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 공영TV방송 ‘PBS 프런트라인(PBS Frontline)’의 특집프로그램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간전쟁 핵심 5인을 단독 인터뷰해 아프간전쟁의 내막을 파헤쳤다.
- 이 특집물은 9·11테러 뒤 부시행정부의 위기 대처방식이 어땠는지, 아프간에서 미 CIA와 특수부대가 어떤 일을 했는지, 파키스탄 무샤라프 장군이 아프간전쟁에 협조하면서 미국에 어떤 요구를 했는지, 오사마 빈 라덴을 왜 붙잡지 못했는지, 카르자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아프간 새 지도자로 떠올랐는지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편집자).
파월 미 국무장관은 레이건 행정부에서부터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국가안보보좌관(1987∼89년), 합참의장(1989∼93년)을 지낸 인물이다. ‘PBS Frontline’과의 인터뷰에서 파월은 9·11테러 뒤 이라크를 공격목표로 설정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미 행정부 내에서 벌어진 토론에 대해 언급했다. 아울러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장군을 포섭하기 위해 그에게 부채 탕감을 약속했음을 밝혔다.
2001년 9월11일 아침, 파월 미 국무장관은 페루 리마에서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과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미-페루 양국 무역관련 현안과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 헌장에 서구식 민주주의 조항을 삽입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파월의 증언.
“톨레도 대통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내 비서가 쪽지를 전해줬다. 비행기 한 대가 세계무역센터에 부딪쳤고 두번째 비행기가 부딪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톨레도 대통령에게도 같은 내용의 쪽지가 전달됐다. 우리 두 사람은 앞서의 논의들을 이어가려 했으나, 다시 두번째 쪽지가 전해졌다. 그걸 읽고 테러라는 걸 깨달았다. 조찬회동은 깨졌고, 나는 비서에게 ‘바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을 잡아라’고 지시했다.”
파월이 페루를 떠나 워싱턴에 닿기까지는 8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안에서는 전화통화도 잘 안돼 답답했다. 국무부 부장관 아미티지와 두어 번 짧은 통화를 하다 끊어졌을 뿐이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했다. 나는 한때 미 합참의장이었지만 지금은 미 국무장관이지 합참의장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외교가가 아닌 군사전문가의 시각에서 사태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끔찍한 위기상황에 미국은 어떤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워싱턴에 닿은 파월은 곧바로 백악관으로 갔다. 그곳 상황실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 그의 핵심참모들과 마주앉았다. 파월의 증언.
“나는 9·11테러가 우리 미국에 전세계적인 연합전선을 이룰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안보리가 곧 소집될 것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회원국이 공격을 당했을 경우 상호방위를 규정한 5조항을 적용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9·11테러의 용의자인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간에 있다는 사실에 바탕해 파키스탄이 중요한 구실을 맡게 될 것이란 얘기도 나눴다.”
캠프 데이비드 모임의 결론
나흘 뒤인 9월15일 부시 미 대통령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그의 핵심참모들을 소집했다. 테이블 중앙에 부시가 앉고 그를 사이에 두고 체니 부통령, 파월 국무장관이 앉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파월 옆에 앉았다. 파월의 증언.
“캠프 데이비드 모임의 목적은 미국이 정치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처음 몇시간은 각자가 준비해온 아이디어를 브리핑했고, 부시 대통령이 이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자유토론이 이어졌다. 이 회의가 열리기 전 우리는 이미 영국·파키스탄을 비롯한 주요국들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정치적 연합이지만, 곧 군사적 연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회의 참가자들은 이런 국제연합이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동적(fluid)인 연합이란 측면을 깨닫고 있었다.”
캠프 데이비드 모임에서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이라크를 공격목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파월은 반론을 폈다. 이와 관련한 파월의 증언.
“당시 나는 이미 드러난 범죄자들에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아프간에 있고 탈레반의 지원을 받는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이다. 물론 이라크도 위험한 체제지만 당장은 이라크를 다루지 말자, 알 카에다를 쫓아야 전세계가 미국을 납득할 수 있다는 내 주장에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월포위츠 부장관이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그의 요점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면 지금이 좋은 때 아니냐’는 것이었고, 우리 모두 그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내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 공격도 고려할 수 있다는 중간적인 입장이었다. 이어 체니 부통령, 조지 테닛 CIA 국장 등의 견해를 듣고난 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간에 숨어있는 가해자들을 먼저 처리한 뒤 이라크 문제를 다루자’고 결론을 냈다.”
전쟁 초반 지지부진에 백악관 초조
한달 뒤인 2001년 10월 중순 파월은 파키스탄을 방문, 무샤라프 장군(대통령)과 마주앉았다. 10월7일 아프간 공습이 시작되고 1주일 뒤였다. 당시 무샤라프 장군은 아프간전쟁으로 인한 파키스탄 내의 정세불안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한 파월의 증언.
“당시 상황은 무샤라프 장군에겐 큰 모험이었다. 파키스탄의 정치적 불안으로 수출입 계약들이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무샤라프 장군은 아주 현명하게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외국인 투자만 필요한 게 아니다. 수출입도 잘 돌아가야 한다. 무역상황이 호전되도록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도와달라. 파키스탄은 대외채무를 많이 지고 있다. 이 짐을 덜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어야 한다’ 파키스탄 체류중 무샤라프 장군은 나를 만날 때마다 채무 삭감을 화제로 꺼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잘 알았다고요(I’ve got it, I’ve got it). 그 문제는 내 이마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부채 삭감’이라고 말입니다. 내 마누라조차도 내 이마에 그렇게 적힌 걸 알아볼 정도인 걸요’.”
군 장성 출신답게 두 사람은 탈레반에 맞서는 아프간 북부동맹의 군사적 활용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무샤라프 장군은 타지크족, 우즈베크족이 중심이 된 북부동맹이 카불을 접수할 경우 아프간 다수족인 파슈툰족이 소외되고 또다른 정치불안이 일어날 거라고 걱정했다. 파월의 증언.
“우리는 아프간전쟁에서 북부동맹군을 활용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나는 여러 정치적 불안요소를 감안해, 북부동맹군은 파슈툰족이 다수인 카불에 입성해서는 안되며 카불에 다민족(multi-ethnic)을 대표하는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무샤라프 장군에게 거듭 확인해주었다.”
10·7 공습이 시작된 뒤 10월 한달간은 믿었던 북부동맹의 진격이 지지부진하고, 전쟁은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탈레반 정권은 여전히 건재했다. 백악관은 초조해졌다. 당시 분위기를 파월은 이렇게 전한다.
“우리도 힘든 나날을 보냈다. 국민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가 빨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인내심을 잃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그렇듯 비판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아프간 북부도시로 진격해 탈레반의 거점인 마자르이샤리프를 점령하고, 동시에 북부동맹으로 하여금 쇼말리 평원을 가로질러 카불을 점령해야 하는데 왜 지지부진하냐고 말했다. 당시 우리는 날마다 백악관에 모여 회의를 거듭한 끝에 먼저 한 군데를 집중공격해 점령하고, 다음 단계를 밟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뒤 사태는 우리가 결정한 대로 돼나갔다.”
◇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군정 실력자
1999년 무혈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무샤라프 장군은 ‘PBS 프런트라인’인터뷰에서 9·11테러 뒤 파키스탄이 아프간전쟁에 휩쓸려 들어가는 과정에 얽힌 비화들을 공개했다. 그는 당시 파키스탄이 미국 편에 붙어 영공과 군사기지들을 미국에 개방할 경우 국내 정세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 무샤라프의 최대 관심은 아프간전쟁이 파키스탄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파키스탄 정보부(ISI) 책임자를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에게 두 차례 보내 설득작업을 폈다. 그로선 미국 편에 서는 게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험에 성공했고, 경제적 실리란 반대급부를 챙겼다.
9·11테러 바로 다음날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당시 워싱턴을 방문중이던 파키스탄 정보부 책임자 아흐마드 마흐무드 장군, 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 로흐디를 만나 앞으로 미국이 벌이게 될 ‘테러와의 전쟁’에서 파키스탄측의 협조를 구했다.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대사 웬디 챔벌린도 무샤라프를 방문, 아미티지 부장관과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무샤라프의 증언.
미국, 무샤라프에 7개항 요구
“ISI 책임자 마흐무드 장군으로부터 아미티지 부장관과 접촉했다는 보고를 받은 9월12일 저녁 나는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고, 그 다음날도 하루 종일 회의를 열어 앞으로 정책 가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놓고 대책을 숙의했다. 9월14일에는 주요 군 지휘관들을 소집해 의견을 나눴다. 그런 뒤 9월15일 각료회의에서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을 둘러싼 문제들에 부딪쳐 있다. 이것들은 단지 모험일뿐 아니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당시 무샤라프는 미국측의 7개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고 이미 답변한 상태였다. 9월13일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마흐무드 ISI 정보국장에게 7개 요구사항을 내밀었고, 그날 오후 파월이 무샤라프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측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7개 요구사항은 첫째, 알 카에다의 파키스탄 국경 월경(越境)을 파키스탄측에서 막고 오사마 빈 라덴 지원을 중단할 것. 둘째, 파키스탄 영공을 미군이 사용하게 해줄 것. 셋째, 해군기지와 비행장을 사용하도록 해줄 것. 넷째, 각종 정보를 신속히 제공할 것. 다섯째, 9·11테러를 비난하고, 미국에 대한 파키스탄 국내의 비판여론을 막아줄 것. 여섯째, 탈레반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고, 파키스탄의 탈레반 지지자들이 아프간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 일곱째, 탈레반 계속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한다면, 탈레반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 등이었다(편집자).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마흐무드 ISI 국장에게 7개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이 사항은 협상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 말했다. 이와 관련한 무샤라프의 증언.
“미국측이 내민 7개 요구사항은 일종의 패키지로 우리쪽에 건네졌다. 파키스탄 영공과 군사기지를 미군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병참지원, 정보협조 및 교환 등 3가지가 중요했고 나머지는 비중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를 받아들였고, 어느 쪽 영공과 기지들을 미군이 이용할 것인지, 병참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세부적 사항들이 논의됐다.”
그즈음 무샤라프는 부시 미 대통령과도 통화를 했다.
“나는 파키스탄의 전략적 자산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있고, 그것은 특히 인도와 관련돼 있다고 부시 대통령에게 강조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도와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을 해치려고 공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9월18일 무샤라프는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와도 전화통화를 했다. 그것은 무샤라프가 199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처음 나눈 대화였다. 그 통화에서 블레어 총리는 아프간전쟁에서 영·미 두 국가에 협조하기로 한 무샤라프의 결단에 고맙다는 말을 했고, 무샤라프는 자신의 결정이 고심 끝에 나온 것임을 밝혔다.
탈레반 설득 위해 세 차례 밀사 파견
지난해 12월 아프간 동부 토라 보라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벌인 뒤 임무교대를 위해 산을 내려오는 반탈레반 무자헤딘 전사들.
“나는 그때 모두 세 차례 밀사를 보냈다. ISI 책임자 마흐무드 장군이 내 친서를 품고 아프간에 두 번 다녀왔고, 내무장관이 한 번 다녀왔다. 친서의 요점은 아프간 평화를 위해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라는 것이었다. 아프간 현실을 직시하고 그를 넘겨야 아프간 사람들의 고난을 덜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왜 아프간 사람이 아닌 인물(빈 라덴) 하나를 놓고 아프간 사람 전체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려 하느냐는 게 밀사를 보낼 때마다 거듭된 내 메시지의 골자였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의 응답은 ‘유엔 경제제재를 풀어달라. 경제적 지원을 원한다. 이를 수락하면 빈 라덴이 다른 나라로 가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엔 그런 응답은 탈레반의 완고함을 드러낸,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마흐무드 장군과 단독대면에서 물라 오마르는 한때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끝내 빈 라덴을 넘기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샤라프는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의 이슬람 종교지도자 대표들을 물라 오마르에게 보냈다.
“어쨌거나 전쟁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오마르는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의 법정에서 빈 라덴을 심판하자’는 비현실적 제안을 했다. 그것이 오마르가 보인 최대한의 양보라면 양보였다.”
탈레반을 설득하는 한편으로 무샤라프는 부시 미 대통령을 설득해 전쟁을 막아보려 했다.
“당시 부시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9·11 테러로 인한 피해를 떠올리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나는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하고 말했다. ‘만약 미국이 전쟁을 피하는 조건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원한다면, 그의 아프간 추방으로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구태여 군사작전을 펼 이유가 없지 않으냐…’ 이런 얘기였다. 그러나 탈레반 쪽에서 ‘빈 라덴이 9·11테러와 관련이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하라’며 계속 빈 라덴을 감싸고 돌아 더 이상 우리 쪽에서 활용할 대화창구는 닫혀버린 셈이었다.”
단절된 탈레반과의 대화
아프간 공습이 시작되기 며칠 전 무샤라프는 미국측으로부터 “공습이 시작될 것”이란 귀띔을 받았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10월7일 공습이 개시되기 2∼3일 전쯤 그런 사실을 알려왔다. 당시 나는 파월 미 국무장관,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 등 미국측 사람들에게 군사작전은 가능한 한 빠르고 짧게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쪽 사람들은 ‘짧다면, 얼마나 짧게?’라고 되물었다. 그런 질문에 나는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직업군인으로서 짧다는 게 며칠, 몇 주, 또는 몇 달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전쟁은 가능하면 짧은 시일내에 끝내야 하고,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공습을 한다면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해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
아프간 공습이 시작되고 1주일 뒤 파월이 파키스탄을 방문, 무샤라프와 마주 앉았다. 당시는 아프간전쟁으로 탈레반 체제가 무너진 다음의 구도에 관심이 옮겨갈 때였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파월 장군(무샤라프는 파월을 ‘장군’으로 불렀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전쟁 뒤 아프간에 (내전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고) 평화가 오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둘째, 아프간에 들어설 새로운 권력체계는 다민족인 아프간 인구 구성비를 반영해야 한다. 셋째, 아프간에 이웃 국가들과 잘 지낼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 이는 아프간전쟁의 군사적 전략, 아프간전쟁 뒤의 정치적 전략, 국가재건 전략과 맞물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파월 장군에게 처음에는 군사전략이 우선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전략이 더 중요해진다는 점을 강조했고 장군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무샤라프가 인구 구성을 반영한 아프간 새 정부를 강조한 것은 아프간에 대한 파키스탄의 영향력을 잃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탈레반 체제를 지지해온 파슈툰족은 아프간 인구의 38%를 차지하는 최대 부족이다. 탈레반군에 맞섰던 북부동맹군은 타지크족, 우즈베크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그동안 파키스탄이 지지하던 탈레반이 무너지고 북부동맹이 주도권을 잡을 경우, 파키스탄의 아프간내 영향력은 심각하게 줄어든다-편집자).
두 사람은 다음날 다시 40분 동안 회담했다. 무샤라프의 증언.
“그 자리에서 나는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직선적으로 파키스탄이 미국에 협조하는 대가로 챙겨야 할 사항들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파키스탄의 채무 탕감, 재정적 지원, 시장개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 우리를 정말로 돕고자 한다면, 이 3가지 사항을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파월 장군은 ‘당신이 바라는 바를 내 이마에다 적어 놓았다’고 선선히 말했다. 그래서 지금도 때때로 파월 장군 부인은 ‘당신 이마에 뭐가 적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웃음)”
아프간전쟁에 협조하는 대가로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의 국제채무 30억달러를 탕감받기 원했고, 미국은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합의된 것은 없다. 다만 미국은 2003년 회계연도에 2억2000만달러를 파키스탄에 지원했고, 국제통화기금(IMF)이 1억3500만달러를 지원하게끔 영향력을 행사했다(편집자).
◇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아버지 부시행정부에서 국방장관 딕 체니 밑에서 4년 동안 정책담당 국방차관(1989∼93년)을 지냈다. 유대계인 월포위츠는 부시행정부 내 신보수주의 정치세력의 선두주자이며 대표적인 매파로 꼽힌다. ‘PBS 프런트라인’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이 CIA와 국방부의 공조 아래 아프간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증언했다.
“9월11일 아침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미 의회 의원 여럿과 아침식사를 하며 미사일방어망 구축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럼스펠드는 ‘우리는 위험한 세계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별로 반갑지 않은 놀라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의원이 ‘어떤 종류의 놀라운 사건을 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내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이란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할지도 모르고, 북한이 대륙간 탄도탄을 시험발사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날 아침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바로 1시간 뒤 펜타곤(미 국방부)이 공격당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백지상태에서 세운 아프간 군사작전
첫 비행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부딪쳤을 때 월포위츠 부장관은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증언.
“사무실에서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TV를 켜보라고 했다. 뭔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안개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펜타곤 건물이 흔들렸다. 지진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내 사무실은 비행기가 부딪친 곳에서 400∼500m쯤 떨어진 반대쪽이었지만,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벌써 복도에 나와 있었다. 바깥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사건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럼스펠드 장관은 경호팀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때까지 들것 나르는 일을 돕기도 했다. 내 기억으론, 그때 무슨 일이 생겼나 알아보려고 휴대전화를 걸었지만 그 시각 워싱턴지역은 불통이었다. 위기관리 측면에서 이런 일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한 가지 교훈은 얻었지만….”
펜타곤이 공격을 받은 바로 뒤 지하 3층의 지휘센터(command center)에서 월포위츠는 럼스펠드 국방장관, 합참의장 마이어장군과 마주앉았다. 그때 럼스펠드는 이미 백악관 벙커로 피해 있는 체니 부통령과 화상(畵像) 보안회의를 했다. 체니 부통령은 당시 플로리다주에 가 있는 부시 대통령과 보안전화로 통화하려 애쓰고 있었다. 월포위츠 부장관의 증언.
“당시 문제는 위치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제4의 비행기였다. 이미 우리는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필요할 경우 전투기로 그 비행기를 격추시키라는 지시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민간인들이 탄 여객기를 격추시킬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여객기는 휴대전화를 통해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승객들이 납치범들과 사투를 벌인 끝에 필라델피아 교외에 추락했다).
“비행기 충돌로 일어난 화재로 말미암아 펜타곤 지휘센터에까지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럼스펠드 장관에게 펜타곤 건물에서 나가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0분 뒤 누군가 다시 말했으나 마찬가지였다. 20분쯤 뒤 내가 다시 말했다. ‘장관, 여기서 정말로 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럼스펠드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가는 게 어때? 위기 순간에 우리가 같은 장소에 머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펜타곤에서 90마일쯤 떨어진 보안건물로 옮겨갔다.”
이어지는 월포위츠의 증언.
“여태껏 이런 전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오던 전쟁이 아니었다.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한마디로 무(無)에서 전쟁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프랭크스 장군과 그의 장병들이 아프간에서 이룬 전과는 엄청난 것이라 할 만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부시 대통령은 9월20일 프랭크스 장군에게 아프간전쟁 계획을 세우라는 지침을 내렸고 그로부터 3주도 지나지 않은 10월7일 공습이 시작됐다. 10월19일 미 특수부대원들이 아프간에 상륙해 공습을 유도하는 작전을 폈고, 11월 초 마자르이샤리프를 함락했다. 사람들은 아프간전쟁의 전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실제로는 놀라운 속도였다.”
공습이 시작되기 6일 전인 10월1일 펜타곤에서는 조지 테닛 CIA 국장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CIA 연석회의가 열렸다. 럼스펠드 국방장관, 월포위츠 부장관, 이제 갓 합참의장에 오른 리처드 마이어스 장군, 아프간전쟁을 지휘하게 될 미 중부군사령관 프랭크스 장군이 테닛 CIA 국장과 마주앉았다.
“그날 회의의 목적은 곧 다가올 아프간전쟁에서 국방부와 CIA가 업무를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다시피 아프간전쟁은 매우 독특한 전쟁이어서 군부와 정보기관간 유기적 협력관계가 절실했다. 행정용어를 빌린다면, 두 부서 사이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to iron out the seams) 모였다. 그 자리에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탈레반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아주 강력히 밀어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공습을 한 다음 쉬는 그런 전술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CIA는 비밀작전을 펴는 기관인 반면 펜타곤이 하는 일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CIA와 펜타곤 사이에 마찰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95%는 잘 돌아가고 5%가 삐그덕거렸다면, 그것은 커다란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CIA-국방부 합동수뇌회의
아프간에 미 지상군을 파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펜타곤 안에서는 많은 논의가 벌어졌다. 이와 관련한 월포위츠 부장관의 증언.
“우리는 북부동맹군뿐만 아니라 이보다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아프간 남부의 반(反)탈레반 세력을 돕는 미 지상군 파견을 놓고 숱한 토론을 벌였다. 만약 그 전략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를 가정하고 선택사항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고려사항은, 만약 반탈레반 세력과 공조할 수만 있다면 아프간에 1만명 넘는 미 지상군을 투입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프랭크스 장군도 그렇게 주장했다. 19세기 영국군, 20세기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당한 역사적 사실에 비춰 미군이 제3의 침략군으로 비치는 걸 우리는 바라지 않았다. 대규모 파병 대신 아프간에 투입된 미 특수부대는 참 잘해냈다. 당시 아프간에서 미군 특수부대는 모두 23차례 작전을 펼쳤는데, 그것은 20년 전에 실패로 끝났던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구출 작전처럼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특수작전은 모두 성공했다.”
당시 아프간 남부엔 하미드 카르자이가 소수의 무장세력을 이끌고 미 특수부대와 CIA의 지원 아래 탈레반 와해공작을 펴고 있었다.
“10월7일 공습이 시작될 즈음 CIA는 아프간에 있는 다양한 반탈레반 세력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자리에서 카르자이의 존재가 부각됐다. CIA는 카르자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비록 북부동맹군처럼 대규모 군사력을 이끌고 있진 않았지만, 남부 아프간에서 카르자이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그가 탈레반군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미 특수부대가 투입돼 그를 구출해낸 적도 있다.”
토라 보라 작전은 올해 봄 펼쳐진 아나콘다 작전에 비하면 문제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전지역 민간인들을 다치게 한 오폭도 오폭이려니와, 당시 토라 보라에 있는게 확실해 보이던 오사마 빈 라덴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월포위츠는 “오사마 빈 라덴이 토라 보라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 하미드 카르자이 │ 아프간 임시대통령
아프간 다수 부족인 파슈툰족 출신인 카르자이는 탈레반정권이 붕괴한 뒤 2001년 12월 임시정부 수반에 올랐고 지난 6월 아프간 과도정부를 2년 동안 이끌 대통령에 뽑혔다. 이는 미국의 전폭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탈레반을 피해 파키스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카르자이는 10·7 공습 직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 잠입, 미 특수군 지원 아래 탈레반체제 붕괴공작을 벌였다. ‘PBS 프런트라인’ 인터뷰에서 카르자이가 털어놓은 비화를 통해 그가 미국측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오토바이 타고 아프간 잠입
카르자이는 오래 전부터 아프간에 잠입, 탈레반에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9·11테러는 그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9·11테러 후 나는 아프간 북부를 통해서든, 중부를 통해서든 아프간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접촉한 미국 관리들도 내가 아프간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전화로 연락한다면 최대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카르자이가 아프간에 잠입한 것은 공습이 시작된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이었다(카르자이는 10월9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그와 함께 아프간으로 들어간 사람은 3명이었다.
아프간 접경마을에서 카르자이 일행은 2대의 오토바이에 나눠 탔다. 그리고 터번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프간으로 들어갔다. 그가 닿은 곳은 칸다하르 가까이 있는 쇼란담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 사는 카르자이의 친구는 깜짝 놀랐다.
“그는 파키스탄 서부의 아프간 접경마을인 케타에서 나를 만나긴 했지만, 그가 사는 마을에 내가 나타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아무 호위병력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다니, 미쳤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9·11테러가 일어나기 4∼5년 전부터 반 탈레반체제 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하부구조가 어느 정도 아프간 안에 있었다. 내 동지들은 1980년대 옛 소련군에 맞서 싸울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미 탈레반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내 아버지와 친구들, 부족지도자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때 칸다하르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곳에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지들도 내가 그곳에 왜 나타났는지 알고 있었다.”
아프간 현지 잠행에서 사람들을 접촉한 카르자이는 많은 사람이 탈레반체제에 반감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20여일 동안 아프간 곳곳에서 사람들을 비밀리에 만나면서 나는 그들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바라고 있고, 나를 지지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들은 변화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로마에 있는 미 대사관과 이슬라마바드 미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무기를 비롯한 병참지원을 요구했다. 그들은 내 전화를 받고 대단히 기뻐했다.”
미군 제공 무기로 탈레반군과 전투
미 CIA측과 전화로 접선한 그날 저녁 8시 카르자이는 동지 50명을 이끌고 칸다하르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로 밤새 걸어갔다. 걸어서 18∼19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미군 수송기가 낙하산으로 떨어뜨리는 군수품을 안전하게 받으려면, 탈레반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이 좋았다. 외딴 산악지대에서 카르자이는 전화를 다시 걸었다.
“미국인들은 우리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 당신들은 첨단장비를 갖고 있으니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아낼 수 있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미국인들은 ‘산모퉁이 네 곳에 사각형으로 횃불을 밝혀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들을 찾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다음날 밤이 늦었지만 비행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에서 이런 불만이 튀어 나왔다. ‘오, 그들은 우릴 돕지 않을 모양이지. 하긴 어떻게 우릴 돕는단 말인가.’ 실망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외쳤다. ‘비행기다!’ 낙하산에 달린 물건들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내려왔다. 그 속에는 무기와 식량을 비롯한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다.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들은 며칠 뒤에 왔고 칸다하르에 입성할 때까지 내내 우리와 함께 행동했다.”
미국이 떨어뜨린 무기를 들고 마을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카르자이는 500명쯤으로 추산되는 탈레반군의 공격을 받았다. 카르자이 세력은 150명뿐이었다.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카르자이는 우수한 미제 무기 덕분에 탈레반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뒤로 필요할 때마다 카르자이는 미국에 전화를 걸었고 그때마다 미군 헬리콥터가 나타나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뒤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헬리콥터를 타고와 카르자이와 합류했다.
“우리 근거지는 타린 코트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과 우리를 환영했고, ‘알 카에다 세력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니 공중폭격을 해달라’는 식으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탈레반군이 타린 코트를 공격하기 위해 100여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몰려왔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도와줘 물리칠 수 있었다. 물론 미 특수부대의 유도를 받은 미군 전투기의 공습이 큰 힘이 됐다. 그때 탈레반군은 ‘본보기 삼겠다’며 우리에게 협조적인 타린 코트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마음 먹었을 것이다.”
미군 특수부대원들과 함께 타린 코트 마을에 머물던 카르자이는 10월26일 나쁜 소식을 들었다. 카르자이와 마찬가지로 탈레반체제 흔들기 임무를 띠고 미국측의 도움 아래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잠입해왔던 압둘 하크 장군이 탈레반군에 붙잡힌 뒤 처형됐다는 소식이었다. 미군의 아프간 공습이 시작된 지 19일 뒤의 일이다. 당시 하크 일행은 매복한 탈레반군에 걸려 위기에 몰리자, 휴대전화로 미군에 지원을 요청했고 곧 이어 비행기가 날아왔지만 그를 구하기엔 너무 늦었다.
“1980년대 옛 소련군과 치른 아프간 내전 당시 용맹을 날렸던 하크 장군은 나와 잘 아는 사이였다. 우리 둘은 그 전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탈레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 함께 미국측에 선을 댔었다”
미국이 10·7 공습 직후 탈레반체제 붕괴 공작의 최전선에 투입한 두 사람 가운데 하크는 죽고 카르자이는 살아남았다. 하크가 죽지 않았다면, 카르자이 대신 하크가 아프간 지도자로 떠올랐을까?
◇ 토미 프랭크스│ 미 중부군사령관
행방이 묘연한 오사마 빈 라덴. 그러나 미국은 그를 놓쳤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9·11테러 아흐레 뒤인 9월20일 프랭크스는 여러 선택사항이 담긴 아프간전쟁 작전개요를 담은 서류를 럼스펠드에게 건넸다.
“그 문건들은 다음날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대통령은 이를 승인하면서 ‘아프간에서 군사작전을 펼 수 있도록 준비하라. 그리고 언제 준비가 끝날지 내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아프간전쟁은 1990년대 미국이 보스니아, 코소보, 소말리아 등지에서 폈던 작전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지난 전쟁들은 미군의 아프간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프랭크스는 “그런 전쟁들은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 중부군사령부 참모들이 고려한 것은 아프간의 지형과 역사다. 아프간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들은 외부의 적을 맞아 어떻게 반응했는가, 탈레반 무장세력은 어떻게 포진해 있는가, 공군·해군 그리고 미군 특수부대를 포함한 지상군이 아프간에 닿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등등을 고려했다. 몇몇 군사전문가는 아프간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옛 소련군이 1980년대 10년 동안 당했던 일을 생각해야 했다. 그들은 62만5000명의 병력을 아프간에 투입, 1만5000명이 죽고 5만5000명이 부상당한 채 물러났다. 그런 일은 되풀이하면 안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미국에는 아프간을 연구하고 아프간 사람들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나는 이들을 ‘전문가’라고 불러야겠지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사령부로 모셔와 아프간전쟁 군사작전을 짜는 데 일종의 싱크탱크 집단으로 활용했다.”
미군은 토라 보라 전투에서 오마사 빈 라덴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프랭크스는 토라 보라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토라 보라에 빈 라덴이 있었다고들 말하지만 추측일 뿐이다. 아프간에는 알 카에다와 같은 비(非)아프간 무장세력이 머물던 곳이 6군데나 된다. 토라 보라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12월 초 잘랄라바드 지역 무장세력이 토라 보라 지역의 탈레반 세력을 공격할 때 우리는 그들을 지원했고, 다시 말하지만 그 지원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보시오. 당신은 빈 라덴을 놓쳤잖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빈 라덴이 토라 보라에 있었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다. 빈 라덴이 그곳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증거가 없다는 얘기다. 어떤 이들은 ‘당신 부하들은 빈 라덴이 파키스탄으로 도망치는 걸 막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장군과 그의 병력은 아프간-파키스탄 국경봉쇄작전을 적극적으로 폈다. 빈 라덴의 부하들이 토라 보라에서 파키스탄으로 도망쳤다면, 그들은 국경지대에서 붙잡혔을 것이다.”
“빈 라덴 놓쳤다는 증거 없다”
프랭크스 장군은 올 봄 미 특수부대 병력을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대에 배치했다. “혹시라도 있을 알 카에다 잔당을 붙잡고 아울러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프간 접경지대는 아직은 불안한 곳으로 남아 있다”고 진단했다.
토라 보라에 미 특수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했더라면 빈 라덴을 잡을 수 있었을까. 프랭크스는 “당시로선 그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잘랄라바드의 반탈레반 세력이 토라 보라 공격을 맡겠다고 나섰고, 실제로 그들은 작전을 빨리 펴길 바랐다. 그때는 미 특수부대 병력을 대규모로 투입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그래서 반탈레반 세력에 토라 보라 공격과 파키스탄 쪽 국경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은 내가 내렸다.”
“처음부터 연합군 작전권 통제”
프랭크스 장군의 이런 결정은 결과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이 토라 보라에서 파키스탄으로 탈출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아프간 현지의 여러 증언에 따르면, 탈레반정권은 수도 카불을 내주기 이틀 전인 11월10일 아프간 동부도시 잘랄라바드를 거쳐 토라 보라로 이동했다. 11월14일부터 토라 보라 일대에 대한 미군 공습이 시작됐다.
미 CIA는 아프간 군벌을 미국 달러로 포섭, 토라 보라 공격에 나서도록 했다. 미군은 ODA 572부대 소속인 소수의 특수부대 요원만을 투입했다. 미군 공습 지원과 통신 등이 그들의 주임무였다. 그러나 빈 라덴과 상당수 알 카에다 요원들은 길목을 지키는 현지 아프간 무장요원들을 매수해 탈출로를 열었다는 소문이다. 12월 중순 아프간 북부동맹군에게 붙잡힌 빈 라덴의 보디가드 아부 바케르의 증언에 따르면, 빈 라덴이 토라 보라 동굴지역을 벗어나 파키스탄 파라치나르 쪽으로 탈출한 것은 11월 말 또는 12월 초로 보인다.-편집자
아프간전쟁에는 34개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그래서 지휘권 문제가 생겼다. 누가 공격목표를 선정할 것인가, 어느 군대가 공격에 나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프랭크스는 미군 지휘관이지만, 연합군으로 참여한 다른 나라 군대들을 사실상 통제했다. 이 부분에 관한 프랭크스의 증언.
“우리 미군은 처음부터 선을 분명히 그었다. 우리가 맡기로 한 임무가 연합군의 작전임무를 규정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연합군에 우리가 작전임무를 정하는 데 나서지 말라는 점을 분명히 주지시켰다. 연합군은 해군이든 공군이든 특수군이든 우리 미군의 작전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점은 아프간전쟁을 수행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아프간전쟁을 지휘하면서 프랭크스가 느낀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앞으로 미국이 치를 어떤 전쟁도 아프간전쟁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간은 작전지형 자체가 어려운 곳이고, 아프간내 정치적 지도력이 미국에 협조적이지만 자체 무력을 갖추지 못한 곳이다. 아프간은 11년 전 걸프전을 치른 이라크와는 다른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