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

아베노믹스가 J노믹스에 주는 지혜

신산업육성, 규제완화, 노동개혁이 일본 바꿨다

  •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jplee@lgeri.com

    입력2019-02-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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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출산 고령화로 경기후퇴 겪은 일본

    • 아베, 규제 자유구역 등 투자활성화 정책 펴

    • 생산성 향상 위해 일하는 방식 바꿔

    • 노동시간·최저임금, 기업 고려해 탄력 적용

    저출산 고령화가 내수 성장을 옥죄고 있다. 미·중 통상마찰의 악영향이 세계경제를 강타할 기세다. 2019년 우리 경제 앞에 놓인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장기 저성장을 앞서 경험한 일본 경제를 살펴볼 시점이다. 일본 경제의 저성장 극복 노력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다.

    일본의 장기 저성장은 단순히 경기 사이클의 결과로만 볼 수 없다. 일본경제는 1980년대 말 부동산 버블에 힘입어 4~5%대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1991년 실질경제성장률이 3%대로 떨어졌지만, 이때만 해도 막대한 경기부양책을 쓰면 다시 경제가 회복되리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1990년대 이후 짧은 경기회복기와 극심한 경기침체기를 반복해 겪기 시작했다. 연평균 성장률은 1%대로 떨어졌다. 2000년대에는 0%대로 주저앉았다. 장기 저성장 구조에 빠져 순환적인 경기후퇴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황의 골이 깊어져 금융 불안까지 뒤따라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소비가 위축되고 잠재성장률이 하락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일본 못잖게 생산가능인구 감소 압력을 받고 있는 한국도 잠재성장률 하락에 대한 우려에 휩싸여 있다.


    암반규제

    일본 산업의 발전 전략이 한계에 직면한 것도 장기 저성장을 자극했다. 고도경제성장기 이후 일본은 섬유, 금속, 화학, 가전, 자동차, 반도체 등 잇달아 새로운 성장산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구미 선진국을 모방하면서 성장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 데다 신흥국의 도전까지 받게 됐다. 한국에서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철강 등의 주력산업을 이을 새로운 첨단산업 발전이 부진한 실정이다. 신산업 이노베이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신기술 트렌드로 부상한 디지털 혁명의 대처에도 늦었다. 그 결과,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국제경쟁력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디지털 혁명의 영향이 적은 자동차나 전자부품, 기계류, 특수소재 등에서는 그나마 경쟁력을 유지했다. 대신 전자산업의 부가가치(경상GDP 통계 기준)는 정점 대비 약 40%나 감소했다. 일본 각지에서 전자산업과 관련 산업 공장이 폐쇄됐고, 지역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의 지금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다.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는 한편,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신산업 기술혁신을 다른 산업에 적용해야 하는 복잡한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이 과제를 풀지 못하면 산업경쟁력 강화는 물거품이 되고 산업 및 지역 경제의 공동화가 급격히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중국은 AI, 드론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한국을 훨씬 앞서 나가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장기 저성장은 각종 경제제도, 사회 시스템의 기능 약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일본에서는 고도경제성장기에 추격자형으로 구축된 각종 제도나 사회 곳곳에서 자리 잡은 기득권 등이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변질됐다. 농업, 의료, 에너지, 노동 등 개혁이 어려운 암반규제(巖盤規制)가 일본 산업과 경제의 혁신을 제약했다.

    다만 일본 장기 불황과 한국의 상황이 다른 점도 있다. 일본 장기 불황의 계기는 부동산 버블의 붕괴였다. 이는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졌다. 통화량은 위축됐고 불황임에도 극심한 엔고가 지속됐다. 도쿄 땅을 팔면 미국 전체 땅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동산 버블이 심각했다. 반면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아직 일본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다. 원화 강세 압력도 제한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규제 완화와 벤처 붐

    일본 경제의 하락세는 2012년 말 아베 내각이 등장하고 소위 아베노믹스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멈췄다. 잠재성장률은 2000~2012년 연평균 0.6%였는데, 2012~2017년에는 1.0%로 소폭 상승했다. 덕분에 만성적 디플레이션에서도 탈출했다. 2012년 12월 시작된 일본의 경기 확장 기간은 2019년 1월까지 74개월에 달했다. 전후 최장 기록이다.

    비결이 무엇일까. 먼저 일본 기업의 구조혁신이 주효했다. 장기 불황 초기에 일본 기업은 이를 단기 문제라고 치부하고 방심했다. 하지만 실적이 계속 악화됐다. 일본 기업은 완만하게나마 구조조정에 매진했다. 과잉채무, 과잉설비, 과잉인력 부담을 청산하기 위한 구조조정에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결과가 수익성 제고로 돌아왔다.

    예를 들면 일본 철강 산업 근로자 1인당 조강생산량은 1990~2014년 사이에 72% 늘었다. 도쿄증권거래소 1부 상장사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2017년 10.1%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 기업의 구조혁신은 아베노믹스와 시너지를 냈다. 2012년 이후 아베 내각은 산업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해왔다. 일본 정부는 과거와 달리 모든 기업을 지원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서 생산성을 제고하는 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또 경쟁사 등과 합병을 통해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기업에 세제 및 금융지원을 늘려왔다. 중소기업도 무조건 지원하지 않는다.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 기업보다는 스타트업 등 혁신 지향적인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덕분에 최근 일본에서는 다시 벤처 투자 붐이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사업은 기존 법률에 배치될 때가 많다. 아베 내각은 신사업 활성화를 위해 해당 사업 아이디어가 위법인지 적법인지 정부가 사전에 판단하는 ‘회색지대(Gray zone) 해소 제도’를 도입했다. 또 규제에서 자유로운 국가전략특구를 설정하는 한편, 각종 프로젝트에 대해 규제 완화를 꾀하는 ‘Sandbox 제도’ 같은 정책을 도입했다. 더불어 법인세 인하, 엔저 유도, 자유무역협정 체결도 적극 추진했다. 그 목적지는 일본 기업의 사업 확대와 수익성 제고였다. 그 결과 ‘기업의 수익 확대 → 기업 투자 확대 → 고용 확대’라는 선순환이 나타났고, 이는 일본 경제의 회복을 뒷받침했다.


    일하는 방식의 혁신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 차 방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2월 9일 오후 강원 양양국제공항에 도착해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뉴스1]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 차 방한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2월 9일 오후 강원 양양국제공항에 도착해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뉴스1]

    아베 내각은 농업, 의료, 에너지 분야 등에서 형성된 적폐인 암반규제 혁신에 주력해왔다. 먼저 기업의 농업 진출을 허용하는 정책을 폈다. 덕분에 농촌에서 제조업 육성, 농장의 관광지화, 농수산물 수출 확대 등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의료 분야에서는 원격의료 허용, 새로운 의약품 인허가 신속화 등에 주력했다. 그 결과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헬스케어 비즈니스가 커지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전력소매시장 자유화를 추진했다. 가스회사, 통신사, 종합상사 등이 신규 전력소매사업에 진출했다. 소비자는 다양한 요금체계를 고려해 전력회사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재생에너지 비즈니스가 커지면서 태양광발전과 축전지(ESS)를 결합한 분산형 전력사업이 확대됐다. 블록체인, AI를 활용한 새로운 에너지 인프라 비즈니스도 성장할 수 있게 됐다.

    아베 내각은 IoT, AI, 빅데이터 등 IT 혁신을 가속화하는 한편 이를 자동차, 에너지, 소매, 농업, 금융 등에 적용해 사회를 혁신하겠다는 구상을 ‘Society 5.0’ 전략으로 구체화했다. 기술혁신과 규제완화를 통해 개인과 산업, 인프라 간 연계를 한층 강화한 초연결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심산이다.

    이를 위해 아베 내각은 2017년 6월 9일 ‘미래투자전략 2017’을 발표했다. 이 전략보고서에는 4차 산업혁명의 중점 분야로 ‘건강수명의 연장’ ‘이동혁명의 실현’ ‘차세대 서플라이체인’ ‘쾌적한 인프라와 마을 창조’ ‘핀테크’ ‘에너지 및 환경 제약의 극복과 투자 확대’ ‘로봇 혁명 및 소재 혁명’ ‘기존 주택의 유통 및 리폼 시장을 중심으로 한 주택시장의 활성화’ 등 8개가 기재됐다.

    전략의 구체적 실행을 위해 아베 내각은 내각부에 총리 주재 종합과학기술·이노베이션회의를 꾸려 과학기술정책의 입안과 조정을 꾀하게 했다. 또 여기서 ‘혁신적 연구개발 추진 프로그램(ImPACT)’을 발주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프로젝트 매니저는 리스크가 높지만 사회적 파장이 큰 혁신기술의 개발을 주도한다. 연구개발에는 각 대학과 기업이 참여하고, 성공 후에는 정부가 기업에 실용화를 유도한다. 현재 ‘양자 인공두뇌를 양자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고도지식사회 기반을 실현’하는 프로젝트 등이 추진되고 있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일본 경제의 최근 회복세는 고령자, 여성 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에 힘입었다.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 투입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총요소생산성은 되레 하락했다.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근로자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 부가가치를 제고해야 한다. 그래야 임금 상승도 가능하다. 아베 내각은 이를 위해 수년간 공들여온 ‘일하는 방식 개혁 법안’(고용대책법, 고용기준법, 노동시간등설정개선법 등 8개의 노동 관련법을 개정하는 법률의 통칭)을 내놨다. 법안은 2018년 6월 29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법안에 따르면 근로자를 정규 및 비정규로 나누지 않고 업무의 질과 성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도입된다.

    특히 고소득 근로자의 경우 노동시간 규제에서 제외하는 ‘탈시간급제도(고도프로페셔널 제도)’ 등이 도입돼 향후 일본 노동시장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소득 근로자가 잔업수당이나 휴일근무 수당을 받지 않고 업무의 성과로 평가받는 제도다. 근로자의 창의에 의해 생산성을 높이기로 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탄력적인 운용을 꾀하면서 기업의 애로를 고려했다. 가령 시간외 근무의 상한선에 관해 ‘월간 45시간, 연간 360시간’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사정이 있을 경우 ‘월간 100시간 미만, 연간 720시간’이라는 장시간의 초과근로가 허용됐다.


    지역별·산업별 최저임금

    최근 아베 내각은 산업, 기업의 현실에 맞게 1년 단위로 조정이 가능한 변형근로시간 제도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가령 제조업은 계절에 따라 수요의 급등락이 크다. 서비스업의 근로시간도 고정적이지 않다. 일본 경제에서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지면서 더 유연한 변형근로시간제가 필요하게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아베 내각은 최저임금 제도도 유연하게 운용하고 있다. 정부가 노동계·경제계와 의견을 조율하면서 지역별, 산업별로 최저임금을 차별화해 적용하는 식이다. 즉 일본의 노동정책은 산업과 기업의 특성을 감안해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 정부도 각종 정책의 작성 및 수정 과정에서 노동계·경영계와 심도 있는 대화를 하고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정책 시행 후 예상되는 효과 등을 시뮬레이션하면서 무리 없이 정책을 안착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로부터 얻는 지혜는 명확하다. 장기 저성장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신성장산업 육성과 투자 확대에 나서고, 이를 위해 규제 완화 등 사회혁신에 돌입해야 하며, 일하는 방식을 개혁해 생산성 혁신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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