 별로지만 식감은 더 안 좋다” 등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CJ는 무균 포장밥 시제품을 만들어 소비자 테스트를 실시했다. 원재료로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경기도 이천쌀을 택했다. 조리법에도 신경 썼다. 압력솥의 원리를 적용해 밥을 짓고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쌀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테스트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소비자들은 냉동밥이나 레토르트밥 등 기존 상품밥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CJ가 개발한 무균 포장밥 시제품의 맛에는 합격점을 줬다. 실제 신제품으로 출시됐을 때 구매하겠다는 응답 역시 매우 높게 나왔다. 결국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CJ는 레토르트 사업이 아니라 국내 최초로 무균 포장밥 사업을 시작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1996년 초 클린룸을 포함한 무균 포장 설비 구축을 위해 1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설비 투자 진행과 함께 CJ는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CJ 이전에 경쟁사들이 내놓은 냉동밥, 레토르트밥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서 오는 새로운 욕구를 포착한 신제품이었지만 품질이 낮아 소비자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소비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상품밥=저품질’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CJ는 상품밥과 함께 소비자의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부정적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새로 브랜딩하는 먼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일부에선 기존 편의식 브랜드인 레또를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상품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벗겨내려면 이름부터 새로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독자적인 브랜드 전략을 택했다.

    이렇게 탄생한 네이밍이 바로 ‘햇반’. 방금 만든 맛있는 밥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선택된 이름이었다. 제품 가격은 1050원(210g 소비자가격 기준)으로 정했다. 당시 소비자 조사에서 가격저항선은 800∼900원 사이로 나타났지만 초기 투자비 등 원가 부담을 고려해 높게 잡았다. 당시 일반 음식점의 공깃밥 한 그릇 값이 1000원선이었던 점도 감안했다.

    ‘5일→3일→1일’ 도정 시스템 진화

    햇반은 지금까지 크게 두 차례의 위기를 겪었다. 두 번 모두 경쟁업체의 진입에 따른 시장점유율 하락이다. 우선 2000년대 초반 농심(2002년)과 오뚜기(2004년)의 시장 진입으로 이전까지 80%대를 유지했던 점유율(포장 맨밥 물량 기준)이 2005년 67%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2008년 시장점유율을 71%대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위기는 제3의 업체인 동원F·B의 가세로 찾아왔다. 4개 업체 간 치열한 시장 쟁탈전이 벌어지며 2010년 햇반 점유율은 사상 최저 수준인 59%대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역시 1년도 채 되기 전 66%(2011년 1∼9월 누적)로 끌어올렸다.

    위기 때마다 시장점유율을 탈환해 오는 데에는 ‘자가 도정 시스템’ 구축을 통해 밥맛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게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2006년엔 ‘3일 도정’ 시스템을, 2010년엔 ‘1일 도정’ 시스템을 각각 내세우며 점유율 하락 고비 때마다 진보된 도정 기술을 앞세워 위기를 돌파해나갔다.

    사실 손쉽게 점유율을 되찾아오려면 다른 업체들처럼 가격을 할인하면 됐다. 아무리 시장점유율이 떨어진다고 해도 햇반은 상품밥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업체다. 어느 정도의 출혈만 감수하고 가격을 낮추면 후발 주자들을 손쉽게 눌러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CJ는 가격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CJ 경영진은 CJ식품연구소에 밥맛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경영진의 특명을 받은 식품연구소 연구원들은 해결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리고 여름철이 되면 유난히 햇반의 맛이 떨어진다는 점에 주목,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갓 수확한 쌀을 아무리 냉장 보관한다고 해도 여름철만 되면 특히 맛이 떨어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연구원들은 전국 각지의 미곡종합처리장(RPC)에서 도정한 백미를 부산 생산공장까지 3∼4시간 동안 이송하는 트럭에 함께 올라탔다. 도정한 백미가 도대체 트럭 안에서 어떤 상태가 되길래 부산 생산공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품질이 현격하게 떨어지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백미 이송 트럭에서 발견한 비밀

    트럭에 올라타 이송 도중 도정미의 온도 변화를 체크하던 연구원들은 쌀 온도가 무려 50℃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름철에 도정을 하면 외부의 더운 공기는 물론 도정기를 거치며 겪는 마찰열로 인해 가뜩이나 쌀 온도가 올라가는데 이를 밀폐된 트럭에 장시간 싣고 오다보니 온도가 계속 치솟아 밥을 짓기도 전에 이미 열화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제아무리 냉장 저장을 한다 해도 쌀의 신선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기다 여름철엔 낮과 밤의 온도차가 커서 쌀 표면에 결로(結露) 현상이 발생하고 심지어 금이 가는 현상도 수시로 나타났다. 이렇게 신선도가 떨어지고 조직구조가 망가진 쌀로 밥을 하다보니 밥맛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결국 식품연구소는 4계절 내내 균일한 밥맛을 내려면 도정기를 들여와 자가 도정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같은 품질의 쌀이라도 재배 조건에 따라 해마다 품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도정 단계별 온도 변화를 면밀히 점검하고 경도, 미강층(米糠層) 두께, 분상질립(紛狀質粒) 함유율 등 개별 쌀의 특성에 맞춰 최적의 도정 조건을 적용하기 위해선 자체적인 설비 투자가 필수라고 판단한 것이다.

    2006년 9월 CJ는 도정기를 들여와 당일 도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후로 CJ는 RPC에서 벼의 껍질(왕겨)을 벗겨내 제현 과정만 거친 현미 상태의 쌀을 가져와 직접 도정하고 있다. 최동재 팀장은 “2006년 이전에는 이미 도정된 백미를 가져와 햇반을 만들었기 때문에 RPC에서 부산 생산공장으로의 이동 기간과 저장 기간 등을 감안할 경우 도정한 지 평균 5일 정도 지난 쌀을 이용했다고 보면 된다”며 “자가 도정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원칙적으로 당일 도정한 쌀로 햇반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소비자에게는 보수적으로 ‘3일 도정’으로 커뮤니케이션했다. 주말에는 공장을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 매주 월요일 아침 포장되는 햇반 제품은 금요일 도정된 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마저 2010년 5월부터 탄력적인 교대조 근무를 통해 주말에도 공장을 가동함으로써 완벽한 ‘1일 도정’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한층 개선된 밥맛은 소비자가 먼저 알아봤다. 2006년 3일 도정 시스템 공표 후 곧바로 점유율이 상승세로 돌아섰고 2010년 사상 최악의 실적을 올해 급속한 매출 성장으로 상쇄할 수 있었던 것도 1일 도정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알리면서부터다. 경쟁 격화로 매출이 둔화되고 후발 주자들이 제살 깎아먹기식 가격 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CJ는 오히려 품질 개선을 위해 투자하는 과감한 전략을 통해 햇반의 충성고객을 확대해가는 데 성공했다. CJ제일제당에 따르면 현재 햇반의 총 매출 중 3분의 2는 연간 50개 이상 사들이는 ‘헤비 유저(Heavy User·사용/구매 빈도가 높은 단골 고객)’가 차지한다. 이들 헤비 유저의 비율은 지난해 이미 전체 고객의 15%에 다가섰다. 이는 2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숫자다. 반면 경쟁사의 헤비 유저 비율은 1.6%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CJ제일제당 측 설명이다.

    ‘비상식’에서 ‘일상식’으로

    햇반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2000년대 후반, 그리고 2011년 이후 현재까지 등 시기별로 크게 네 단계로 나눠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다.

    우선 햇반 출시 초기에는 소비자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데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최우선 목표를 뒀다. 시중에 이미 나와 있는 상품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떨어내는 것은 물론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밥’이라는 정서적 혁명을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1996년 햇반을 처음 출시하면서 ‘제일제당에서 밥이 나왔어요!’라는 카피로 TV 광고를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으로 자리 잡은 탤런트 김혜자씨를 초대 광고 모델로 선정, 믿을 수 있는 대기업에서 소비자가 가장 선호하는 이천쌀을 사용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밥을 만들었다는 점을 적극 부각했다. 초기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또 다른 무게중심은 햇반을 ‘비상식’으로 포지셔닝하는 작업이었다. 아이들이나 남편 친구들이 집에 갑자기 들이닥쳐 밥이 모자랄 때 미리 챙겨뒀다가 먹거나 밥하기 싫을 때 가끔 햇반을 먹는다는 식으로 여러 가지 때와 장소 및 경우(TPO·Time, Place, and Occasion)를 제시해 TV 광고를 다양화함으로써 소비자 구매를 유도해나갔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급하게 한 끼 때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밥’이 아니라 ‘집에서 엄마가 정성스럽게 지어준 것처럼 맛있는 밥’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햇반 앞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였던 ‘100% 이천쌀밥’이 사라지고 ‘엄마가 해주신 밥’이라는 문구가 붙은 것도 이 무렵이다. 시장 확대로 원료(쌀) 공급선을 다양화함에 따라 기존 문구를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TPO 상황을 지나치게 강조해 제품의 용도만을 부각하기보다는 ‘맛있는 밥’이라는 제품 속성을 강조해 차별적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소비자 머릿속에 ‘햇반=비상식’이라는 인식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햇반만의 차별화된 맛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농심, 오뚜기, 동원F·B 등 경쟁사들의 시장 진입으로 가격 경쟁이 본격화됐지만 게임의 룰을 가격이 아닌 품질로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2006년과 2010년 각각 도입한 3일 도정, 1일 도정 시스템과 연계한 TV 광고(2006년 TV 광고 슬로건 ‘3일 내에 찧은 쌀로 밥을 짓습니다’, 2010년 슬로건 ‘도정 후 하루 내에 지은 밥’)를 내보냈다. 말로만 품질 개선을 외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밥맛을 개선한 ‘진정성 마케팅’에 힘입어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2011년에는 햇반을 ‘비상식’이 아닌 ‘일상식’으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햇반을 먹고 자란 세대가 성인 대열에 합류하면서 햇반의 일상식 시대를 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수영 국가 대표이자 친근한 남동생 이미지의 박태환 선수를 모델로 기용해 ‘밥보다 더 맛있는 밥’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햇반이다’ ‘넌 내 밥이야’등의 카피를 내세우며 햇반에 대한 인식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CJ제일제당은 현재 맨밥류 13개, 죽류 6종, 덮밥류 11종 등 총 30개의 제품군을 보유, 경쟁 업체 대비 소비자에게 가장 많은 선택폭을 제공하고 있다. 제품군을 다양화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는 독특한 기술력이다. CJ는 햇반 제조와 관련해 9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특허 기술은 기능성 햇반인 ‘저단백밥’ 제조를 위한 전처리 기술이다. 저단백밥은 단백질에 포함된 특정 성분(페닐알라닌)을 대사시키는 효소가 선천적으로 결핍돼 있어 단백질 제한이 필요한 희귀 질환자를 위해 특별히 기획된 제품이다. 일반 햇반에 비해 단백질 함유량이 10분의 1에 불과한 게 특징이다. 핵심은 단백질 분해 효소가 섞여 있는 물에 장시간 쌀을 담가 48시간 고온 가열하는 전처리 과정. 기술로 밥을 짓기도 전에 오랜 기간 물에 불려 고온처리를 하는데도 밥알이 뭉개지지 않고 밥맛도 일정 수준 이상 확보할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멕시코 코스트코 32곳 햇반 공급

    흰쌀죽 역시 기술적으로 경쟁사가 따라오기 쉽지 않은 제품이라고 회사 측은 강조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죽 제품은 거의 쌀과 함께 여러 재료를 집어넣고 레토르트 방식으로 가공한 혼합죽이 대부분이다. 흰쌀로만 된 죽을 무균 포장방식으로 내놓은 건 CJ제일제당이 국내 최초다.

    정효영 CJ식품연구소 곡류가공팀장은 “적당한 점도 조절과 함께 층분리 현상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기술력으로는 구현해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최동재 팀장은 “이런 기술적 역량이 품질 개선으로 이어져 국내 소비자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반 수출 물량의 80∼90%는 해외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이나 현지 교민이 소비했다. 당연히 해외 유통처도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미국 뉴욕, LA 등 일부 도시의 한인 마트였다. 코스트코나 샘스클럽 같은 현지 대형 마트에 입점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CJ제일제당은 2010년 8월부터 멕시코 내 대형 유통 체인인 코스트코 매장 32곳 모두에 햇반을 공급하고 있다. 최동재 팀장은 “올해 안에 170여 개 매장을 확보하고 있는 멕시코 샘스클럽에도 햇반 입점이 확실시된다”며 “이렇게 될 경우 올 한 해 동안에만 멕시코에서 600만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업은 신제품 개발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일류 반열에 오른다.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가 공저한 ‘마케팅 불변의 법칙’에 등장하는 제1 법칙은 ‘선도자의 법칙(Law of Leadership)’이다. 해당 영역에서 최초로 진출한 브랜드는 1등으로 오래 군림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코카콜라(콜라)가 그랬고 질레트(면도기)와 제록스(복사기)가 그렇다. 그런데 그 영역의 첫 브랜드가 되는 데 실패했다면 영영 포기해야 하는 걸까. 두 사람은 “어느 영역의 첫 브랜드가 될 수 없다면 최초로 뛰어들 새 영역을 개척하라”는 제2 법칙을 제시했다. 이른바 ‘영역의 법칙(Law of Category)’이다. CJ제일제당의 햇반이 바로 그 경우다.

    햇반은 비록 상품밥 시장에서 경쟁 업체들에 선점 기회를 내줬지만 ‘무균 포장밥’이라는 차별화된 카테고리를 창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무엇보다 부정적이던 상품밥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지속적인 품질 개선과 체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바꿔나갔다. 그로 인해 ‘햇반=질 좋은 상품밥’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CJ제일제당이 올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의 95% 이상이 즉석밥으로 가장 먼저 햇반을 떠올린다.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

    10명 중 7명은 지난 1년 이내에 햇반을 사본 적이 있고 햇반을 사본 사람 중 다시 사고 싶다는 사람은 10명 중 9명에 달한다.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의 신제품을 내놓아 15년 만에 이룬 브랜드 자산이다. 햇반의 혁신 유형을 정확히 간파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CJ제일제당 경영진의 뚝심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포인트다. 마케팅 분야 석학인 존 거빌(John Gourville)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교수에 따르면 신제품의 성공까지 걸리는 시간은 소비자에게 요구되는 행동변화 정도와 제품의 혁신성에 따라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우선 소비자에게 큰 행동 변화가 필요하지 않고 제품의 개선 정도 역시 기존 제품 대비 미미한 경우는 ‘손쉬운 성공(Easy Sells)’ 유형에 속한다. 치아 미백 효과가 추가된 치약 등 소비재 신제품이 대표적인 예다. 구글처럼 이미 사람들이 검색활동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혁신적인 검색엔진이 나왔을 때는 ‘대박(Smash Hits)’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비자에게 요구되는 행동 변화 정도는 미미하지만 기존 제품 대비 개선점이 매우 두드러져 단기간에 엄청난 성공을 일궈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드보락(DEVORAK) 키보드처럼 이미 쿼리(QWERY) 키보드에 익숙해 있는 소비자에게 큰 행동 변화를 요구하면서 속도를 크게 높여주지도 못하는 신제품은 ‘쪽박(Sure Failures)’ 유형에 들어간다. 햇반은 네 번째 유형, 즉 소비자에게 요구되는 행동 변화의 수준은 높지만 혁신의 정도 역시 높은 ‘대기만성형(Long Hauls)’에 속한다. 단기간 내 대박을 낼 수는 없지만 소비자의 행동변화를 기다리면 매출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히트 제품이라는 의미다.

    CJ는 햇반이라는 자사의 신제품이 대기만성형 혁신 제품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1997년 햇반의 매출액은 초기 투자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50억원 수준이었다. 매출액이 초기 설비투자 비용인 100억원대를 돌파한 것도 1999년이 처음이다.

    품질 기반 경쟁구도 확립

    2002년에 경쟁업체 중 최초로 농심이 무균 포장밥 시장에 진출했을 당시만 해도 햇반의 연간 매출액은 400억원 정도였다. 무균 포장밥 시장에서 6년여간 단독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계속된 투자로 인해 여전히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개별 상황과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제조업체에서 신사업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로 ‘3년 내 손익분기점 돌파’ 항목이 있다. 이런 잣대에서 본다면 햇반은 일찌감치 접는 게 마땅한 비즈니스였다.

    하지만 CJ 경영진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았다. 1인 가구 증가 등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비춰봤을 때 혁신을 지속할 경우 매출이 폭발적으로 치솟는 변곡점이 분명히 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밥은 아무리 식생활이 변해 면과 빵 소비가 늘어난다고 해도 한국인에게 하루 세 끼 중 최소한 한 끼는 먹어야 하는 주식이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즉석밥 시장에 압도적 시장점유율을 가진 햇반이 있는데도 오뚜기 등 후발 주자들이 저가 경쟁으로 버티고 있는 이유도 앞으로의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몰고 올 즉석밥 시장의 미래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쟁 업체들이 소모적인 가격 경쟁을 벌일 때에도 CJ 경영진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품질 향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해왔다. 그 결실은 15년이 지난 지금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올 들어 10월11일까지 햇반의 누적 판매 물량은 1억개를 돌파했다. 1997년 실적(470만개)을 감안하면 무려 30배에 가까운 엄청난 물량 증가다.

    이밖에 품질 기반의 경쟁구도를 확립한 것도 햇반의 장수 비결이다. 햇반의 가격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다. 지금도 대형 할인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경쟁사 대비 적게는 15%, 많게는 55% 정도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그런데도 햇반은 70%대의 압도적 시장점유율(금액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 가격이 아닌 품질을 기반으로 한 경쟁구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경쟁사가 가격 경쟁에 매달릴 때 과감한 투자를 통해 당일 도정 시스템을 구축했고 저단백밥, 흰쌀죽 등 기술적 경쟁 우위가 필요한 제품을 계속해서 내놓으며 경쟁 업체들과의 품질 격차를 지속적으로 벌여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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