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삼성전자 반도체 전영현號 향한 전·현직 삼성맨의 기대 + 쓴소리

[Special Report | 대한민국 경제 운명 가를 AI 반도체 전쟁] “HBM 아니라 D램이 흔들리고 있다는 게 큰 문제”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6-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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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벽주의자 전영현은 ‘기술적 정직성’ 중시하는 스타일

    • 짧은 시간에 문제점 정확히 짚어냈다더라

    • 원포인트 인사는 HBM 기술적 문제 해결 차원 아냐

    • 리더십 원천이면서 압도적 선두이던 메모리 정상화하라는 것

    • 삼성전자에 D램은 ‘축’이면서 ‘생명선’

    • 너무 잘해왔고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독 된 듯

    • 호황에 안주하며 씨앗 덜 뿌려

    • SK하이닉스 맨파워 삼성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와

    • 2등 업체 ‘수모’가 ‘절박감’ 일으켜 경쟁력 갖게 돼

    • ‘뭘 먹고살 건지’ 묻고 또 물은 ‘이건희 리더십’

    [Gettyimage]

    [Gettyimage]

    5월 21일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새 수장이 전격 교체됐다. 전영현 미래사업기획단장(부회장)이 DS부문장에 올랐고, 경계현 사장은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전자는 이날 인사를 단행하며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하에서 대내외 분위기를 일신해 반도체의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5월 21일 반도체(DS) 부문 새 수장으로 전영현 미래사업기획단장(부회장)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2020년 7월 1일 전영현 당시 삼성SDI 사장이 경기 용인시 기흥사업장에서 열린 ‘삼성SDI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는 모습. [삼성SDI]

    삼성전자는 5월 21일 반도체(DS) 부문 새 수장으로 전영현 미래사업기획단장(부회장)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2020년 7월 1일 전영현 당시 삼성SDI 사장이 경기 용인시 기흥사업장에서 열린 ‘삼성SDI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는 모습. [삼성SDI]

    DS부문장이 전영현 부회장으로 교체된 것에 대해 직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한 내부 직원의 말이다.

    “속으로는 놀라고 있지만 내놓고 화제로 삼는 분위기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조용하다. 사내 게시판에는 ‘전 부회장은 메모리 기술을 잘 알고, 삼성 SDI 대표 시절 실적을 크게 개선시킨 실력 있는 경영자’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제 봄은 간 것일까’라는 말들도 있다.”

    봄이 가다니?

    “전임 대표이사(경계현)에 비해 용장(勇將)으로 알려진 신임 대표이사가 조직 분위기에 강한 긴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경계현 전 부문장 시절 분위기는 어땠나.

    “여러모로 조직문화를 바꾸려 했다. 당신 스스로를 ‘KH로 불러달라’ 했고 직원들과 타운홀미팅 성격인 ‘위톡’도 한 달에 한 번씩 빼놓지 않고 했다. 사내 게시판도 익명으로 바꿨다. 삼성전자 창사 이후 반도체에서 임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매달 쌍방향으로 의사소통을 한 대표는 경 전 대표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경 전 대표가 왔을 때 삼성전기에서 조직문화를 수평적으로 잘 재건하고 주력사업도 성장시킨 것을 인정받아 반도체 조직문화도 재건하라는 미션을 받고 온 것으로 직원들은 받아들였다. 실제로 열심히 했고 성과도 있었다. 이제 새로운 리더가 오면 ‘위톡’이 없어지는 거 아닐까 생각하는 직원들도 있다(웃음).”

    그는 “어떻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사여서 당혹스러워하고 있지만 여러모로 사업을 재점검하고 분위기 쇄신을 해야겠다는 최고경영진의 판단이 든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전 부회장이 취임하자마자 전 분야를 꼼꼼히 점검하며 하나하나 잡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짧은 시간 내 많은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어 기대감도 크다. 뼛속까지 ‘기술통’이라고 하니 엔지니어들이 잃어가고 있는 자존감을 회복하고 기술 격차를 줄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취임사에서 ‘저는 대표이사 부문장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의 선배이기도 하다’고 한 것이 많이 다가왔다. 문제가 있으면 선후배가 하나가 돼 뭉치던 그 시절 문화를 되살리려고 하는 것 같다.”

    삼성맨들의 자존심이 많이 꺾였나.

    “지난해 보너스 제로(0)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회장님이 계속 재판에 불려 다니는 걸 지켜보는 직원들 마음이 어떻겠나. 대부분 삼성맨들은 사업보국, 국민기업, 초격차 기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지만, 전 세계는 반도체를 단지 개인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안보’로 간주하고, 자국 업체에 대한 파격적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 삼성은 혼자 뛰는 느낌이다. 게다가 고객 요청도 점점 어려워지는데 바깥사람들은 막 뭐라고 하니 위축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삼성전자 경계현 DS부문장(사장)은 미래사업기획단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2024년 2월 26일 경계현 사장이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 초격차 확보를 위한 민-관 반도체 전략 간담회에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모두발언을 경청하는 모습. [뉴시스]

    삼성전자 경계현 DS부문장(사장)은 미래사업기획단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2024년 2월 26일 경계현 사장이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 초격차 확보를 위한 민-관 반도체 전략 간담회에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모두발언을 경청하는 모습. [뉴시스]

    적시에 제대로 된 인사

    전 부회장은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박사 학위(전자공학)를 마친 후 1991년부터 LG 반도체에서 D램 메모리를 개발하다가 2000년 삼성전자로 옮겨와 메모리 사업부에서 D램 설계팀장, 개발실장, 사업부장 겸 전략마케팅팀장을 했다.

    사업부장을 할 때인 2014~2017년 세계 최초 20나노, 18나노 D램 양산에 연달아 성공하며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같은 경쟁사를 따돌렸다.

    이번 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직 삼성 반도체 부문 임원에게 물었더니 “늦은 감이 있지만 제대로 된 사람을 앉힌 인사”라고 했다.

    어째서 그런가.

    “삼성은 지금 ‘기술 기업’이라는 본연의 자세에 대해 다시 성찰할 때다. 그런 점에서 전 부회장은 그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안도가 된다. 실제로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은 그가 기술에 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전 부회장은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현업으로 일하는 사람 중에서 메모리 분야에 가장 경험이 많고 2000년 이후 삼성 반도체의 글로벌 경쟁력을 다진 주역이다. 더군다나 삼성 공채 출신도 아닌 LG 반도체 출신이다. 얼마나 일을 잘하고 리더십이 있으면 타 회사 출신이 반도체 수장을 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삼성전자 반도체 임원 출신 양향자 전 의원은 전 부회장 밑에서 15년여를 일한 사이라고 한다. 그의 말이다.

    “2000년부터 내가 퇴사한 2016년 초까지 모시고 일했다. 전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를 견고하게 다진 주역이다. 고비고비마다 D램 개발을 이끄는 팀장을 맡아 큰 역할을 했다. 2006년에도 플래시메모리 경쟁력이 도시바에 뒤지는 상황에서 원 포인트 인사로 플래시 사업부를 맡았는데 2~3년 만에 따라잡았다.

    알다시피 반도체 역사는 패러독스(모순을 일으키는 논증) 극복의 역사 아닌가. 스피드는 빨라야 하는데 전력 소모는 적어야 하고, 용량은 커야 하는데 면적은 작아야 한다. 또 성능은 좋아지는데 값은 내려야 한다.

    이런 모순 극복의 역사를 만든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전 부회장이다. 안팎으로 위기인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장수가 왔다.”

    어떤 스타일인가.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없다. ‘기술적 정직성’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나 사안을 과장하고 부풀려서 발표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다양한 기술 방면에 통찰력과 파악 능력이 뛰어나다. 후배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골몰하고 있으면 ‘뭐, 뭐를 봐라’ 해서 보면 해결 방안이 나왔다. 맥을 잘 잡고 방향 설정을 잘 해주니 정말 많이 배웠다.

    또 팀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게 독려하는 것은 물론 새로 개발한 기술이 오류가 없는지 제대로 오퍼레이팅할 수 있는 검증 시스템을 매우 강조한 리더였다. 아무리 좋은 기술도 작동이 안 되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아랫사람들이 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과 분위기가 있었다.”

    또 다른 전직 임원 말도 비슷했다.

    “한마디로 ‘완벽주의자’다. 철저하고 꼼꼼해 밑에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캐릭터다(웃음). 기술에 대해 확신이 서면 끝까지 밀어붙이고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본질을 계속 파고 들어가는 형이다. 사실 기술 회사는 그런 엔지니어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삼성 같은 기술 기업은 철저하게 실력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게 이 업(業)의 숙명이다. 어느 학교 나왔는지, 박사 학위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상사의 권위도 문제 해결 능력에서 나온다. 작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기술 기업의 리더는 그럴 때 권위가 생긴다.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부하직원 말 잘 듣는다고 훌륭한 상사로 평가받는 그런 조직 문화가 기본적으로 아니다.”

    그는 “그런 점에서 전 부회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반도체업이라는 건, 대한민국에서 이전까지 해본 적이 없는 업이었다. 그런 업종에서 삼성이 30여 년 넘게 글로벌 선두를 해오고 있는 거다. 과거 이건희 회장이 왜 엔지니어들에게 위임을 하고 경영을 맡겼겠나. 모든 업이 다 그렇지만 기술 기업도 기술 기업만의 아이덴티티라는 게 있다.

    당장 전 부회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엔비디아 HBM(고대역폭 메모리반도체) 납품 건이다. 5월에 된다 하더니 안 됐잖은가. 왜 안 된 건지, 문제는 뭔지 빨리 파악해 어떻게 해결할 건가 이게 중요하다.

    이번 인사는 삼성이 기술 기업의 아이덴티티(identity)라는 걸 다시 생각해 본 인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좀 안도가 됐다. 엔비디아 납품도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믿는다.”

    전 부회장은 2017년 권오현 부회장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물망에 오르내렸으나 김기남 사장으로 바통이 이어지면서 삼성 SDI 대표로 갔다.

    막 취임했을 때가 갤럭시 노트7 배터리 화재 사고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던 때였는데 그게 오히려 능력 발휘 기회가 됐다.

    품질개선뿐 아니라 주력사업을 스마트폰용 중소형 배터리에서 전기차·대형저장장치(ESS) 등으로 전환해 대표를 맡은 5년 동안 5조 원대 매출을 13조 원대로 끌어올렸다. 1조 원 영업 적자를 내던 회사를 1조 원 흑자를 내는 회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부동의 1위 메모리 사업이…”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본사 전경. [뉴시스]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본사 전경. [뉴시스]

    이 같은 호평에도 인사 발표가 나던 날 삼성전자 주가는 떨어졌다. 시장(市場)은 새로 바뀐 수장을 환영하기보다 연말도 아닌 상반기에 그것도 원 포인트로 바꿔야 할 정도로 삼성의 내부 상황이 좋지 않다는 부정적 신호로 읽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요즘 삼성전자에 관련된 뉴스는 ‘배드(bad) 뉴스’가 많다. HBM 주도권을 SK하이닉스(이하 하이닉스)에 빼앗겨 뒤숭숭한 와중에 노조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파업까지 했다.

    파운드리에서 대만 TSMC를 추격하는 건 고사하고 내부 경쟁에서 하이닉스에까지 밀리는 상황이 됐으니 안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이다. 이런 의심은 현 상황이 3, 4년마다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반도체 시장 사이클에 따른 업 자체의 숙명 때문이 아니라 메모리 세계 1위이면서도 엔비디아로 대표되는 AI(인공지능) 열기가 뜨거운데 삼성만 소외되고 있으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향후 미래에도 과연 잘나갈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 의심으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기자는 3년 전부터 고(故) 이건희 회장 평전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삼성맨을 만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대화를 꺼린다는 거였다. 고인의 성취와 삼성의 성취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다가도 삼성에 대한 우려나 조언을 해달라고 하면 하나같이 입을 닫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나쁜 이미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월급쟁이의 ‘의리’로도 느껴졌고, 보안이 생명인 기술 기업에서 일해 온 사람들의 DNA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눈치를 본다는 느낌도 들었다. ‘관리의 삼성’ 특유의 폐쇄성에 더해 오너의 사법 이슈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상황은 그들의 ‘입’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걱정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어렵게 만난 한 전직 삼성 반도체맨의 말은 공감이 많이 됐다.

    그가 말한 핵심은 “지금 HBM이 문제가 아니라 삼성전자의 근간인 메모리가 흔들린다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거였다.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전 부회장의 등판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계에서부터 파운드리(위탁생산)·메모리 생산까지 하는 세계 최대 종합반도체회사(IDM)다. 하지만 AI를 중심으로 기술 흐름이 빠르게 변하면서 지난 30년 동안 수율, 물량, 기술력에서 압도적 선두를 지킨 메모리반도체 리더십까지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피어오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사는 HBM을 엔비디아에 납품할 수 있게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차원의 주문이 아니라 D램 사업을 정상화하라는 주문으로 읽힌다.”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으로 낮게 말하던 그가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삼성전자에 D램은 ‘축’이다. 생명선이다. D램 리더십을 잃는다는 건 근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미국과 대만의 경쟁 기업들은 언제 삼성이 쓰러질까, 어떻게 하면 쓰러뜨릴 수 있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하지만 삼성이 메모리를 꽉 쥐고 있기 때문에 못 하는 거다. 메모리가 강해야 디스플레이, 시스템반도체 같은 인더스트리(industry)를 지킬 수 있다. D램은 경쟁자들이 삼성을 따돌릴 수 없게 만드는 임계선이다.”

    실제로 전 부회장도 스스로 D램 위기를 말했다.

    취임 직후 사내 게시판에 올린 취임사에서 “지난해 반도체 부문은 회사 설립 이후 최대 적자를 기록했고, 부동의 1위 메모리 사업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고 한 것이다.

    실제로 전영현 부회장의 개인적 능력과는 별도로 그를 둘러싼 내외부 환경은 녹록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또 다른 퇴직 삼성맨 말이다.

    “그가 잘나가던 때와 지금은 바깥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하이닉스가 많이 컸다. 과거에는 삼성과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기술 열세였지만 이제는 대등하게 싸움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다.

    하이닉스 기술진의 경쟁력은 삼성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인재들도 많이 뽑고 스카우트를 통해 위아래 맨 파워가 골고루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절박감’이 삼성보다 강하다. 지금 하이닉스는 그냥 저절로 된 게 아니다. 2등 업체로서 겪은 ‘수모’가 자산이 돼 자체의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전체로 보면 하이닉스의 선전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삼성으로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미국 마이크론도 강해지고 있으니 메모리 기술력이 점점 평준화되고 있고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전 부회장을 둘러싼 국내외 환경은 2, 3위를 멀찌감치 따돌리며 퍼스트 무버로서 천하를 평정했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압도적 열세이던 하이닉스의 ‘절박감’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6월 7일 창사 55년 만에 파업을 선언하고 연가 투쟁에 돌입했다. 당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노조의 파업 투쟁 차량 위로 삼성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뉴시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6월 7일 창사 55년 만에 파업을 선언하고 연가 투쟁에 돌입했다. 당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노조의 파업 투쟁 차량 위로 삼성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뉴시스]

    전 부회장 앞에 놓인 또 다른 우려는 내부 조직문화와 관련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창사 이후 처음인 노조 파업도 한몫했다. 겉으로 볼 때 대다수 직원은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신참 엔지니어의 말이다.

    “금융위기 때도 없었던 보너스 제로(0)에 대한 심적 타격은 특히 신입 사원들이 컸다. 하지만 대다수는 지켜보는 입장이다. 회사도 어려운데 좀 참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주류다.

    노조가 파업 카드로 내민 연차를 쓰는 것에 대해 ‘뭐하는 거지,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도 있다. 원래 샌드위치 데이는 휴가를 장려하는 분위기다. 인사팀이 나서서 ‘연차를 소진하라’며 적극 휴가 계획을 세우라고 독려하는 상황인데 쉬는 것으로 우리 뜻을 보여주자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나는 연차를 쓰는 게 노조에 동참하는 것 같아 쓰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 직원은 경쟁력을 회복하는 게 우선순위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크게 동요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전 현직 삼성맨들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속내가 나왔다. “겉으로 볼 때 노조 파업이 임금인상과 같은 ‘돈’ 문제 같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경영진에 대한 불신을 내놓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태까지 없었던 일”이라며 “심각성이 있어 보인다”는 게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록 노조의 주장이긴 해도 구체적인 전임 CEO 이름까지 적시하며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현국 전국삼성전자노조 부위원장은 YTN과 인터뷰하면서 “적자 상황에서 직원들에게는 보너스를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임원들은 가져가는 구조다.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니 이탈자들이 나오면서 조직이 힘을 잃고 있다”면서 “HBM도 김기남 전 고문이 사장 시절 연구소를 축소하고 개발을 늦추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와서 부랴부랴 연구진을 확대하고 개발한다니 일할 의욕이 없어진다”고 했다.

    “노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한 퇴직 임원은 “하지만 최근 현직에서 일하는 후배들을 만나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삼성에서 노조가 생기고 파업까지 한다는 뉴스를 보고 그렇지 않아도 힘든 상황에서 조직문화가 이렇게 해이해져서야 미래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후배 직원들이 ‘뭔가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말들을 하는 걸 들으면서 경영진이 좀 더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조의 행동을 일은 조금만 하고 돈은 더 받겠다는 ‘농땡이’ 의식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세계 1등 회사가 국내 업체에까지 밀리게 된 원인을 파악하라’는 주문으로 생각한다면 ‘건전한 불만’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

    ‘똑부’ 리더 필요한 때

    2023년 12월 15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경계현 당시 삼성전자 DS부문장이 네덜란드 방문을 마치고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 [뉴시스]

    2023년 12월 15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경계현 당시 삼성전자 DS부문장이 네덜란드 방문을 마치고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고 있다. [뉴시스]

    이번에는 현직 고참 직원을 만나 이야기를 길게 들어보았다. 그 역시 “뭔가 조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는 데 대해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뭔가.

    “지난 10년 동안 매년 최고 실적을 내다 보니 ‘앞으로 어떤 시대가 열릴까’ 하는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삼성은 잘해왔고 잘하고 있다’는 의식이 만연했다고 본다. 한마디로 미래 준비를 못 한 거다.

    또 회장님의 사법 이슈로 의사결정도 적시에 못 하고 컨트롤타워도 없어졌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대내외적으로 너무 위축되는 상황에서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해 남들 입에 오르내리면 바로 ‘잘린다’는 의식이 임원들 사이에 팽배하다 보니 다들 그저 위아래 ‘눈치 보기’에 급급한 문화가 됐다. 이러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거나 혁신하는 자체를 ‘리스크’로 받아들인다. 어떤 문제도 만들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복지부동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그의 쓴소리는 이어졌다.

    “지금 삼성 직원들의 고객은 바깥 시장(市場)이 아니라 내부 고객(상사)이다. HBM 문제도 아마 ‘계속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보고가 계속 올라가지 않았을까.

    지금 내부 분위기는 미래를 생각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전진하기보다 ‘각자 하고 있는 것만이라도 조용하게 잘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도전 의욕이 충만하던 삼성이 다시 ‘관리의 시대’로 돌아간 지 꽤 됐다.

    임원들도 ‘순환 보직’이라는 미명하에 현장 경험이 별로 없던 사람들이 와서 뜬금없는 의사결정을 한다. 직원들이 뭘 하자고 하면 ‘그게 당장 돈이 되느냐’ 부터 묻는다. 이래 갖고 미래를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무엇보다 “조직 내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많이 약해졌다”고도 했다.

    “지위 고하, 신참 고참을 막론하고 뛰어난 전문 역량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제대로 픽업하는 시스템이 돼 있지 않다고 본다. 구성원들의 강점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안주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많다.

    문제 해결의 적임자가 누구인지 한마디로 ‘라이트 퍼슨(Right Person)’을 찾는 게 중요한데 ‘왜 저 사람이 저기에 있지?’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되지 않은가. 지금 삼성에는 정말 똑똑하고 부지런한 ‘똑부’ 리더들이 필요하다.

    AI 혁명을 주도하는 미국, 대만의 리더들을 보라. 엔비디아 대표 젠슨 황은 사무실이 없다고 들었다. 1대 1 보고도 받지 않고 ‘언제든지 달려갈 테니 나한테 이야기해 줘’ 이런 식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30년을 한 거다. 얼마나 조직을 꿰뚫고 있을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이런 게 수평 문화이지 밑에 사람들 이야기 잘 들어주는 게 수평 문화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앞서 소개한 퇴직 임원이 언급한 ‘삼성은 기술 기업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할 때’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퇴직 임원 말이다.

    “삼성의 조직문화 전체가 관료화되고 비대해진 것 같다는 지적에 나도 동감한다. 30여 년 전 신경영 선언에서 ‘양보다 질’을 외친 고 이건희 회장의 철학을 다시 새겨봐야 할 때라고 본다.

    지금 칩은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싸게 만들어 파는 ‘양의 시대’가 아니라 우리의 고객인 엔비디아 같은 설계 회사들이 무슨 칩을 원하는지를 제때 파악해서 주문을 따내는 ‘수주전의 시대’다. 이를테면 엔비디아 차세대 개발팀과 삼성의 차세대 개발팀이 자주 만나야 한다. 아마 HBM도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개발 부서장은 고객 기업들의 이런 니즈(needs) 파악을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현장을 뛰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삼성 안에서는 바깥과 이런 적극적인 소통이 이뤄지고 있지 못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굉장히 위험하다는 신호다.

    옛날에는 팀장이 직접 고객을 만났다. 그래야 아, 지금 시장에 뭐가 필요하구나, 앞으로 미래에는 이게 뜨겠구나 하는 감이 온다.

    이건 마케팅이나 그런 차원이 아니다. 임원들이 외부 고객 중심으로 봐야하는 데 내부 고객(상사) 위주로 본다고 한다면 매우 심각한 거다.”

    “전자는 그룹에서 배타성이 가장 센 집단”

    삼성이 HBM에서 하이닉스에 뒤진 것과 관련해 현직 삼성맨으로부터 좀 더 구체적 예시를 들을 수 있었다.

    “다 결과주의적 해석이긴 하지만 삼성도 하이닉스와 비슷한 시기에 HBM을 시작했다. 2017년, 2018년 무렵인데 그때 사상 최대 실적이 났다. 특별 보너스 마구 나오고 정말 좋았다. 사실 잘나갈 때 긴장감 갖기는 힘들지 않은가.

    HBM은 엔비디아가 ‘이런 걸 좀 만들어달라’고 하면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문형 칩’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주문을 받은 쪽에서 ‘어디다 쓸 건데?’ 하고 물었을 때 엔비디아 쪽에서 ‘아직은 수요가 없는데요’ 했을 때 삼성은 안 하고 하이닉스는 덤빈 거다.

    삼성 처지에선 그거 아니더라도 사상 최대 수익을 내면서 잘나가고 있는데 ‘뭐 굳이…’ 하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다. 사실 챗GPT로 대변되는 AI시장은 ‘오픈 AI’ 사태가 터지면서 갑자기 뜬 거다.

    혹자들은 또 이번 전영현 부회장으로의 교체가 경계현 전 대표에 대한 경질 혹은 신상필벌 성격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 HBM에 뒤진 건 경 전 대표 때 의사결정이 아니라 그 전임자들이 한 거다. 역대 대표들 중에도 씨앗을 뿌린 사람이 있고 수확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부적으로는 이전 경영진이 호황에 안주하며 씨앗을 너무 안 뿌린 거다.”

    한편, 한 퇴직 임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참에 반도체 수장을 선택하는 인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고 했다.

    “전 부회장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지만 공백이 7년 가까이 되는 60대를 다시 반도체 수장에 앉힌다는 것 자체가 최고경영자를 키우는 인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것 아닌가.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50대에는 왜 그런 사람이 없었나, 키우지 못한 것은 아닌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나오지 않겠나.

    경 전 대표가 삼성전기 사장을 하다 왔고, 전 부회장도 은퇴를 생각할 시점인 분을 수장으로 앉혔다. 다 훌륭하고 대단한 분들이고 다양한 경험을 거치면서 사업을 크게 보는 안목을 가졌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렇게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 ‘과연 그게 맞나’ 하는 의문도 있다. 반도체 수장이 디스플레이나 배터리 사업에서 성과를 냈다는 게 왜 중요한가. 한마디로 삼성 내부에서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을 키우지 않았다는 거다.”

    삼성전자 내부의 조직문화를 바라보는 다른 계열사 임원들의 시선은 더 냉정했다. 다른 계열사에서 일하는 현직 임원 말이다.

    “전자(반도체)는 그룹 내에서 가장 배타성이 쎈 집단이라는 것을 내외부에서도 인정한다. 거기에 함정이 있는 듯하다. 1등이라는 자부심이 한순간 자만심으로 변해 남들이 무슨 생각, 무엇을 준비하는지 살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은 반도체 사람들의 입김이 정답이 돼왔고 주요 임원 인사를 통해 그 성공 DNA를 계열사에 전파해 왔다.

    그런데 반도체가 위기를 만나니 자정능력에 한계가 온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사람을 키우지 않고 경쟁자를 용인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뿌리내리면서 한마디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매일 서초 사옥 앞에 버스와 트럭을 동원해 시위하고 있는 노조를 보면서 출근하는 직원들 마음에는 찬반 여부를 떠나 ‘위기의 순간마다 다시 해보자’는 삼성 고유의 문화와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무기력감까지 있다고 한다. 한순간에 훅 가는 게 글로벌 전쟁인데 앞으로 5년, 10년 뒤에도 우리가 1등을 유지하기는커녕 살아남을 수 있기나 할지 두려움마저 든다.”

    국민과 정치가 도와줘야

    그렇다고 해서 걱정하는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현직 삼성맨들은 무엇보다 삼성전자의 저력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이들의 목소리를 옮겨본다.

    “현재 여러 가지 경고등이 켜진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감을 갖고 덤비면 한국과 삼성전자에 다시 기회가 올 수 있다.

    원래 AI 기술은 삼성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엔비디아로 대표되는 설계 프로세스 쪽은 미국이 잘했던 거고, 파운드리는 대만이 잘했던 거고. 지금 상황은 삼성이 못했다기보다 미국, 대만이 잘했다고 봐야 한다. 남이 잘하는 분야까지 추격하려다 이게 잘 안 되는 분위기가 된 거다.

    삼성은 그동안 디지털 전환이나 스마트폰 시대에 사업 영역이 잘 맞아 떨어져 ‘퍼스트 무버’가 됐다. D램 패권 자리는 당분간 지킬 수 있다. 미래 투자도 열심히 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온 디바이스(On device) AI 칩(엑시노스, 스마트폰 AP)을 출시했고, 데이터센터 AI반도체(마하)도 개발하고 있다. 언제일지 몰라도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부잣집 3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인프라 면에서 삼성은 하이닉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강하다. 지금 조직을 잘 정비하고 기술개발에 매진하면 3년 정도 뒤에는 반드시 효과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지금 일부 여론을 보면 당장 삼성이 큰 위기에 봉착해 있거나 봉착할 것처럼 보는데 이것도 과장이다. HBM은 전체 D램 매출의 10~20% 정도다. 내년에는 25% 정도 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과거 제로(0)였던 시장이 2, 3년 사이 오픈AI 이슈가 터지면서 갑자기 커진 거다. 어차피 저장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D램, 낸드 수요는 계속 늘 것이다. 가격도 회복하고 있다.

    HBM 이슈는 시장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로서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여기에 답을 찾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생전에 이건희 회장이 입이 닳도록 말했던 ‘앞으로 5년 지나면 이 제품들 다 없어질 텐데 뭘 먹고살 건지’ 묻고 또 물으며 답을 찾아야 한다. 회장님은 항상 ‘위기’와 ‘미래’라는 단어를 달고 사시지 않았나. 현재에 충실해서 열심히 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삼성이 어떤 것에 선택과 집중을 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이런 답도 있었다.

    “이재용 회장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술, 기술’을 외치면서 최근에 미국 IT나 AI 기업 CEO들을 만난 자리에서 ‘모두가 하는 사업은 누구보다 잘 해내고 아무도 못 하는 사업은 누구보다 먼저 해내자’고 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하지만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은 ‘아무도 못 하는 새로운 사업 발굴’보다 ‘D램을 지키는 것’이다. 세계 1위 경쟁력을 가진 분야조차 안이한 대응과 활력을 불어넣지 못해 흔들린다면 그게 문제다. 이걸 다시 다잡아야 한다.”

    삼성을 단지 일개 기업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지금 삼성만 문제인가. 삼성을 향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들 하는데 한국도 ‘잃어버린 반도체 10년’이다. 지금 반도체는 비즈니스 품목이 아니라 나라가 총력을 기울여 키우는 안보 산업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 정치는 뭘 했나. 정치 리더들은 과학을 알아야 하고 공학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만이 그래서 잘되는 거다. 국민들도 TSMC에 전기를 몰아준다고 밤에는 전기도 끈다는 거 아닌가.

    국민한테 반도체만이 살길이라는 걸 설득하고 규제도 풀고 지원도 해야 하는데 그런 리더십이 안 보여 걱정이 크다. 의사 증원이 아니라 엔지니어 증원이 필요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월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월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국가적 국민적 서포트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이에 대해 이재용 회장도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삼성의 어려움을 단지 개인 기업의 어려움으로만 간주하면 안 된다. 한국의 미래와 연결되는 문제다.

    장기적으로 미국, 대만이 주도하는 AI 혁명에 동참하려면 반도체산업에 대한 국민 전체의 성원이 필요하다. 반도체산업에 대한 지원과 규제 혁파를 개인 기업을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어차피 미래는 첨단산업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삼성의 오늘이 있기까지 호암 이병철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이 보여준 리더십, 그리고 삼성 임직원들의 노고에 대해 국가와 국민이 응원해 주고 밀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D램 세계 패권도 국가와 국민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삼성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전 부회장에 대한 이런 주문도 있었다.

    “전 부회장이 은퇴를 바라볼 늦은 나이에 수장으로 온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분명히 있다.

    그가 반도체업계를 떠나 있던 동안 시장은 AI용 메모리와 HBM 경쟁으로 총성 없는 전쟁을 촌각을 다투며 벌여왔다. 게다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TSMC가 하이닉스와 차세대 HBM을 함께 개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 부회장이 메모리 전문가이긴 하지만 그것만 해봐서 AI 시장의 큰 판도를 볼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있다. 그런 점에서 사업부장들에게 맡기는 위임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본다.

    거듭 말하지만 삼성은 메모리부터 파운드리, 모바일 칩(AP)까지 한마디로 반도체를 총괄하는 세계 유일무이 회사다. 어떤 면에서 과거 일본의 도시바나 히타치처럼 별개의 사업부들이 뭉쳐 있는 그룹 시스템이다. 총괄 회장이 누구냐에 따라 선택과 집중이 이뤄질 수 있다. 도시바의 경우 원전 출신이 최고경영자가 되면서 반도체 사업에 관심이 없다 보니 힘을 잃었고, 중요한 투자 결정에서 몇 번 타이밍을 잃으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지금 삼성과 싸우는 미국 대만의 IT 경쟁 기업들은 하나하나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독자적인 회사다. 파운드리는 TSMC, AP는 퀄컴과 미디어텍 이런 식이다. 이 회사 최고경영자들은 당연히 그 전문성에 특화된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나온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장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의 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다. 지금처럼 기술이 고도로 첨단·전문화된 상황에서 부문장이 이 모든 걸 다하기는 그 누구를 갖다놓아도 어렵다.

    이런 점에서 각 사업부장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하면 보고 채널만 늘어 자칫 옥상옥이 될 수 있다. 전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전략을 짜줘야 한다. 한마디로 사업부장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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