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웨스트미드아동병원 본부 전경.
화재사고로 전신 85%의 화상을 입은 손한주(9) 군에겐 호주 시민권도, 영주권도 없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두 동생은 모두 화마에 휩싸여 사망했다. 한순간에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지난해 9월24일 초저녁, 시드니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캠시 지역의 2층짜리 유닛(한국의 연립주택 형태) 1층에 세들어 살던 손승구(34)씨 집에서 LP가스통이 폭발했다. 현장에서 두 살배기 아기(손사랑)가 숨지고 손씨와 부인 명미라(29)씨, 두 아들 한주와 석주(7)는 전신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한주 외의 가족들은 치료를 받던 중 모두 숨졌다.
1년 후. 한주가 입원한 웨스트미드 아동병원(Westmead Children Hospital)은 그가 완치될 때까지 무상으로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민당국에선 한주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기 위해 행정절차를 밟는 중이고,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사회복지부는 주택부의 협조를 얻어 손가락 10개를 다 잘라낸 한주가 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주택 개조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병원 당국은 한주를 위한 특수침대와 야외용 자동휠체어 및 실내용 수동휠체어도 제공할 방침이며, 보호자인 외할머니와 삼촌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교사를 모집하고 있다.
시드니 서부에 자리잡은 웨스트미드 아동병원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의료시설을 자랑한다. 3000여 명의 의료진이 근무하는 이 병원은 예산의 11% 정도를 각계에서 보내오는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영주권도 없는 한주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것도 다 기부금 덕분이다. 이처럼 국적을 초월해 인술을 베푸는 웨스트미드 아동병원을 위해서 호주 한인동포사회도 기부금 모금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실정법도 뛰어넘는 인술
웨스트미드 아동병원은 명실공히 인술(仁術)을 펼치는 병원으로 정평이 난 지 오래다. 이곳은 어린이 환자라면 인종과 계층을 뛰어넘어 최선을 다해 치료한다. 그러나 그런 치료행위가 인도주의나 박애정신으로 거론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의사로서 직분을 다하는 것이며 생명윤리를 존중할 따름이라는 주장이다.
이 병원은 NSW주 정부 예산으로 운영된다. 호주 국민이 아닌 한주를 위해 16억원의 정부 예산을 치료비로 사용하는 것은 엄연한 실정법 위반. 그러나 웨스트미드 아동병원이 좌고우면(佐顧右眄)하지 않고 인술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정부에서 출연한 예산말고도 일반 시민이나 사회단체로부터 받는 자선기부금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유명인들이 자선모금에 솔선수범하는 사례는 아주 흔하다. 특히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이 적극적이다. 러셀 크로, 니콜 키드만 같은 세계적인 배우와 골프선수 그렉 노먼, 수영선수 이안 소프 등도 웨스트미드 아동병원의 성금모금 대열에 함께했다. 이렇게 모인 성금은 앞서 밝힌 대로 정부 예산을 집행할 수 없는 경우에 유용하게 활용된다.
한주를 문병하고 할머니에게 소정의 성금을 전달한 백낙윤 시드니 한인회장은 “그동안 50만달러 이상의 치료비가 들었으며, 향후 10년간 계속 통원치료가 요구되기에 적어도 200만달러의 치료비가 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한주의 화상치료를 책임지고 있는 화상치료 전문의 존 하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주에게 하루 평균 5.5명의 의료진을 배치, 24시간 대기상태로 치료에 임하고 있다. 한주의 피부이식 수술을 위해 화상치료로 유명한 콩코드 병원의 협조를 얻고 있으며, 멜버른에 소재한 피부은행에서 이식 피부를 제공받고 있다. 콩코드 병원의 존 반데포드 박사는 피부 배양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며, 그의 주도로 한주에게 이식될 피부가 콩코드 병원에서 배양되고 있다. 이러한 치료과정엔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액의 경비가 들고, 치료기간도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