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주석 연구위원.

조동호 연구위원.
7월의 경제관리 개선조치, 신의주특구 발표 등 내부적으로 진행중인 경제 일정을 감안할 때 대외관계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강경한 태도 등 현 상황은 북한이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북미관계의 앞날을 전망한다면….
|서주석| 역사적으로는 제네바 기본합의 자체가 북미간에 이뤄진 일종의 일괄타결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얼마 안가서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 금창리 지하핵시설 문제가 불거지고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자 한미 양국은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어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추구했는데, 클린턴 정부가 끝나면서 이것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상정해놓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문제 해결의 틀이 없는 상태입니다.
미국은 작년 6월 핵과 미사일, 재래식무기 등 5가지 우려사항을 북한에 전달했고, 북한이 이것을 풀면 ‘대담한 접근’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대북 지원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조건부인 셈인데, 실제 협상과정이나 관계개선의 과정이 어떤 양상이 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미-일간에 새로운 일괄타결 유형의 문제해결 방안을 논의한 다음 북미간에 장기적인 관계개선 내용을 담은 후속 문건을 교환하는 수순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저 이번 핵 위기를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북미간에 장기적인 관계개선 내용까지 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개발을 포기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즉각적이고 가시적이며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즉각적으로 핵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검증 가능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호 모순되는 얘기일 수 있어요.
북한이 지금까지 추진해온 핵계획을 포기하고, 그동안 만든 장비와 시설, 핵물질을 다 파기한 다음에 검증까지 받는다는 것은 스케일이 무척 큰 얘기라는 것입니다.
한편 북한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 독트린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해 불가침조약을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 북미간에 모든 군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협정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기엔 원천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핵태세보고서(NPR)에도 표현된 핵사용에 대한 의지, 대테러전쟁 이후 미국이 취하고 있는 군사전략의 흐름에 반하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국으로선 북한의 불가침조약 제의를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북한이 미국의 수교국도 아닌 마당에 이것을 조약 형태로 체결하기는 곤란합니다.
‘대담한 접근’, 매력없다
문제는 이같이 상반된 두 주장을 어떻게 접목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원인제공자인 북한이 첫 단계를 열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미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검증가능한 방법의 핵 포기는 장기간이 걸리므로, 우선은 북한이 핵개발 철회 의사를 표명하고 미국도 ‘북한이 어느 정도의 의사표명을 할 때 협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식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협상 첫 단계에 다뤄질 내용은 아마도 핵사찰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조동호|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미국은 현 시점에 북한에 대해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라크 문제를 비롯해 벌여놓은 일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10월 초에 켈리 특사가 방북한 것은 북한과 협상을 하거나 향후 북미대화의 조건을 확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가 발가벗고 나올 때까지 우리는 너희와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러 갔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 대화를 재개하는 것을 절실하게 원합니다. 그런 점에서 켈리 특사가 오히려 발목을 잡힌 상황은 아닌지…. 미국은 손을 털고 일어서려는데 북한이 ‘우리가 핵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바람에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서주석| 미국이 이번 기회에 북한 핵문제를 부각시키려 벼르고 있었다는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즉 미국은 8월에 확보한 핵개발 증거를 북한에 들이대 북한이 발뺌을 하면 1999년 금창리 시설을 터뜨린 방식으로 부각시킬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최근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남북관계 및 북일관계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건데, 북한이 오히려 과감하게 시인을 하고 나서자 미국이 당황했다는 겁니다.
아무튼 미국으로서는 지금 북한과 본격 협상을 시작할 국면이 아닙니다. 일례로 미국은 6월에 ‘대담한 접근’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담한 접근’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이 매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북한은 협상의지가 강했습니다. 내부 경제문제를 비롯해 북일 정상회담, 남북관계, 신의주특구 등을 위해서는 국제관계를 우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미국에 제시한 세 가지 조건 중 하나, 즉 북한의 경제발전에 ‘미국이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는 표현이었어요.
그런데 북한이 꼭 핵개발을 시인하는 방식을 택했어야 했느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북한이 가만히 있었다면 결국 일방적으로 백기를 드는 상황으로 갔으리라고 봅니다. 사실 북일 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한 것을 보고 켈리 특사가 방북하면 이와 비슷한 성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본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북한이 특별사찰을 수용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는데, 만약 그렇게 됐다면 미국이 요구한 다섯 가지 우려사항을 북한이 하나씩 수용하는 식의 협상과정으로 이어졌을 공산이 큽니다.
이건 북한에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거꾸로 초강수를 썼습니다. 사실 북한의 핵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된 것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북한의 발표는 허풍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북한이 10월4일 켈리 특사에게 강수를 쓴 것은 잘한 일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후 40일이 지나도록 그토록 대담했던 접근방식의 연장선 상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상황이 계속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