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 2012년 APEC 정상회담 블라디보스토크 유치
- 루스키 섬-블라디보스토크 잇는 다리 공사 시작
- 러시아는 日·中 자본 아닌 한국 자본에 관심
- 푸틴의 북한 설득능력이 관건
- 일본은 北에 가장 엄격한 잣대 들이댈 것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 섬 누드 촬영 관광 투어. 4박5일, 성인 요금 250만원, 신청금 30만원. 3일째 되는 날 전용선인 ‘카제르 호’를 타고 루스키 섬에 들어가 바다와 갯바위에서 누드 촬영. 그리고 바다가재와 자연산 가자미회로 점심 식사를 하고 스카르다 해협으로 이동해 다시 누드 촬영을 함.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는 저녁식사와 러시아식 전통 사우나를 하고 나이트 원정….’
4박5일이라지만 속초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에 도착하기까지 1박2일이 걸린다. 3일째는 누드 사진을 찍고, 4일째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관광과 쇼핑, 5일째는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니 250만원이라면 상당히 비싼 편이다. 이 상품에 얼마나 많은 손님이 몰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러시아 누드모델을 데려오고 루스키 섬까지 가서 누드 사진을 찍는다면 상당한 비용이 들 것이니, 에이전시 측도 요금을 비싸게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뜬금없이 러시아 누드모델 촬영 관광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반도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루스키’란 섬. 조만간 루스키 섬은 한국인에게 친근한 이름이 될지 모른다. 그것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서….
‘퍼덕이는 생물’
국제정치는 각국의 긴박한 국내정치와 맞물려 펼쳐지는 것이기에 ‘퍼덕이는 생물’이라 일컬어진다. 지금 한반도 문제는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요동치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올해 말 실시되는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선거, 그리고 내년 3월로 잡혀 있는 러시아 대통령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반대로 이 선거로부터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각국의 전략가들은 대통령선거라는 국내 문제에서는 상대를 누르고, 국제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거대한 그림을 그린다. 각국이 그리는 그림을 종합하면 동북아는 ‘대단한 장기판’이 된다. 이 장기시합에는 심판도 룰도 순서도 없다. 상대의 전략을 염탐할 수도 있고, 장기판에 참여한 국가는 물론이고 훈수 두는 국가와 ‘짜고 치는’ 합종연횡도 할 수 있다. 약육강식의 들판인 듯하지만 약자도 현명하면 종족을 번식하는 무체급의 무제한전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러한 현실을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과 미국 중국에 한정한 국제문제로 봐왔다. 일본의 비중을 중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북한이 한국·미국·일본과 평화조약을 맺거나 한반도가 한국 주도로 통일될 경우, 북한 부흥에 꼭 필요한 ‘청구권 자금’을 내놓아야 하는 나라다. 일본이 내놓는 청구권 액수에 따라 북한 지역의 부흥 속도가 달라진다.
따라서 일본은 자금을 내놓기 전,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할 것이다. 납북자 문제의 완전 해결은 물론이고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는 미국 이상으로 확실한 제거를 요구한다. 북한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미국보다 크게 지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은 북한에 어느 나라보다도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나라가 될 것이다.
미·중·일은 중립적
러시아는 어떨까.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는 사활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가적 필요에 의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러시아도 누드촬영 관광만큼이나 매력적인 미끼를 들고 남북한을 잡아끌 수가 있다.
적잖은 국민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아직 가시적인 대통령후보자조차 부각되지 않은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은 충격적이었는지 몰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대그룹으로 하여금 북한에 뒷돈을 주게 해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이를 계기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 밝혀진 지금 이벤트성 남북정상회담을 연다면 이는 여당에 오히려 독(毒)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자체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내놓는지가 중요해진다. 퍼주기식 합의가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열어주는’,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청사진이 나와야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그래야 여당과 여당 후보자의 지지율도 올라갈 것이란 분석이다. 전략가라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한다. 그런데 이러한 회담을 만들려면 제 솜씨뿐만 아니라 남의 재주도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은 북핵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한 편이니, 결과적으로 북한을 돕는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을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을 눈앞에 둔 중국도 핵실험을 한 북한을 좋아할 까닭이 없다.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세 나라는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돕지도 방해하지도 않는, ‘수수방관’으로 일관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는 ‘밑져야 본전’인 처지이므로 공격적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다. 남북한을 화해시키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맞아떨어진다면 ‘팔팔한’ 푸틴 대통령은 적극 개입할 공산이 크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루스키 섬이다. 루스키 섬은 내년 5월 임기가 끝나는 푸틴 대통령,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와 관련해 이미 러시아에서는 주목받는 곳이다. 루스키 섬의 비전을 살피려면 APEC의 가치와 의미부터 이해해야 한다.
중국 일본 두려워하는 극동러시아
1989년 호주 정부의 제의로 출범한 APEC은 환태평양 지역 경제 문제를 논의하는 협의체였다. 그런데 1993년 미국 시애틀 회의 때 정상회담을 열면서부터 정치외교적인 문제도 논의하는 자리로 발전했다. 1999년 호주가 동티모르 문제에 개입하고, 9·11테러를 당한 미국이 2002년과 2003년 아프간과 이라크전을 감행한 이후에는 테러, 마약, 위폐 같은 국제범죄는 물론이고 대(對) 테러전까지 논의하는 무대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유럽 국가임을 자임한 러시아는 1998년에야 APEC 회원국이 되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의 전략적 가치를 등한히해온 것인데, 그로 인해 러시아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극동 러시아를 ‘불 꺼진 지역’으로 방치한 것이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정말 형편없는 도시다. 한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중고차가 한국과 일본 글자를 단 채로 돌아다닌다. 태평양함대사령부 곁에 있는 광장은 먼지가 풀풀 날리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상점 앞에 늘어선 시민의 얼굴엔 윤기가 없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로 군사도시에서 ‘해방’된 블라디보스토크가 ‘불 꺼진 도시’로 전락하는 데는 러시아의 문화전통도 한몫했다. 오랫동안 극동 러시아를 출입해온 한 소식통은 이런 비유를 들었다.
“극동 러시아는 한국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호남 지방, 블라디보스토크는 목포라 할 수 있겠다. 목포에서 돈을 번 사람은 목포에 재투자하지 않고 광주나 서울로 올라가버린다.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목포에 남아도 가족은 서울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수천년간 러시아의 중심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였으며 중심을 동경하는 국민 정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렇다 할 명문대학이 들어서지 못했다. 그러니 인재가 나오지 않아 이 도시는 자꾸 쇠퇴한다. 어쩌다 돈을 버는 이가 나와도 모스크바로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의 돈줄은 더욱 말라버리는 것이다. 포항과 울산, 창원은 목포보다 작은 촌락이었으나, 지금은 대도시가 되었다. 이유는 그 지역의 경제성장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도 경제시설이 들어서지 않는 한 자체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중국 훈춘(琿春)시는 인구와 활력이 넘쳐난다. 자루비노와 훈춘 사이에 있는 중·러 국경선을 넘어본 사람은 연해주에서는 무인지경으로 펼쳐지던 땅이 중국 국경에 들어서는 순간 옥답(沃畓)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훈춘시가 포함된 중국 지린성은 19만㎢의 면적에 인구 2000만이 넘는데, 16만6000㎢ 면적의 연해주 인구는 200만에 불과하다. 극동러시아에는 사람이 없고, 중국 동북지방은 땅이 없어 난리다.
임기 말 푸틴, 레임덕을 모른다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데, 이 국경선을 통해 적잖은 중국인이 러시아에 들어가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는다. 극동러시아에는 국경선을 지키는 공안 요원이 부족한 덕분에 여권 없이 러시아 땅에 들어가는 중국인이 많다. 러시아 땅에서 경제력을 구축한 중국인들은 자기 것을 지키려 할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의 고민이다. 러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는 엘리트들은 1689년 청나라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차지한 광대한 극동 땅을 다시 중국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거주하려고 극동러시아로 오는 러시아인은 없다.
같은 임기 말이지만 푸틴 대통령의 사정은 노무현 대통령이나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크게 다르다. 그의 사전엔 레임덕이 없다는 듯 내년 5월 퇴임 예정인 그의 인기도는 70%를 웃돌고 있다. 높은 지지율은 그가 쇠퇴를 거듭하던 러시아 경제를 살려낸 덕분이다. 러시아 경제가 부흥한 데는 국제 유가(油價) 상승이 큰 구실을 했다.
잘 알다시피 러시아는 세계 최고의 산유국이다. 2004년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전세계 생산량의 13.9%) 다음으로 많은 양의 원유(11.9%)를 생산했지만, 수출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러시아 경제를 부흥시킨 원유는 시베리아와 극동 러시아에도 무진장 묻혀 있다. 산유국 러시아의 대통령은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푸틴은 가난이 가져오는 해악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 체첸공화국 독립운동가의 테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체첸이 바로 대표적인 빈촌(貧村)이다. 구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 출신인 푸틴은 ‘테러는 가난을 먹고 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극동러시아의 가난을 방치하면 마피아가 판치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극동러시아의 가난, 테러, 원유 개발 문제를 해결하고 퇴임한 이후에도 권력을 잡고 싶은 욕망을 가진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베트남 APEC에서 “테러 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을 차단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역내 국가들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안보는 중요한 과제다” “시베리아와 극동러시아의 개발이 아태 지역 통합에 적극 참여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APEC의 미래를 낙관하며 다른 회원국과 함께 공동 과제 해결에 적극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난 1월27일 푸틴 대통령이 인도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왔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것은 2002년 8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 후 6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눈보라가 몰아쳐 헬기도 뜨기 힘든 악천후에 도착한 푸틴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장을 해임했다(러시아는 대통령이 자치단체장면권을 가지고 있다).
루스키 섬까지 다리를 놓는다
2005년 7월2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가 실린 ‘노동신문’. 평화체제 체결 대상은 미국이고 평화통일 대상은 한국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 APEC 정상회의는 올가을 호주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다. 러시아는 APEC 회원국 가운데 정상회의를 한 번도 개최하기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큰 지지를 받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비탈리 사벨례프 경제개발통상부 차관이 “연방 정부가 지원하는 자금은 2008년부터 2010년 사이 블라디보스토크와 루스키 섬을 연결하는 다리 건설 공사와 포럼장, 참석자 숙박시설을 짓는 데 쓰일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시는 1994년부터 2003년 사이 도심과 해운대를 잇는 7.4㎞ 길이의 장쾌한 광안대교를 건설하고 2005년 해운대에서 멋지게 APEC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푸틴 대통령도 참석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루스키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곧 루스키 섬에서 APEC 회의를 열겠다는 뜻인데, 이 다리 길이는 광안대교와 비슷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루스키 섬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태평양함대의 기지와 전술핵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이에 대해 세르게이 이바노프 국방장관은 “루스키 섬에서 APEC 회의를 개최한다면 러시아 국방부는 태평양함대 부대를 재배치할 것이다. 기존 국방력을 보존하면서 국방 예산에 추가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군사력을 재배치하겠다”고 밝혔다.
해군 전용 호텔만 있던 루스키 섬에는 최근 새 영빈관이 건설됐다. 루스키 섬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다리 건설 공사는 독일 회사 주도로 이미 시작됐는데 한국의 K건설이 이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납품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공사를 러시아 자금만으로 완공하기 어려워 외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개발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북한 통과하는 러시아 화물열차
청사진을 만들려면 먼저 학자들의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 때문인지 러시아는 최근 블라디보스토크를 아태 경제권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논의하는 포럼 개최에 적극적이다. 극동러시아에 자주 출입해온 한 학자는 “요즘 들어 부쩍 러시아측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포럼을 열라’는 제의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럼을 통해서라도 블라디보스토크를 홍보하는 러시아라면 루스키 섬의 영빈관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열게 할 수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2002년 김정일 위원장이 다녀간 곳이고 루스키 섬은 군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라 경호에 신경을 쓰는 북한 측을 만족시킬 수 있다. 러시아 측은 남북정상회담 장소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푸틴 대통령이 참석해 남북한과 극동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엮는 방안을 논의하는 무대로 만든다. 이를 위해 러시아 측이 내놓은 미끼가 극동러시아의 무진장한 자원 개발이다.
극동러시아에는 땅에서 저절로 원유가 솟는 곳이 있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일부 탈북자와 러시아 노숙자들은 이러한 곳에 굴을 파고 원유에 불을 붙여 난방을 하며 겨울을 넘긴다고 한다. 이러한 석유 자원을 개발하려면 사회간접자본(SOC)이 투입돼야 하는데, 러시아는 한국 자본을 유치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때는 패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승리해 홋카이도(北海道) 동쪽에 있는 시코탄(色丹) 등 4개의 일본 섬을 점령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문제로 일본과 설전을 거듭하고 있으므로, 러시아가 일본 자금을 유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국인의 유입도 염려하고 있므로 러시아가 유치할 만한 자본은 한국 자본으로 좁혀진다. 그런데 마침 한국의 노무현 정부가 북한을 포용하려고 애를 쓰니 차제에 러시아와 남북한을 잇는 경제 방안을 내놓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개발이 본격화하면 한국이 자재를 공급한다. 자재는 배로 옮길 수도 있지만 북한을 종단하는 열차로 옮기는 것이 더 유리하다. 이 열차는 러시아 것이므로 북한 영토 내 역은 서지 않고 통과한다. 사람은 거의 타지 않고 통과만 하는 화물차라면 개방을 두려워하는 북한으로서도 고려해볼 만한 제안이다. 통과세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 열차가 다니게 하려면 노후한 북한 철도를 개량해야 한다. 이 비용은 남북 경협 차원에서 한국이 부담하되 레일은 과거 한국에서 빌려간 차관을 ‘현물 상환’하는 형식으로 러시아가 공급하고, 북한에서의 철도 공사는 북한 군인이나 노동자가 맡는다면 북한은 한국의 도움은 전혀 받지 않는 모양새로, 그들의 열차도 다닐 수 있는 철도를 멋지게 개량할 수 있다.
이 철도를 통해 한국은 러시아로 자재를 보내고, 극동러시아의 자원을 한국으로 가져온다. 이 자원 중 일부는 북한에 제공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가 발전하면 러시아 국민이 돌아와 극동러시아에 활기가 돈다. 푸틴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국내 정치 문제에도 활용한다.
지금 러시아의 관심 사항 가운데 하나는 푸틴 대통령의 3연임 여부다. 현행 러시아 헌법상 푸틴의 3연임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사이에서는 국가통합이 논의돼왔다. 푸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 세 나라 혹은 두 나라 간 통합이 이뤄진다면, 영토가 달라지므로 새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푸틴은 3연임을 위한 출마를 할 수 있다. 국가통합은 러시아와 벨로루시와의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으나 간단한 문제 같진 않다.
국가통합은 푸틴의 임기가 끝난 다음에 이뤄질 전망인데 이때까지도 그의 인기가 높다면 그는 통합국가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의욕이 강한 푸틴은 이러한 것까지 염두에 둘 것이므로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을 모색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노벨 평화상 수상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 적을 뿐 아니라 유력시되는 거물이 없다.
2000년 12월1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노벨위원회는 그해 2월25일을 후보 추천 마감일로 정했으나 지난해부터는 8월31일로 늦췄다. 따라서 올해 8월말 이전 푸틴 대통령이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큰일을 해낸다면 그는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수 있다. 현재로선 그가 할 수 있는 큰일이란 8월15일 루스키 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유치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고 한반도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력해 보인다.
김정일 생일선물이 된 2·13합의
문제는 이러한 푸틴 측 복안을 북한 측이 따라주겠느냐는 것이다. 이 궁금증을 풀어보려면 ‘북한 달력’을 넘겨가며 한반도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만 해도 한반도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연말에 미-북 양자회담이 열리고 올해 들어 설 전에 6자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하더니 2월8일 6자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9·19공동성명 이행의 초기조치 합의문’이라는 2·13합의가 나왔다.
설은 2월18일이고 그 이틀 전인 16일은 김정일 위원장의 66회 생일이었다. 북한은 설보다 2월16일을 더 큰 명절로 친다. 이 날이 되면 전 주민은 김 위원장이 내린 쌀과 고기와 옷을 받는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2월16일 북한 주민들은 근래 없이 많은 식량과 물품을 받았다고 한다. 2·13합의문의 2조 5항은 ‘참가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에너지의 인도적 지원에 협력한다’고 돼 있어, 2·13합의 직후 각국은 10·9 핵실험으로 중단한 구호물품을 바로 보냈다.
이로써 김정일은 북한 주민에게는 핵실험을 하고 식량도 조달한, 그들식 표현대로 ‘천출명장(天出名將)’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생일인 4월15일을 ‘태양절’이라고 하여 2월16일보다 큰 명절로 친다. 태양절을 앞두고 천출명장은 또 한 번 이적을 보여줄 전망이다. 이유는 2·13합의가 초기이행 기간을 60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초기이행조치가 잘된 것으로 확인되면 이후엔 또 다른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다. 2·13합의 60일 후는 태양절 직전이므로 김정일은 또 한 번 북한 주민을 감탄케 하는 사은품을 내릴 수 있다.
북한 지원 물품을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만큼 북한은 남북장관급 회담 등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평화조약 체결을 서두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미국에 보낼 뿐 아니라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나 그 이상의 인물을 북한으로 초대하려고 한다. 미국과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면, 김정일은 “드디어 미제가 김일성 주석에게 굴복했다”고 선언할 것이다.
이러한 계산하에 북한은 6월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은 물론이고 8월15일 남북정상회담에 응할 수도 있다. 2000년에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받을 기회를 주고 상당한 뒷돈을 챙겼다면, 2007년에는 푸틴 대통령에게 같은 기회를, 노무현 정부에는 정권 재창출 기회를 주고, 권력 강화와 북한 부흥, 그리고 미국과의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다.
허구가 된 미국의 윈-윈 전략
일련의 북한 핵사태를 돌이켜보면 김정일은 미국이 내세우는 ‘윈(Win)-윈 전략’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한반도와 중동 전구(戰區)에서 동시에 큰 전쟁이 일어나도 모두 이길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윈-윈 전략’이다.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에서 미국은 조기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두 지역을 안정시키는 평정작전에서는 본전쟁에 버금가는 병력을 투입하고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평정작전 분야에서 미국은 윈이 아니라 ‘홀드(hold·비기기 또는 현상유지)’만 하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미군은 이란과 북한을 상대로 전쟁할 수 없다. 이란과 북한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 수밖에 없게 된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이 대화에서도 발을 빼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란 문제는 NATO에 맡기고 북한 문제는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하겠다’는 한국과 북한을 가장 경계하는 일본에 떠넘기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변화는 중국과 국교를 맺음으로써 소련을 고립시켜 냉전에 종지부를 찍은 키신저의 외교 전략을 연상케 한다. 미국은 ‘이란을 이해하는 듯’한 NATO도 이란과의 협상에서 나가떨어지고, 북한 편을 들어주는 중국과 한국도 북한과 협상을 거듭하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 미국이 나서서 양쪽을 함께 잡아버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려는 게 아닐까.
미국은 위태로운 윈-윈 전략을 고수하려다 ‘홀드-홀드’ 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이이제이를 하는 것이 세계 지배에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속셈을 꿰뚫어보는 것이 김정일이다. 부시 정권 7년을 기다린 끝에 북한은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발목을 잡혀 ‘코가 낮아진’ 미국을 만났다. 그리고 바로 미국에 핵을 포기할 테니 평화조약을 맺자고 성화를 부리고 있다.
이러한 북한을 향해 평화체제를 맺자고 요구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다. 이종석씨가 구축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1970년대 동서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남북한이 각각 독립국가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기본전제로 한다. 남북한은 정전(停戰)체제를 끝내고 각각의 수도에 전권특명대사를 파견하는 평화체제 구축이 한반도 문제를 푸는 쉬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지역 갈등을 푼 예는 독일 말고도 또 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왔으나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주재로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양국 주민의 자유왕래를 허용하는 평화관계에 들어가 오늘까지도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그러나 두 나라 국민 관계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이러한 공로로 임기를 끝낸 카터는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푸틴 대통령은 캠프데이비드 모델을 루스키 섬에서 재연할 수가 있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푸틴이 김정일 설득에 성공해 8월15일 루스키 섬에서 남북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발표를 한다면 2007년 노벨평화상은 따놓은 당상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발전이 시작되면서 그는 ‘연임을 하셔야 하는’ 강력한 퇴임 대통령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 앞의 다양한 선택
러시아는 북한을 설득할 수 있을까. 러시아는 지난해 말 이미 대북 차관 38억루블 가운데 80%(30억4000만루블)을 탕감하겠다는 당근을 던졌다. 남은 것은 북한의 선택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다. 2005년 7월22일 발표된 담화에는 “조선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비핵화 실현이 이어진다. 조선반도의 평화체제 수립 과정은 조미(朝美) 사이의 평화공존과 북남 사이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환경 조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명확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북한이 평화체제를 맺는 대상은 미국이고, 한국은 평화통일을 해 나가는 대상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 후 북한은 한국과 평화협정을 맺겠다는 내용의 담화나 성명을 발표한 적이 없다. 북한의 태도가 이렇다면 루스키 섬 정상회담에서는 경제협력만 잔뜩 나열하고 남북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내용은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정상회담은 여당에 독이 되므로 노무현 정부는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극동 러시아 개발에 목을 맨 푸틴은 어떤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미국은 한발 물러선 상태에서 러시아가 뛰어든 한반도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임기 말의 노 대통령이 아닌 차기 대통령이 이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권의 차기 후보자나 여야를 불문하고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를 대동하고 루스키 섬에 갈 수도 있다.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치는 럭비공만큼이나 어디로 튈지 그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면 그 장소로는 루스키 섬이 가장 유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