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

‘혼밥판사’의 한끼 | 라면

라면중독 軍검사가 라면 끊은 사연

  • 정재민 전 판사·작가

    입력2019-02-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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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몇 번을 주저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분식집에 들어가서 라면을 시켰다. 써야 할 판결문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심하고 몸의 컨디션이 나쁜 날에는 오히려 내 몸을 거칠게 다루는 습성이 있다. 라면같이 짜고 몸에 부담이 되는 음식을 먹는 것도 그중 하나다.

    요즘은 덜하지만 불과 서너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 라면중독자였다. 참고 참아서 일주일에 서너 번 먹었다. 어릴 때나 청년 때는 제한 없이 먹었다. 라면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마치 흡연자가 한동안 담배를 못 피운 것처럼 괜히 신경이 예민해지고 불안해지는 금단현상이 생기곤 했다.


    라면의 매혹

    그러나 마흔을 넘기니 라면을 소화시키는 것이 버거워졌다. 자연스럽게 라면 먹기를 주저하게 됐고 차츰 전보다 덜 먹게 됐다. 그래도 식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같이 밥을 먹는 누군가가 라면을 시키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당화하면서 (실은 내심 라면 시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못 먹은 라면을 다 몰아 먹을 기세로 허겁지겁 먹었다. 부대찌개를 먹을 때도 늘 라면 사리를, 그것도 두 개씩 넣었다. 내 자식들에게는 라면을 먹지 말라고 하면서 나 혼자 조용히 먹다 들킴으로써 아빠의 권위를 라면 값에 팔아치우곤 한다.

    나만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라면중독자는 니코틴중독자만큼 흔하다. 어느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국민이 1인당 라면을 연간 70개 이상 먹는다고 한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먹었으니 이제까지 아마 5000개는 먹었을 것이다.

    라면 요리법은 다양하다. 라면에 설탕을 넣으면 면이 쫄깃해지고, 스프를 줄이는 대신 간장을 넣으면 국물이 정갈해진다. 멸치나 가쓰오부시를 넣어 깊은 육수 맛을 내는 경우도 있다. 양파껍질을 넣고 끓이면 면의 기름기가 빠져서 맛이 더 담백해진다. 오징어나 홍합을 넣어 해물 맛을 낼 수도 있다. 소시지를 잔뜩 넣어 먹으면 이른바 ‘존슨탕’처럼 고소하고도 구수한 맛이 난다. 나는 이상의 레시피를 다 시도해봤지만 라면에 우유나 콜라를 넣는다는 사람 말은 따라본 적이 없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양은냄비가 내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라면의 먹음직스러움을 일단 시각적으로 맛봤다. 나는 라면 인기의 3할은 ‘비주얼’에 있고, 그중 대부분은 면, 달걀, 국물, 고추, 마늘 등 갖은 재료와 양은냄비가 일사불란하게 강렬한 ‘주황색’ 계통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마치 같은 계통 색으로 넥타이, 셔츠, 슈트, 시곗줄을 맞춰 입은 신사처럼 시각적인 통일성과 조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꼬들꼬들한 면 위에 올라간 잘게 썬 파와 고추 조각 고명이 그 아래 면발과 함께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꼼지락거렸다. 그릇 구석에서 노른자와 흰자가 뒤엉킨 채 풀려 있는 달걀은 마치 영국 판사의 가발 같다. 달걀이 풀려있는데도 국물이 탁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라면을 끓여주신 분의 배려에 감사하게 된다.


    국물과 달걀의 긴장관계

    라면 국물과 달걀은 긴장관계에 있다. 달걀이 라면 국물과 스프를 흡수해 적정 농도를 흐트러뜨리기 십상이다. 특히 달걀을 넣고 별생각 없이 마구 휘저어버리면 라면 국물이 탁해진다. 이를 막으려고 스프를 넣기 전에 달걀부터 어느 정도 익혀놓거나 아예 달걀을 따로 삶아 라면에 올리는 집도 있다.

    젓가락은 쇠젓가락보다 나무젓가락이 좋다. (빨래집게로 빨래를 집듯)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는다기보다는 (빨랫줄에 빨래를 널 듯) 젓가락 위에 면발을 널어놓는다. 그래야 면이 공기를 더 머금고 더 쫄깃쫄깃해진다. 꼬불꼬불한 라면 면발은 칼국수나 냉면 면발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초등학생 내 딸을 안으면, 딸이 일부러 짓궂게 나를 힘들게 하려고 몸을 축 늘어뜨리곤 하는데 그러면 칼국수나 냉면 면발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무겁다. 그러다 딸이 두 팔로 내 목을 감고 딱 달라붙으면 가벼워지는데 그럴 때는 라면 면발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가볍다.

    그러고는 호로로로로로록! 진공청소기처럼 면발을 빨아들인다. 라면 인기의 또 다른 3할은 이 소리에 있다. 들숨과 국물이 두 입술 사이에서 꾸불꾸불한 면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마찰음을 내기 때문에 소리가 크고 시시각각 다른 소리가 난다. 라면에 들어 있는 떡은 나중에 먹어야 한다. 국물을 어느 정도 흡수해야 더 맛있기 때문이다.

    같은 라면도 집에서 만든 것보다 분식집에서 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 지방 소도시의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야간 하굣길에 인근에 있는 모 대학 구내식당에 들러 라면을 먹곤 했다. 한 그릇당 600원이었는데 지금도 그보다 더 맛있는 라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돌아보면 불의 화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겨울날 산중턱에서 코펠에 끓여 뚜껑에 올려놓고 먹던 라면도, 어릴 적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상한 방법으로 끓여주던 라면 맛도 잊을 수 없다. 라면에 얽힌 추억을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강력한 두 가지 기억이 있다. 모두 강원도 화천의 전방부대에 군검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읍내에 처음으로 편의점이 들어섰을 만큼 낙후된 곳이었다. 내가 살던 숙소는 읍내에서도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내 전임자가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8강에 가고, 4강에 진출한 게 기뻐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태극기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불빛 한 점, 사람 소리 하나 찾기도 어려웠다고 하던 곳이다.

    군검사로 근무할 당시 우리 사단 군인들이 죽으면 내가 직접 현장에 가봐야 했다. 밤에 혼자 자다가 휴대전화 벨이 울리면 영락없이 헌병 계장이 누군가 자살했다고 전했다. 그날 새벽 3시에 온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헌병 계장은 특유의 허스키하고 굵은 목소리로 하사 A가 군화 끈에 목을 매고 자살한 상태로 아직 매달려 있다고 전했다. 시체를 만나려고 컴컴한 산길을 혼자서 차를 몰고 달리고 있으니 별안간 흰 소복을 입은 여자 귀신이 보닛 위로 툭 떨어지면서 말을 걸 것 같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현장에 도착하니 3층 건물을 둘러싼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 계단 위쪽에 A의 시체가 매달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회전문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185cm의 장신이었다. 내가 그 아래로 다가가 위를 올려다보자 A는 눈꺼풀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혀를 조금 내민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A의 시체를 내리게 하고 곧바로 영장을 받아 부검을 하도록 했다.


    라면과 공깃밥

    현장에 차려진 사무실에서 헌병으로부터 사건 개요를 보고받았다. 그에 따르면 A는 이미 한 달 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키가 커서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다리만 부러지고 죽지 못했다. 3주간 깁스를 해서 다리를 고친 다음 이렇게 목을 맨 것이다.

    그때 막 어느 수사관이 들어오더니, 방금 유족에게 A의 부고를 전했더니 아버지, 어머니, 친형 모두 심드렁하게 그의 장례는 알아서 치러달라고 하더라고 했다. 나는 납득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직접 그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가 안 오니 형이라도 와야 한다고 고집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꼭 가족 누군가가 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무심한 가족에 대해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쳤다.

    부검은 심야에 개시됐다. 부검 중 그의 형이 도착했다. 가죽점퍼를 입고 두 손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은 채 동생을 부검하는 장면을 쳐다보다 피식피식 웃었다. 채 50분도 머무르지 않고 그렇게 있다가 그냥 알아서 잘 처리해달라고 말하고는 떠나버렸다. 나는 A가 자살한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막연히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A의 평소 습관 중 두 가지가 특이했다. 하나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친한 동료가 전혀 없었고 간부인데도 병사들에게 존댓말을 썼다는 점이다. 둘은 그가 저녁식사로 늘 숙소 작은 식당 구석에서 밥을 혼자 먹었으며, 메뉴가 한결같았다는 것이다. 라면과 공깃밥. 나는 그가 커다란 등짝으로 다른 모든 사람을 등지고 혼자서 라면에 공깃밥을 말아 먹는 장면을 떠올렸다. 실제로 본 적 없는 장면인데도 라면에 공깃밥을 말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자꾸만 그 영상이 떠오른다. 그 때문에 라면에 공깃밥을 먹지 않은 지 오래다.


    라면 세 그릇

    의무대 소속 일병 B는 탈영병이었다. 탈영 직후 산속에 이틀 동안 숨어 있던 그는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제 발로 마을에 내려왔다가 순찰을 돌던 헌병에게 잡혔다. 체격이 왜소하고 눈빛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조서를 작성하려고 컴퓨터를 켜고 그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다가 나는 문득 “그런데 밥은 먹었니?”라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했다. 일단 뭘 먹이고 싶었다. 수사고, 탈영이고, 처벌이고, 군 복무고 다 사람이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그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수갑을 풀어줬다. 나는 끼니를 굶지 않았지만 라면중독자로서 내 것도 하나 같이 끓였다. 그런데 B는 라면 한 그릇을 말 그대로 두세 젓가락 만에 다 먹어치워 버렸다. 놀라서 입이 안 다물어졌다. 내 것도 줬더니 그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순식간에 다 먹었다. 라면 하나를 더 끓여주었다. 비로소 그의 눈빛과 표정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탈영 동기를 물었다. 그는 그냥 군생활이 힘이 들어서라고만 답했다. 혹시 누가 괴롭혔는지 거듭 물어도 번번이 그런 사람은 전혀 없다고 했다. 예전에도 탈영을 두 번 한 적이 있는데 기록상 그때도 별 동기가 없었다. 두 달 뒤 열린 재판에서 재판부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나 재판 중간에 별말이 없던 B가 판결이 다 선고된 직후에야 뜬금없이 말했다. “재판장님, 제가 탈영한 것은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물었다. 그러나 B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집행유예의 뜻(유죄이지만 이제 곧 풀려난다는 것)을 잘 몰라서(그때는 집행유예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선처를 구하려고 급하게 만들어낸 변명을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날 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소름이 끼쳤다. 심야에 출동했다. 의무대 천장에 목을 맨 B를 올려다봐야 했다. 달빛 아래 B의 얼굴은 희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라면을 먹이면 생기가 돌아올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라면을 함께 먹지 않았다면 흐르지 않을 눈물이었다.

    직후부터 부대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두 병장이 지속적으로 B를 괴롭혀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뒤늦게 깨달았다. 재판이 선고된 직후 B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이제 곧 풀려난다는 집행유예의 뜻을 오히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곧 원래 있던 부대로 되돌아가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일로 나는 적잖은 죄책감을 느꼈다. 법조인의 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렇게 둔감한 내가 과연 그런 일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일 때문이다. 한동안 라면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죄책감도 고민도 둔감해졌다.


    * 이 글은 실제 사건을 일부 각색한 에세이입니다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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