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호

[고담기담] 다모 고혜란, 조선 최초 女性 수사관

  • 윤채근 단국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2024-07-1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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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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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부 종사관 이풍교는 자신의 부하 고혜란이 갇혀 있는 우포청 감옥에 들어서며 혀를 끌끌 찼다. 혜란은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풍교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포교 녀석들 육모 방망이 맛이 조금 맵더이다. 어서 여기서 빼내 주세요.”

    혜란의 두 손에 채워진 수갑을 벗겨낸 풍교가 자기 뒤를 따라온 포교를 향해 말했다.

    “아까 얘기했지만, 혜란이는 내 부하다.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 본 거야.”

    머리를 비스듬히 꼰 포교가 천천히 대답했다.



    “분부는 받들겠습니다만, 저년한테 두들겨 맞은 포졸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냥은 못 보내고, 우선 포도대장 어른 오실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뒷짐을 진 풍교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겨우 이런 일로 포도대장이 온다고?”

    “그러게 말씀입죠? 계집이 한성부 기찰포교라는 게 말도 안 되고 하니, 몸소 확인하러 오시는 듯합니다.”

    몸을 벌떡 일으킨 혜란이 포교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기찰포교가 아니라 전 다모란 말입니다. 한성부 판윤 대감 직속의 감찰 다모란 말이오!”

    몸을 움찔한 포교가 풍교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몸 쓰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닌 건 분명하나, 한성부에 다모란 관원이 있단 말은 내 처음이오.”

    혜란 대신 풍교가 입을 열었다.

    “차 심부름이나 하는 계집종이 아니다. 판윤 대감께서 한양 풍속을 다스리려 새로 만든 관원인 줄로만 알아라. 정식 직급은 아니나 엄연히 한성부 소속이다.”

    포도대장

    포도대장은 풍교를 물리고 혜란하고만 단독으로 만나겠다고 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풍교가 완강히 반대했지만, 포도대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혜란과 단둘이 되자 포도대장이 물었다.

    “어젯밤 일어난 일을 이실직고해 보아라.”

    이마에 난 상처를 수건으로 싸맨 혜란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한성부에서 그저께 제보 하나를 받았습니다. 서소문 밖 여염집에서 밀주를 만들고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근자에 흉년이 들어 곡식으로 술을 담그는 건 국법으로 엄히 금지하고 있잖습니까?”

    고개를 크게 끄덕인 포도대장이 물었다.

    “그러하다. 그런데 그게 왜 한성부로 제보된 거지? 엄연히 포청이 있는데?”

    침을 목울대로 꼴깍 넘긴 혜란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포청에 제보해도 말을 잘 안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말을 안 들어준다?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것까진 모르옵니다. 어쨌든 한성부로 넘어온 일이니 한성부가 나서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거야 그렇다만. 한데 어쩌다 포졸들을 두들겨 패는 망동을 벌였느냐?”

    “고발한 자와 함께 서소문 밀주가를 탐문해 잠입했습니다. 범인인 아낙과 그 서방을 체포해 밖으로 나오려는데,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치더군요. 한성부 소속이라고 제 신분을 밝혔음에도 막무가내로 방해하기에 몸을 조금 풀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포도대장이 도포 자락을 여미며 말했다.

    “그건 가상하다. 포교 둘이 방망이를 쓰고서야 널 제압했다니, 계집 몸으로 태어났지만 진정 대단한 용력이다. 한데 한성부에 다모란 관직이 언제부터 생겼더냐? 내 처음 들어본다.”

    어깨를 한번 으쓱한 혜란이 웃음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한성판윤 대감께서 최근 은밀히 창설하셨습니다. 아직은 저 혼자입니다.”

    “혼자라?”

    “그러하옵니다. 수사를 하다 보면 아낙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사내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특히 최근 빈발하는 밀주 사건의 범인은 주로 여자들 아닙니까? 그들에게 접근하는 덴 저 같은 계집이 수월하지 않을는지요?”

    말없이 혜란을 노려보던 포도대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정식 직급도 없으니 녹봉도 없겠지? 뭐로 입에 풀칠하느냐?”

    “본디 대궐 내의원 의녀였으나 소주방에서 음식도 만들고, 가끔 상의원에 불려 가 옷도 깁습니다. 다모라 불리지만 차 달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사옵니다.”

    그제야 미소를 띤 포도대장이 엄숙하게 말했다.

    “판윤 대감의 뜻을 내 잘 알겠다. 하지만 밀주 빚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건 엄연히 우리 포청 몫이다. 포졸들을 때린 죄는 불문에 부칠 터, 당분간 자중하고 있거라. 곧 판윤 대감과 만나 네 문제를 의논해 보겠다. 물러가라!”

    한성부 종사관

    한성부 관아에서 혜란과 마주 앉은 풍교는 그녀가 포도대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를 의아히 여긴 혜란이 말했다.

    “포도대장께선 이번 소동을 문제 삼지 않겠다 약조하셨습니다. 이리 된 마당에 쇤네도 조금 쉬면서 대궐 약방 일이나 보고 싶습니다.”

    고개를 크게 가로저은 풍교가 말했다.

    “이게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밀주 담그는 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다모를 둬야 한다고 판윤 대감께 주청했던 사람이 누구더냐?”

    “그야 종사관 어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넌 내가 뽑아 내가 훈련한 내 사람이다. 내 말을 따라야 한다. 오직 내 말만!”

    한참 동안 풍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서소문에서 밀주를 빚던 부부는 이미 포청에 붙잡혔습니다. 다른 제보가 없는 한 제가 따로 할 일은 없지 싶습니다만.”

    초조한 눈빛의 풍교가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서소문의 그 부부를 한성부에 제보했던 삼득이란 놈은 어찌 됐느냐? 네가 포졸들과 다투는 사이 사라졌다 하지 않았느냐?”

    고개를 갸웃한 혜란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랬지요. 연이어 나타난 포교 둘을 상대하느라 미처 살피진 못했으나, 그랬겠지요?”

    “그랬겠지요? 그게 그리 말하고 그냥 넘길 일이더냐?”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서소문 밀주 빚는 집 안까지 절 안내해 줬고, 그리고 포졸들이 집안으로 막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제 왼쪽에 붙어 있었는데, 그 뒤론 기억이 없습니다.”

    얼굴을 혜란 쪽으로 들이밀며 풍교가 속삭였다.

    “이상하지 않으냐? 한성부에 밀주를 제보했으면 큰 상을 받아야 할 텐데, 왜 도망갔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혜란을 향해 풍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포졸들은 하필 그 시점에 어찌 알고 들이닥쳤을까? 삼득이는 분명 우리 한성부에만 제보했는데 말이다!”

    눈동자가 더욱 커진 혜란이 벌떡 일어서서 물었다.

    “왜일까요? 전 우포청도 뭔가 소문을 듣고 때마침 체포하러 온 줄로만 짐작하고 있었어요!”

    “순진하긴! 내 생각엔, 포도대장에게 뭔가 구린 데가 있지 싶다.”

    “구린 데라뇨?”

    “우포청이 우리 수사를 방해하지 않았느냐? 네가 포졸들을 순식간에 이기지 못했다면 서소문 부부는 그 틈에 바로 도주했을 것 아니냐? 또 포졸들과 격투 직후 네가 그 부부를 포승줄로 묶어두지 않았다면, 이어 나타난 포교들과 겨루는 사이 부부는 끝내 도주에 성공했을 것이다! 어떻게 봐도 우포청은 그들을 잡을 생각이 없었어!”

    얼어붙은 채 서 있던 혜란이 물었다.

    “포도대장이 밀주의 공범이라면,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공범까지야 모르겠지만, 그들로부터 따로 뇌물을 받아왔을 순 있겠지. 밀주 가격이 보통 비싸더냐?”

    “포도대장께서요?”

    “아니, 포청 전체가.”

    삼득이

    혜란은 우포청 근처 골목길에 몸을 숨기고 인적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서소문의 밀주 빚는 부부를 제보한 삼득이가 우포청에 잡혀 있다는 걸 알아낸 직후였다. 그녀는 어둠이 깃들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릴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우포청 쪽을 주시했다.

    포도청 전체가 밀주 빚는 자들로부터 뒷돈을 챙겨왔다면 삼득이 같은 밀고자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일 테고, 필경 없는 죄라도 엮어 입을 막으려 할 게 분명했다. 혜란은 종사관의 명령대로 포도대장을 고발할 중요한 증인인 삼득을 포청에서 빼돌릴 심산이었다.

    우포청 포졸들이 죄인 차림의 삼득이를 데리고 전옥서를 향한 건 새벽 무렵이었다.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삼득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빠르게 포졸 일행을 따라잡은 혜란은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하고 삼득이를 부축해 원통교 쪽으로 향했다. 순라군들의 눈을 피해 다리 근처에 다다를 즘, 멀리서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삼득의 가슴에 박혔다.

    죽어가던 삼득은 무언가 말하려 애를 썼다. 허리춤에서 응급 탕약이 담긴 호리병을 꺼낸 혜란이 삼득의 입에 약물을 흘려 넣으며 물었다.

    “포도대장이 널 죽인다고 했느냐? 네게 무슨 짓을 했느냐?”

    탕약 덕분에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삼득이 혜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필구, 조, 필, 구!”

    삼득의 목을 받쳐 호흡을 도우며 혜란이 다시 외쳤다.

    “포도청 놈들 짓이 맞느냐?”

    고개를 살짝 저은 삼득이 다시 속삭였다.

    “평시서 주부, 필구, 조 필구요.”

    혜란이 더 물으려 했지만, 삼득은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시신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혜란은 혼란스러웠다. 삼득을 죽인 자가 포도대장이라면 왜 자신은 그냥 살려뒀을까 궁금했다. 종사관 이풍교가 대기하고 있는 소공주동 골목길로 향하려던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포도대장의 솜씨라기엔 삼득이를 죽인 수법이 너무 치졸했다. 차라리 우포청 옥사에서 고문해 죽여버리는 게 나았을 터였다.

    평시서 주부 조필구

    혜란은 끝내 풍교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녀는 청계천을 따라 이동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 사건의 석연찮은 점을 해결하려면 조필구부터 찾아내야 했다. 그녀는 오전 내내 평시서 주변을 어슬렁대며 망설였다. 한양 시장의 물가를 단속하는 관아인 평시서는 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그녀가 몰래 들어가 주부 조필구를 찾아내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다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허기와 졸음에 시달리며 평시서 건너편 골목 담장에 기대 있던 혜란은 익숙한 사람을 발견하고 급히 몸을 숙였다. 이풍교였다. 평시서 안으로 들어간 풍교는 한참 뒤에 누군가를 대동하고 도로 나왔다. 풍교를 따라 나온 자는 한눈에 봐도 관인 차림의 사내였다. 혜란은 그가 조필구임을 직감했다.

    두 사람은 종묘 근처 시전을 거쳐 흥인문 방향으로 정처 없이 걷다가 서민들의 장터인 난전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혜란은 자신이 놓친 게 무얼까 되짚기를 반복했다. 이풍교도 포도대장도 믿을 수 없었지만, 현재로선 이풍교의 행동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끈질기게 난전 주변을 서성이며 풍교와 필구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렸다.

    두 사람은 통행금지가 시작되기 직전 난전 입구로 되돌아 나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혜란은 필구를 추적했다. 필구는 훈련원을 빙 돌아 어느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오래 생각에 잠겼던 혜란은 크게 호흡하고 주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등불이 밝혀진 으슥한 안방으로 돌입한 그녀는 사내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투전 노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가 외쳤다.

    “난 한성부 다모 고혜란이다! 모두 엎드려라!”

    사내들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도로 노름에 열중했다. 혜란은 단전에 힘을 모으고 가장 가까운 사내의 상투를 잡아 옆으로 쓰러뜨렸다.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선 사내들이 혜란을 붙잡으려 다가섰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바닥을 회전하며 사내들의 발목을 걷어찼다. 일어서려는 사내들은 그녀가 휘두른 단봉에 머리를 맞고 도로 바닥에 누웠다. 사내들을 차례차례 제압한 그녀는 필구 옆으로 다가갔다.

    “평시서 주부, 조필구?”

    필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혜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삼득이를 죽였지?”

    혜란을 올려다본 필구가 야릇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입술은 두려움으로 떨렸다.

    “죽인 적 없소. 혹시 누가 보낸 거요?”

    혜란이 다시 물었다.

    “종사관 이풍교와 무슨 음모를 꾸민 거냐?”

    체념한 듯한 표정이 된 필구가 목청을 돋워 대답했다.

    “난 돈만 담당했소. 이 종사관이 시키는 대로 돈만 수금했다고!”

    “무슨 돈?”

    “밀주를 고발하면 보상금을 받잖소? 난 그 돈을 받아 분배하는 일만 했다 이 말이지!”

    한성부

    아침 일찍 한성부로 복귀한 혜란은 곧바로 풍교에게 독대를 청했다. 그녀를 자기 방으로 들인 풍교는 침착한 태도로 물었다.

    “그동안 어딜 쏘다녔느냐? 삼득이는 도대체 어찌 된 거고?”

    상대를 쏘아보던 혜란이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 바빴습니다. 평시서 주부 조필구를 문초해야 했거든요.”

    잔잔한 근육 떨림이 풍교의 뺨을 타고 이마에까지 흘러들었다. 혜란이 다시 입을 뗐다.

    “삼득이가 죽기 직전 조필구란 이름을 댔습니다. 그 순간 쇤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지더군요. 실은 그자 입에서 포도대장 이름이 나올 줄 짐작했습니다. 하온데 평시서 주부라면 포청과는 아무 관련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저 나름대로 다른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해답을 찾아냈느냐?”

    고개를 끄덕인 혜란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최근 들어 밀주를 고발하는 일이 크게 늘었다지요? 정상을 참작해 줄 사소한 경우까지 죄 고발이 이뤄져 포청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보상금 때문이었습니다! 밀주를 담근다는 정보를 수집한 자가 전문 고발꾼을 시켜 고발을 사주한 겁니다. 가령 종사관 어른이 삼득이를 부린 것처럼요! 그리고 필구 같은 자가 중간에서 보상금을 세 등분으로 나눠 분배했던 것이지요. 아닌가요?”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풍교가 조용히 속삭였다.

    “설령 그렇다고 치자. 증거가 있느냐? 포도대장이 밀주 사건 수사를 방해했단 증거는 차고 넘친다. 한데 내가 뭘 어쨌다는 거냐? 조필구라는 자의 증언? 그걸 누가 믿겠느냐? 증거를 대보란 말이다. 아니면 네년을 내 손으로 죽이겠다.”

    말없이 풍교를 바라보던 혜란이 보따리에 싸인 물건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펼치자 피 묻은 화살이 나타났다. 혜란이 말했다.

    “삼득이 심장을 관통했던 화살입니다. 필요할 것 같아 잘 보관했지요. 딱 봐도 종사관 어른 화살 아닙니까? 어차피 저까지 죽일 요량이셨지요? 그러니 화살까진 신경 쓰실 필요가 없었을 테고 말입니다. 종사관 어른 화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우포도청

    피식 웃은 풍교가 화살을 움켜쥐려 탁자 위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몸을 날린 혜란이 발로 풍교의 팔을 걷어내며 화살을 바닥으로 튕겨냈다. 칼을 뽑은 풍교가 일어섰다. 칼이 바람 소리를 내며 혜란의 귓가를 스치고 탁자를 부쉈다. 몇 걸음 떨어져 몸을 웅크린 혜란이 벽을 박찬 반동으로 풍교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상대 칼이 자신에게 닿기 전 그녀의 발이 풍교의 낭심을 먼저 걷어찼다.

    우포청으로 들어선 혜란은 한참 동안 뜨락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한성부 상관이던 이풍교를 체포해 포도대장에게 넘긴 게 어제 일 같건만 벌써 보름 전 일이었다. 한 식경이나 지나 나타난 포도대장이 혜란 옆에 나란히 서며 느긋하게 말했다.

    “한성판윤 대감과 대화가 길어져 이리 늦었구나. 고생이 참 많았다.”

    입술을 삐쭉 내민 혜란이 물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풍교를 의심하고 계셨는지요?”

    뒷짐을 진 포도대장이 긴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그를 의심한 적은 없다. 다만 좌우포청에 밀주를 고발하는 건수가 폭증해 의아히 여기고 있던 차였다. 나로선 법을 조금 느슨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지. 어지간한 사건은 인정상 봐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무죄 방면해 줬건만, 이번엔 한성부를 통해 고발하는 일이 잦아졌다. 삼득이란 종놈을 주목한 게 그 무렵이다.”

    “쇤네가 한성부 다모로 임명된 때로군요!”

    고개를 끄덕인 포도대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난 유난히 고발을 많이 한 삼득이를 철저히 감시하도록 명령했더랬다.”

    “보상금을 노렸다는 걸 진즉에 파악하고 계셨군요?”

    “그렇다. 서소문 밀주가에서 우포청 포졸들이 널 덮친 건 너와 삼득이를 한패로 봤기 때문이었다. 삼득이 같은 놈들은 밀주를 빚은 사람들에게 일차로 돈을 뜯어내고, 그 직후 관에 고발해 보상금까지 타내곤 했거든.”

    “쇤네까지 의심하진 않으셨는지요?”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이던 포도대장이 입을 열었다.

    “한성부 관원이라는데 뭘 어쩌겠느냐? 믿어줄 도리밖에! 다만 네 생계에 관해 물어본 게 전부였다.”

    환하게 웃던 혜란이 물었다.

    “저보고 어떻게 먹고사는지 꼬치꼬치 캐물은 게 그 때문이셨군요?”

    “그렇다.”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른 혜란이 다시 물었다.

    “이풍교 종사관은 죄를 실토했는지요?”

    팔짱을 낀 포도대장이 천천히 대답했다.

    “너 같은 다모를 이용해 밀주 사건을 한성부에서 직접 관할하려던 교활한 자다. 어찌 쉽게 죄를 토설하겠느냐? 믿는 뒷배도 있을 테고.”

    “그런 간악한 범죄를 사주한 원흉은 누굽니까?”

    우울한 표정이 된 포도대장이 대답했다.

    “그 끝을 아직 알 수 없구나. 앞으로 같이 밝혀보자꾸나. 우선 한성판윤 대감부터 뵈러 가보아라.”

    다모의 탄생

    한성부 관아에서 혜란을 마주한 판윤은 상대를 지긋이 노려보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내 너를 임명한 건 분명 실수였다. 간신 이풍교에게 속은 것이지. 하지만 간신 이풍교를 잡은 것 역시 너였다. 지혜로운 데다 용감하다. 하여 난 너에게 기찰 업무를 계속 맡기려 한다.”

    고개를 조아린 혜란은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판윤이 말을 이었다.

    “밀주 보상금을 노린 이풍교의 조직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고 넓다. 내가 있는 한성부나 조필구의 평시서에만 그치지 않는다.”

    고개를 든 혜란이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어디까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판윤이 대답했다.

    “상감 근처까지다.”

    혜란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판윤이 다시 말했다.

    “그 돈들이 모이는 최종 지점까지 추적해라. 포도대장에게 말해 뒀지만, 넌 이제 포도청 소속이다. 비록 어린 계집이라 하나, 네 손에 조선의 국운이 달려 있다. 알겠느냐?”

    차츰 몸을 세운 혜란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문인 송지양의 ‘다모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고담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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