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일본열도를 울린 야마이치증권 사장의 통곡

  • 권순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입력2006-12-27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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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말 일본 서점가에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선을 보였다. ‘잃어버린 10년’이란 2차대전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1980년대 말까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달려오던 일본이 급격히 추락한 1990년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들에서 일본의 각계 전문가들은 ‘전후 세계경제의 최우등생’이던 일본이 왜 90년대에 몰락했으며, 부활의 전략은 무엇인가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90년대 중에서도 97년부터 99년까지의 3년 간은 일본의 위기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97년 본격화한 내수 침체와 금융 불안은 한때 ‘일본발 세계공황’의 우려까지 불러일으켰다. 엔화 가치와 주가의 동반폭락이 아시아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 경제위기는 공고해 보이던 하시모토 류타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오부치 게이조 정권을 탄생시켰다. 99년부터 일본경제가 다소 회복조짐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90년대 말의 3년 간은 한일관계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난 시기였다. 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양국 관계는 최소한 정부 차원에서는 ‘새로운 동반자 관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국민 차원에서도 진정한 우호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일 어업협정을 둘러싼 숨가쁜 줄다리기와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편입에 따른 경제위기도 이 기간에 있었다.

    필자는 97년 2월 중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일을 시작했다. 우연히도 97년은 한일 양국의 경제위기가 본격화한 해였다. 이 때문에 전후 최악으로 불리는 90년대 말 일본 경제위기와 한일관계의 중대한 전환기를 다른 사람보다는 비교적 생생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렇게 특별한 기간에 일본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돌발변수가 없는 한 ‘초읽기’에 들어간 귀국을 앞두고 3년 간의 도쿄생활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려고 마음 먹게 됐다.

    97년 11월 한 달의 특별한 의미



    97년 11월은 일본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달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전후 일본경제를 지탱해왔던 금융시스템이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린 시기였다. 이달 초 일본 상장증권사로는 처음으로 산요증권이 회사갱생법 적용(한국의 법정관리)을 통해 사실상 도산했다. 이어 100년의 역사를 자랑해온 홋카이도척식은행이 도시은행(시중은행) 중 최초로 무너졌다. 이 은행의 도산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1주일 뒤인 11월24일 일본 4대 증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이 경영난으로 자진폐업을 결정했다. 세 금융기관의 붕괴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깊숙이 파고들면 결국 80년대 거품경기 때 발생한 부실채권이나 자산 등의 거품 후유증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서 경영난이 악화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야마이치증권의 도산은 일본 금융구조를 뿌리채 뒤흔들 만큼 커다란 파문을 낳았다. 자진폐업 결정 당시 회사의 부채규모는 3조2000억엔(계열사 포함하면 6조3000억엔), 고객예탁금 규모는 23조9600억엔으로 전후 최대 규모의 도산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등지에서도 야마이치증권 도산은 주요 신문의 1면 머릿기사와 방송의 헤드라인뉴스를 장식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일본 경제에 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커질 때였다. 야마이치증권 도산은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필자가 도쿄에서 일하는 동안 지겨울 정도로 자주 써야 했던 일본 경제 관련 시리즈기사를 처음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야마이치증권 도산을 떠올리면 지금도 한 장면이 뇌리에 선명하다. 11월24일 자진폐업 신청결정을 발표한 노자와 쇼헤이 사장의 기자회견 광경이다.

    처음에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는 “사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저를 포함한 경영진이 나빴습니다. 사원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7500명의 사원과 그 가족을 생각하면 괴롭고 미안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선량하고 능력있는 우리 직원들의 재취직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라며 울부짖었다. 물론 그런다고 그가 경영파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야마이치증권 사원 중에도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60세에 가까운 사나이가 직원들의 앞날을 부탁하며 통곡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찡했던 것도 사실이다.

    야마이치중권 도산은 가뜩이나 불안 조짐을 보이던 엔화 가치와 닛케이주가를 동반폭락세로 몰아넣었다. 일본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자금을 투입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디스를 비롯한 국제신용평가기관은 일본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기관의 신용등급을 낮춘다고 차례차례 발표했다. 98년에도 일본 금융불안은 국제사회의 핫이슈로 1년 내내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일본 열도 엄습한 ‘하시모토 불황’

    금융 불안과 함께 내수 침체에 따른 심각한 불황도 일본열도를 엄습했다. 내수 부진의 직접적 계기는 97년에 하시모토 내각이 취한 일련의 재정 재건정책. 하시모토 내각은 97년 4월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한 것을 비롯해 이 해에 보험료 본인 부담분 인상, 공공투자 축소 등의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90년대의 잇따른 경기부양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시모토 내각의 재정재건은 결국 대실패로 끝났지만 방향 자체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타이밍이었다.

    여기서 잠시 90년대 일본경제의 궤적을 살펴보자. 일본의 90년대는 80년대 후반 거품경기의 붕괴로부터 시작됐다. 거품이 꺼지면서 90년 1월부터 3월까지 석달간 닛케이주가가 1만엔 가까이 급락했다. 같은 해 여름부터는 땅값도 급전직하했다. 이른바 ‘자산붕괴’의 신호탄이었다. 거품경기 속에 흥청댄 ‘파티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92년부터 ‘헤이세이(현재 일본 연호) 불황’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이 시작됐다. 일본정부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때인 92년 8월 10조7000억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불황 타파를 위한 적극적인 재정지출에 나섰다. 이에 힘입어 95∼96년 일본 경제는 회복조짐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95∼96년의 경기회복은 응급환자에게 앰풀주사를 놓아 잠시 기력을 되찾게 한 것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잠시 햇볕이 내리쬐는 ‘인디언 여름’과 같은 것이었는데도 일본은 겨울이 완전히 지난 것으로 착각했다.

    거품경기 때 대출을 방만하게 했던 금융기관들은 거품경기 붕괴로 떠안은 부실채권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 국민들 역시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국민 부담을 늘리는 일련의 재정 재건정책은 소비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부와 금융기관 그리고 기업은 문제 해결을 미루기만 했다. 주가와 땅값이 다시 오를 것이라는 안이한 기대 때문이었다. 정부는 불황의 근본원인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적자국채에 의존하는 경기부양책을 잇따라 내놓아 재정적자만 늘렸다. 그나마 부양책은 정치권과 관료의 이해를 반영해 구태의연한 공공사업확대에 집중투입됐다. 정보통신산업과 생명공학, 환경산업 등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극히 미미했다.

    더 큰 문제는 경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잘못된 상황판단이었다. 소비세율 인상으로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던 97년 7월 일본 경제기획청이 내놓은 ‘97년 경제백서’는 당시 일본 정부가 얼마나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제백서는 “일본경제는 90년대 초반 일본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거품경제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개인소비와 설비투자 등 민간주도에 의한 자율회복이 본격화했다”고 선언했다. 또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소비세율 인상 및 공공투자 억제로 경기회복 속도가 일시적으로 둔화하더라도 지속적 경제성장을 막을 만큼 큰 영향은 없다고 단언했다.

    지나와서 생각해보면 엘리트 관료들이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분석을 했을까 의아할 정도지만 당시의 일본 분위기는 그랬다. 하시모토 총리는 금융불안과 내수침체가 누구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였던 97년 10월까지도 “일본 경제의 문제점은 일시적이며 곧 회복 기조로 돌아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정 재건법률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금융불안이 극심했던 97년 11월이었다. 일본에서 ‘하시모토 불황’이란 말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경제실정으로 침몰한 하시모토 내각

    필자는 이 과정을 취재하고 기사를 송고하는 과정에 많은 교훈을 얻었다. 우선 정책, 특히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명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시기 선택이라는 점이다. 하시모토 총리는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소비세율 등을 인상했다. 그러나 결국 경기만 망친 것은 물론 98년 4월 16조6500억엔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아 재정적자를 더 늘렸다.

    정부가 내놓는 관변자료의 한계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새삼 깨달았다. 일본 정부는 97년 경제백서 발표 후에도 계속 월례 경제보고서 등을 통해 일본 경제 침체는 일시적이며 곧 자율적 회복 기조에 접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한국보다 관료의 질이 높다는 일본이 이랬다. 일본 관료들보다 권력을 훨씬 더 의식하는 한국 관료나 관변연구소의 경우 그 위험성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최근 3년간 도쿄에서 송고한 기사 스크랩을 정리하다 97년 일본 경제백서를 소개한 기사를 보면서 앞으로 기자생활에 뼈아픈 교훈으로 삼을 것을 다짐했다.

    98년 7월12월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참패했다. 참의원 정원 252명중 절반인 126명을 새로 뽑은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44석을 얻는데 그쳤다. 교체대상 의석 중 선거전에 보유한 61석과 비교해도 17석이나 줄어들었다. 참의원 전체 의석으로 따지면 자민당은 선거전 119석에서 102석으로 격감했다. 임기를 1년2개월 남겨 놓고 있던 하시모토 총리는 선거에 파하자 책임을 지고 전격사퇴했다.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던 당일만 해도 자민당 참패와 하시모토 퇴진을 예상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경기침체와 금융불안이 가중되긴 했지만 권력에 순종적이고 변화를 본능적으로 꺼리는 일본 국민의 보수적 성향을 감안하면 교체대상 의석 중 최소한 60석 이상, 많으면 절반 이상을 획득하리라던 것이 일본 언론의 지배적 관측이었다. 그러나 투표가 끝난 밤 8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각 방송이 출구조사를 통해 예상한 선거결과는 ‘국민의 반란’을 예고했다. 많은 일본 국민이 “하시모토 내각의 경제실정(失政)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야당에 표를 몰아달라”는 민주당과 공산당 등 야당에 몰표를 던졌다. 사회당(현 사민당)이 선풍을 일으킨 88년 참의원 선거에 견줄 만한 이변이었다.

    야당의 선전과 자민당의 참패를 불러온 또다른 요인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투표율이었다. 하시모토 내각에 불만을 느낀 부동층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가면서 투표율은 3년 전 실시한 참의원 선거 때보다 14%포인트 이상 높아져 58.8%에 이르렀다.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이용해 고정표로 승리를 거두려던 자민당의 선거전략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하시모토는 최종 개표결과가 나오기도 전인 7월13일 새벽 선거결과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시모토의 실패는 정치지도자의 인기가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96년 1월 총리에 취임한 하시모토는 취임 초기 지지도 60%를 넘는 인기를 누렸다. 오부치파 소속인 그는 일본 정치지도자로는 보기 드물게 논리적인 언어 구사 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96년 10월의 중의원 선거도 승리로 이끌어 장수총리가 될 것 같아 보였다. 중의원 선거때 필자는 3개월간의 단기 일본어연수를 위해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자민당후보의 선거홍보물에는 예외없이 하시모토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후보 개인보다는 총리의 인기를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7년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하시모토 내각의 경제대책은 ‘너무 늦고 너무 적다(Too late, too little)’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실패가 명백한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교묘한 논리로 호도하려던 하시모토는 국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컨설팅업체 대표인 호리 고이치는 “지도자의 덕목은 설득력 있는 꿈과 비전인데 하시모토에게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실망감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졌다”고 분석했다.

    인기가 급락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하시모토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게 됐고, 그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민심의 변화는 잘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격랑으로 변해 커다란 배(권력)도 엎어버리는 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시모토의 중도 퇴진 후 초점은 다음 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였다. 자민당이 참의원선거에서 참패했지만 중의원에서는 여전히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민당정권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7월30일 실시된 자민당 총재선거는 바로 총리선거이기도 했다.

    자민당 총재선거에는 오부치파 보스인 오부치 당시 외상(현 총리)을 비롯해 가지야마 세이로쿠 전 관방장관,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생상 등 3명이 출마했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거침없는 발언과 소신으로 자민당 내 이단아로 꼽히는 고이즈미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일본 정치, 특히 자민당 정치를 결정짓는 것은 파벌의 역학관계였다. 뚜렷한 특징이 없어 ‘평화시의 총리감’으로 평가받아온 오부치는 최대 결국 파벌인 오부치파 보스라는 점과 당직 및 각료인사에서 보은(報恩)을 기대한 다른 파벌의 지지에 힘입어 1차투표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날밤 오부치정권이 출범했다.

    자민당 총재선거 당시 필자는 팔자에 없는 일본 TV의 취재대상이 됐다. 한 민간방송이 이날밤 뉴스시간에 선거 특집방송을 하면서 세 후보 진영의 하루 표정과 함께 이 선거를 다루는 미국과 한국 언론사 특파원의 인터뷰 및 취재 장면을 담겠다는 전화신청에 별생각 없이 응한 것이 ‘화근’이었다.

    필자가 취재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전적으로 회사(동아일보) 때문이었다. 회사 자랑이어서 계면쩍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동아일보는 다른 한국신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 배운 사람 치고 동아일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권위지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취재신청을 받아들일 때만 해도 30분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오후 2시쯤 사무실을 찾아온 방송제작팀은 무려 7시간 가량이나 사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개표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등의 질문을 하더니 결과가 판가름나자 필자가 생각하는 오부치정권의 과제를 인터뷰했다. 필자가 서울 본사와 통화하는 광경은 물론 저녁 7시경 서울시내에 배달되는 다음날 조간신문 초판이 나온 뒤 동아일보에 실린 관련기사를 팩시밀리로 받는 장면까지 방영됐다. 아마 필자가 그때만큼 오랫동안 텔레비전 방송을 타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 유창하지도 않은 일본어로 인터뷰에 응한 ‘만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IMF위기의 서곡

    97년은 한국경제가 처절히 몰락한 한 해이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 경제에 영향력이 큰 나라인데다 일본에는 한국기업 주재원도 많아 필자는 일본에서 한국경제위기의 파장을 피부로 실감했고 ‘일거리’도 많았다. 특히 IMF 위기의 후유증이 극심했던 98년에는 알고 지내던 한국 기업 해외주재원들이 잇따라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본에 온 지 3개월밖에 안 된 직원이 짐을 풀기가 무섭게 귀국명령을 받아 서울로 돌아간 사례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 경제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위기를 알리는 징조는 있었다. 다만 당시 한국사회 전체가 다가오는 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대통령선거라는 특수상황으로 정치논리가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시기라는 점도 상황인식을 안이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필자는 97년 3월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금융기관 관계자들로부터 “한보사태 등의 여파로 일본 금융기관들이 한국계 금융기관이나 기업에 신규대출을 기피하고 기존대출도 조기회수한다”는 푸념을 들었다. 몇 곳을 취재해보니 거의 모든 한국 금융기관이 갈수록 심각한 ‘돈가뭄’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었다. ‘코리언 프리미엄’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한국 은행지점장들의 일과는 일본 금융기관을 찾아다니며 ‘돈 구걸’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도쿄 금융계에서 한국 금융기관들이 직면한 자금난 비상을 97년 3월15일자에 도쿄발 스트레이트와 해설 박스기사로 보도했다. 이어 3월21일자에는 경제부 기자들과 해외특파원들이 진단한 국내외 금융위기 실태가 ‘위기의 한국금융-부실 총점검’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8개월 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 만큼 한국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인식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명색이 경제부기자 출신이었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금융기관의 고통을 현장에서 보면서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기의 서곡이었는데도….

    한국 경제위기는 왜 왔을까.

    “IMF 위기는 한국이 자초한 것”

    일본의 한국경제 전문가인 후카가와 유키코 당시 일본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 주임연구원(현 아오야마대학 경제학부 조교수)는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결정하기 직전인 97년 11월21일 필자와 전화인터뷰를 하며 “한국 경제위기는 외국투자가들이 핫머니를 빼 감으로써 통화위기가 발생한 동남아와 성격이 다르며 한국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는 성격이 짙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벌그룹의 무리한 신규사업 진출 등에 따른 자금시장 경색이 초래한 연쇄적 악순환을 위기의 근본원인으로 지적했다. 또 경제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데도 정계 관료 금융계 노조 등이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해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강조한 바 있다(97년 11월22일 동아일보 보도).

    97년 당시 여야 정치권은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국정 최고책임자인 YS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여야 대통령후보였던 이회창씨나 DJ가 기아자동차 문제 처리 등 경제현안에 대해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냉정한 검증과 평가가 필요하다. 또 노동법 개혁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노조가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시간을 낭비한 결과 누적된 문제는 DJ 정부에 들어와 노동자의 고통을 더욱 심화지켰다. 언론 역시 경제위기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문제점을 찾는 일본 전문가들도 있었다.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게이오대)는 한국이 국가적 위기에 빠진 주요 원인으로 허세와 오만을 지적하며 경제발전의 허구에 도취해 내실보다 외형에 치중하는 경향이 각 분야에서 나타나면서 해외에서 눈총을 받는 일이 많았다고 꼬집었다. 또 4년간 한국 근무 경험이 있는 마쓰모토 다카시(마루베니상사 아시아·오세아니아주 실장)는 98년 4월 동아일보 도쿄지사 주관으로 열렸던 한일 40대 경제전문가 특별대담(신동아 98년 5월호 보도)에서 “한국 금융기관 및 정부기관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 같다”며 “원칙에 따라 대출이 이뤄졌다면 은행들이 대량의 부실채권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98년 1월23일 일본 정부는 65년 체결된 한일 어업협정을 사실상 파기한다고 한국에 통고했다. 일본의 어업협정 파기통고는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자민당내 수산족(水産族) 의원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의 대결에서 강경파가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특히 일본측은 한일 양국 정부가 잠정적으로 합의한 협상안을 정치권의 요구에 밀려 무시하고 이를 일방 파기하는 결정으로 몰아가는 강수를 보였다.

    일본의 협정 파기 통보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시기적으로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98년 1월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DJ가 취임하기 전인 권력 공백기였다.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기 전에 힘이 떨어진 YS 정부가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동안에 골치아픈 문제를 털어버리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이 IMF 위기를 겪는 상황을 악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했다.

    일본 외무성은 파기 통보 직후 이례적으로 한국 언론사 도쿄특파원들을 외무성으로 초청해 일본의 상황을 설명한 뒤 “이번 결정이 협상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한국의 금융위기를 이용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 역시 한국내에서 그런 반발이 나올 것을 우려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일본이 어업협정 발효문제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결국 어업협정 파기라는 최종카드를 꺼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국에 대한 파기 통보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DJ 정부 출범후 본격화한 신어업협정 체결교섭은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중간수역의 동쪽 한계를 어디로 할 것인지와 양국이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 주변 해역의 처리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쉽게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98년 10월로 예정됐던 DJ의 일본 공식방문을 앞두고 어업협정 문제는 양국간 최우선 현안이 됐다. 기존 어업협정 만료가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온 데다 DJ 정부 출범 후 본격화한 한일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도 더 이상 어업협정 문제를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공은 양국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피 말리던 신어업협정 체결협상 취재

    98년 9월24일 DJ의 신임이 두터운 김봉호 국회부의장(국민회의)과 김선길 해양수산부장관(자민련)이 마지막 담판을 위해 도쿄로 날아왔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자민당 수산족의 대부격인 사토 고코 국제어업문제특별위원장 및 나카가와 쇼이치 농림수산상과 개별 및 합동회담을 가졌다. 김부의장과 사토 의원 사이에 사실상 정지작업이 끝났다는 관측도 나왔다.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쿄특파원들은 외곽취재를 통해 파악한 내용을 근거로 오후 4시반경 마감되는 조간신문 초판에 ‘한일 어업협정 사실상 타결’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냈다. 일부 한국 신문은 아예 ‘한일 어업협정 타결’이라는 단정적 보도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협상이 시작되자 상황은 전혀 달라졌다. 오후 6시에 도쿄시내 뉴-오타니호텔에서 열리기로 예정됐던 4자 회담은 한국측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나카가와 농수산상의 고집으로 1시간 반이나 늦게 시작됐다. 그나마 회담에 들어가서도 양측의 주장이 대립해 언제 타결이 될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회담이 난항을 겪자 사토 위원장이 오부치를 만나기 위해 총리관저로 떠났다. 밤 10시반경에는 김부의장도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온 사토와 함께 총리관저로 갔다. 협상에 오부치가 직접 개입한 셈이 됐다.

    난감한 것은 회담장 밖에서 기다리던 한국 기자들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하면 이날 밤에 어떤 형태로든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높았다. 김부의장 일행은 9월25일 서울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고 시기적으로 DJ 방일 전에 추가협상이 다시 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 상황은 오히려 결렬을 향해 치닫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신문제작 마감시간과 독자들이 막상 신문을 읽는 시간 사이의 시차라는, 신문기자의 숙명적인 딜레마까지 겹쳐 있었다.

    일본 신문의 경우 진행중인 협상에 대해서는 각 판 마감시간까지의 상황만 충실히 전달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졌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한국 신문은 독자가 신문을 읽는 시점을 감안해 기사를 쓴다. 일본 기자 흉내를 내다 결과적으로 낙종을 할 경우 무능한 기자 소리를 듣기가 십상인 것이 한국 언론의 실상이다. 그렇다고 9월25일 아침까지 협상이 타결될 것으로 전망하고 섣불리 추측기사를 썼다가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엄청난 오보가 되는 셈이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은 이날밤 몇차례에 걸쳐 판갈이(여러차례 있는 제작 마감시간에 맞춰 기사를 수정하는 일)를 했다. 가장 큰 고민은 조간신문의 인쇄부수가 가장 많은 서울시내판(동아일보의 경우 45판)이었다. 마감시간(밤 12시경)은 다가오는데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일본 총리관저로 떠났던 김부의장은 호텔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필자는 어업협상 문제 때문에 일부러 회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당시 최맹호 국제부장(현 경영지원국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상의한 뒤 ‘사실상 타결’의 기조는 지키되 “협상은 마지막까지 진통을 겪었다”라는 표현을 넣었다.

    국가간 협상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 최종판 마감을 끝냈다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기자들은 줄담배를 피우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호텔 현관으로 김부의장을 태운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온 것은 9월25일 새벽1시를 이미 넘긴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한일 양국이 새 어업협정 체결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며 오늘중 결과를 공식발표하겠다”고 짤막하게 말한 뒤 묵고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필자는 휴대전화로 국제부 야근기자를 찾은 뒤 “야간국장(신문사에서 편집국장 퇴근후 야간상황을 책임지는 부국장 또는 부장)께 빨리 말씀드려 ‘돌판(정상제작 최종마감후 긴급상황 발생시 만드는 신문)’ 준비해”라고 악을 쓴뒤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이날 씁쓸한 에피소드 하나. 저녁 내내 협상장을 지키며 취재하던 A신문 기자는 협상상황이 진통을 겪자 고민 끝에 서울시내판에 ‘협상결렬’로 기사를 바꿨다. 당시 협상장 주변 분위기로는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일이었다. 반면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특파원이 협상장 주변에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B신문은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시종일관 ‘협상타결’로 보도했다. 결과적으로 새벽까지 기자가 현장을 지킨 A신문은 독자들이 신문을 읽는 시점에는 오보를 한 반면에 취재를 소홀히 했던 B신문은 고민을 하지 않고도 정확한 기사를 쓴 셈이 됐다. 성실한 취재로 정평이 있던 A신문 기자는 새벽 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야간에 현장취재를 하지 않겠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뒤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그가 야간취재에 나오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지금 일본인들을 상대로 외국 지도자 이미지 조사를 한다면 어떻게 나올까. 단언하긴 어렵지만 아마 DJ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감을 가진 일본인이 많은 반면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일본인이 싫어하는 외국원수 상위에 속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두 사람에 대한 일본인의 호오(好惡)를 가른 결정적 계기는 98년 10월(DJ)과 11월(장쩌민)의 방일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를 겨냥한 두 정상의 메시지는 너무나 달랐다.

    DJ는 일본에 대한 햇볕정책을 통해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한일간 풀리지 않는 숙제인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피했다. 대신 전후 일본의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했다. 양국 공동선언에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하는 대신 한국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짓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대일관계에서 명분을 주장하기보다는 유화정책을 통해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일본제품 수입금지조치 해제도 같은 맥락이었다.

    반면 장쩌민은 정반대의 자세를 취했다. 그는 오부치와 정상회담 후 발표한 공동선언에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명백한 반성과 사과문구가 명기되지 않은 데 반발해 서명을 거부했다. 일본측은 “중국이 한국 정부처럼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짓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겠다면 중일 공동선언에 사과문구를 넣겠다”는 쪽이었다. 이에 대해 장쩌민은 “역사 문제에 일단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응수했다.

    장쩌민은 아키히토 일왕 주최 만찬에서도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는 대외 침략전쟁이라는 잘못된 길을 걸어 중국과 다른 아시아 인민에게 큰 재난을 주었다”고 공격했다. 이어 ‘과거를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이 되게 하라’는 중국격언을 소개한 뒤 “우리는 이 아픈 역사의 교훈을 영원히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쩌민의 답사가 계속되는 동안 만찬장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일왕을 바로 옆에 앉혀 놓고 이처럼 직설적으로 일본의 과거를 추궁한 외국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그의 일본비판에 우익세력은 물론 필자가 알고 있는 비교적 양식있는 일본 지식인들 중에도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반감을 나타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DJ와 장쩌민의 상이한 대일 접근은 과거와 역전된 측면이 없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이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명분에 집착했다면, 중국은 역사 문제를 강조하지 않으면서 실리를 취하는 전략을 주로 써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상황이 뒤바뀐 데는 98년이라는 시점이 한국에는 IMF 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의 협력이 절실했던 반면 중국은 미일 군사협력 강화에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는 시기적 특수성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일본 보수우경화에 대한 장쩌민의 공격

    필자는 DJ 정부의 대일정책 전환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일 두 나라가 언제까지나 ‘가깝고도 먼 나라’로 남아있는 것은 양국 모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반일감정과 일본의 염한(厭韓)감정이 계속 평행성을 긋는 악순환을 끝낼 필요는 있다. DJ 방일 후 한국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이미지가 종전보다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물음표는 남는다. 한일 정부가 새로운 협력관계를 말한다고 정말로 등신대의 우호가 가능한 것인가. 물론 일본에는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양심적인 세력이 있다. 하지만 재일동포는 물론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일상생활에서 많든 적든 겪어봤을 일본 사회의 한국 등 다른 아시아인에 대한 은근한, 또는 노골적인 냉대와 멸시는 지금도 여전하다. 더구나 매년 조금씩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는 듯한 일본 사회의 보수우경화와 일부 우익세력의 노골적인 과거사 정당화를 지켜보면서 진정한 한일우호가 가능한지 회의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90년대 후반에 일본 사회에 보수우경화 분위기가 확산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장기 경기불황으로 앞날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이 팽배해지면서 무언가 확실하게 의지할 것을 찾으려는 심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등장하기 직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유사한 사회상황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등에 업고 우익성향 신문 및 잡지(특히 일본 잡지 중에는 우익성향이 많다)는 노골적으로 과거사 정당화를 부추겨왔다. 98년에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야말로 인류가 획득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우익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장편만화가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일본 보수화에 대한 장쩌민의 공격은 한국을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이 없지 않다. 어차피 국력이 말을 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논리 속에서 한국보다는 중국의 대일 견제력이 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한 중국 기자는 “이제 한국에서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나 우경화가 더 이상 언론의 이슈가 안되는가”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필자가 “그렇지 않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하든 간에 한국 언론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일본 우익세력의 준동에 대해서는 지금도 신경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대답했다. 그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중국 기자들은 요즘 중국만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약소국 기자’의 비애와 행운

    한일간 국력의 차이는 상대국에 주재하는 특파원들과 주재국 정부 고관들의 접촉 기회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에서 일본 언론사 서울특파원이 한국 정부의 장관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일본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한국 언론은 총리는 물론 주요 각료들을 만나 회견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각료급이 아니라 중앙부처 국장급만 돼도 서면으로 인터뷰를 신청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겨우 인터뷰가 성사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약소국 기자’의 비애를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오부치 총리와 고노 요헤이 외상, 사카이야 다이치 경제기획청장관을 만나 회견할 수 있었다는 점은 적어도 일본에서는 행운이다. 오부치는 99년 3월 방한에 앞서 총리관저에서 한국특파원들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전임 하시모토 총리 때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사카이야는 일부 외국언론사 특파원들과 함께 99년 8월 장관집무실에서 만났다. 99년 10월20일 회사 선배인 심규선특파원과 함께 일본 외상 집무실에서 만난 고노 외상 인터뷰는 동아일보의 단독회견이었다.

    자민당 내 비둘기파를 대표하는 중진인 그가 평소 한국과 동아일보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데다 그의 비서와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이례적으로 가능했다. 현직 일본 외상이 한국 언론의 단독회견에 응한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외무성측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측에 “동아일보 단독회견에 외상이 응해도 괜찮겠느냐”는 문의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뒤에 전해 들었다.

    세 사람과의 회견은 각각 길어야 한 시간 정도였다. 따라서 깊이있게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피상적인 관찰이라는 한계를 전제로 말한다면 세 명 모두 좋은 인상이었다.

    ‘인품의 오부치’와 고노 외상

    우선 오부치는 ‘인품의 오부치’라는 별명에 걸맞게 소탈했다. 특히 공식회견을 마친 뒤 옆방으로 옮겨 도시락으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보여준 격의 없고 사람을 끄는 태도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가 어떻게 경제대국 일본의 총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다만 그가 99년 9월 자민당총재에 재선된 뒤 다소 독선적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권력의 그늘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또 국기 및 국가 관련 법안 통과 등 보수화를 촉진하는 각종 법제화를 서두르는 데서 다소 경계할 필요가 있는 정치인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명한 작가 겸 경제평론가 출신인 사카이야는 듣던 대로 역시 논리가 명쾌했다. 어떤 질문이 나와도 답변이 궁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기업의 중견간부가 꼽은 21세기 일본경제를 내다보는 최고의 논객으로 꼽히기도 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논객 사카이야 팬이기도 해서 그와 인터뷰하며 일본 및 세계 경제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 셈이었다.

    고노 외상도 시원시원했다. 거물 정치인이라는 배경이 있어서인지 다소 미묘한 질문이 나와도 소신을 막힘 없이 털어놓았다. 특히 한일간 교류를 저해하는 한 요인으로 언어 장벽을 들면서 두 나라 국민들이 서로 간단한 상대국 언어는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상당한 공감이 갔다.

    일본은 오부치정권 출범 후의 적극적인 경기부양과 금융불안 해소정책 등에 힘입어 99년부터 다소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97회계연도(97년 4월∼98년 3월) 이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 머물렀던 경제성장률은 99회계연도에는 소폭이나마 플러스로 돌아설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일본 경제 부활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두드러진다. 특히 일단 방향이 잡히면 무섭게 돌진하는 일본 사회의 특징과 여전히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는 제조업의 건재는 일본에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본격적인 회복기조에 들어설 것인가는 아직 불투명하다. 일본의 ‘새로운 도전’이 어떤 결실을 거둘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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