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산업 대책에 자금 지원 일색
해마다 느는 구조조정 대상 기업, 부실기업 ‘옥석’ 가려야
여신건전성 매년 악화
한진해운 트라우마에 구조조정 기능 실종?
국책은행 중심의 구조조정 한계, 새 통합기구 나와야
‘포용적 금융’을 지향하는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산업은행(왼쪽부터). [홍중식 기자, 뉴시스, 동아DB]
현재 금융계는 정부의 포용적 성장 기조에 맞추기 위해 ‘포용적 금융정책’에 힘을 쏟고 있다. 그 일환으로 시중은행은 중금리 신용대출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상환 능력이 좋은 고신용자 외에 제1금융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서민들에게도 자금 마련의 기회를 주라는 금융 당국의 주문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다. 중금리 신용대출은 신용등급 4~7등급의 중신용자를 대상으로, 연 6~18% 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것이다.
조선업 불황에 지방은행 휘청
산업은행·수출입은행·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최우선 목표도 ‘포용적 금융’이다. 더욱이 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국책은행은 중소기업 지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자원개발 투자에 정책자금을 투입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국책은행에 중소기업 지원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정부는 중·소 조선사, 자동차 부품업체 등 취약산업 활력 제고 대책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위원회는 취약업종 내 한계기업의 자금 지원 역할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중소 부품업체를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는 1조 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2조 원으로 늘리는 방식이다. 자동차업계에서는 3조 원 규모의 지원을 요청했다.앞서 발표된 조선업 활력 제고 방안에서도 정부는 금융자금 지원을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중소 조선사, 기자재업계의 ‘자금 동맥경화’를 막기 위해 7000억 원 규모의 신규 금융지원과 1조 원 규모의 만기연장을 지원한다는 것. 하지만 이를 두고 ‘금융지원 정책 일색’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위해 정책자금을 투입하는 건 이해하지만 이른바 ‘좀비 기업’만 양성하는 것 아니냐는 것. 무엇보다 이는 경쟁력 있는 기업을 선별해 해당 기업이 궁극적으로 자체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조정’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금 지원에 앞서 부실기업을 제대로 골라내는 ‘옥석 가리기’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구조조정 대상 기업 수는 해마다 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국내기업 신용위험평가에서도 구조조정 대상인 C·D등급 기업은 올해 190개로 2011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 중 대기업이 10곳, 중소기업이 180곳이다. 사실상 퇴출 대상인 D등급의 중소기업은 132개로 조선과 철강, 자동차, 전자 등 특정 산업에 몰려 있다. 부실 징후기업에 대한 금융권 신용공여액(빌려줄 때 상대가 반환할 의사 능력이 있음을 믿고 빌려준 액수)은 2조3000억 원에 달한다. 이 중 은행권이 빌려준 금액이 1조8000억 원으로 78.3%를 차지한다.
특히 국책은행의 여신건전성은 매년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6월 말 국책은행의 고정이하여신(부실대출) 비율은 산업은행 3.28%, 수출입은행 3.19%, 기업은행 1.36% 등으로 국내은행의 평균(0.49%)보다 3배가량 높다. 지난해 대비 산업은행 0.1%, 수출입은행은 0.27%포인트씩 올라 건전성이 악화됐다. 문제는 국책은행이 집행하는 정책자금은 결국 국민의 세금이라는 점이다.
민간 금융사의 상황도 비슷하다. 특히 조선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철강과 자동차 등 제조업 비중이 높은 지역 지방은행들의 여신건전성이 우려된다. 경남·울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경남은행의 경우 2019년 9월 말 총여신 대비 위험업종여신 비중은 14%(조선 3.4%, 해운 0.1%, 철강 2.7%, 건설 2.3%, 부동산 PF 5.6%)로 집계됐다. 이는 시중은행(평균 5.7%)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또한 경남은행은 조선기자재업체 관련해 거액의 부실채권이 발생해서 2018년 6월 말 고정이하 여신비율이 1.3%까지 상승했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경남은행의 부실채권은 3092억 원으로 전년 동기 2643억 원보다 1259억 원 증가했다. 김경무 한국기업평가 평가전문위원은 “조선업 구조조정, 글로벌 통상마찰에 따른 수출 환경 악화를 고려할 때 지역 경기에 하방압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와중에 금융 당국은 은행권에 중소 자동차와 조선사 부품업체에 대한 대출 회수 및 축소 자제를 권고하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이들 업종을 위험관리업종으로 지정해 대출한도를 줄여왔는데 다시 늘려야 하는 상황이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정부와 금융 당국의 방침은 이해하지만 은행 처지에서는 부실기업에 대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고 항변했다.
금융위, 금융 논리보다 산업 논리에 무게 둬
한편 재계에서는 현 정부가 이처럼 구조조정 기능에 소극적인 이유에 대해 박근혜 정부 때 추진한 ‘한진해운 구조조정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지난 2016년 금융위원회는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 논리를 우선해 한진해운을 결국 법정관리로 보낸 결과 해운업 경쟁력이 훼손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더욱이 한진해운 구조조정이 한창일 당시 일명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를 감지하고도 4조 원대의 자금 지원을 결정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관치금융이 도마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은 자취를 감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금융위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 논리와 산업 논리 중 산업 측면에 좀 더 무게 추를 두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최근 자동차업계 현장 방문에서 “한계기업을 구조조정하는 데 있어, 결국 자금 지원 면에서 금융위의 핵심 역할이 계속돼야 한다”고 밝혔다. 물론 자동차나 조선업 등의 제조업은 협력사 직원까지 포함해 수만 명의 ‘식구’가 딸려 있고, 지역 경제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금융 논리로만 구조조정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금융 당국의 구조조정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는 ‘좀비 기업’을 솎아내기가 쉽지 않다.
금융위가 자동차·조선업계의 구원투수로 믿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국책은행들이다. 이들 은행은 정책자금 지원을 포함해 정책금융 본연의 업무인 구조조정 역할도 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구조조정을 줄이라는 정부 기조에 맞춰 해당 은행들의 구조조정 관련 부서를 폐지하거나 축소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말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관련 부서를 축소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혁신기업성장본부를 부문으로 격상하고 기존 구조조정 부문은 본부로 축소했다. 산업은행에 앞서 조직 개편을 단행한 한국수출입은행도 구조조정 관련 조직을 축소했다. 해양·구조조정본부와 함께 창원지점 등 4개 지점과 출장소 문을 닫은 것. 따라서 일각에서는 국책은행들이 기업 구조조정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전담하는 별도의 정책금융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 구조조정 업무 통합 논의
지난해 5월 1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 혁신성장을 위한 정책금융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한편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전 금융감독원장)도 최근 ‘정책금융기관, 통합형 체제로의 근본적 개편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구조조정 전문 자회사를 설립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업무에서 구조조정 업무를 분리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밝혔다. 정책금융기관의 통합과 재편에 대한 논의는 이미 금융권 안팎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다. 해당 기관으로는 금융위 산하 산업은행,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주택금융공사 등 4개 기관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무역보험공사, 기획재정부 산하 수출입은행, 국토교통부 산하 주택도시보증공사,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기술보증기금 등이다.
통합을 주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해당 기관들의 역할이 상당 부분 중복된다는 점에 있다. 먼저 산업은행은 대기업 여신을 주 업무로 하지만 현 정부 들어 기업 상생이 강조되면서 중소기업 지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따라서 기존에 중소기업을 지원하던 기업은행과 그 역할이 겹치게 됐다. 또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온렌딩 대출’ 사업이 중복된다. 온렌딩 대출이란 국책은행이 민간은행에 중소기업 대출자금을 빌려주면 민간은행이 자체적인 여신심사를 통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간접대출 제도다. 그 밖에도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는 보증과 보험으로 업무가 분담되긴 했지만 손실이 생길 경우 정부가 책임진다는 점에서는 같고,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도 두 기관의 중복 보증이 심각한 수준이다. 따라서 보증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두 기관을 통합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논의만 될 뿐 현실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각 소관부처의 ‘몸집 키우기’와 직결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부처 간 이기주의는 정책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자칫 국가 주요 산업의 근간마저 흔들 수 있다. 관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기업 구조조정 본연의 역할을 되찾고, 기관별 업무 중복성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컨트롤타워가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