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1장 끝나…인생의 새로운 장을 준비”
“만화밖에 할 게 없어 선택한 길, 후회 없이 달렸다”
‘공포의 외인구단’ 대성공 후 찾아온 긴 소송전
“운명은 피할 수 없다. 부서져도 맞서 싸워야 할 뿐”
“묘비명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 내 의지대로 죽다’라고 쓸 터”
[홍중식 기자]
꼭 40년이 흐른 2019년, 이씨는 까치에게 잠시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먹과 붓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온 만화가의 삶도 40년 만에 ‘일시정지’한다. 화실을 접고 “인생의 새로운 장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랫동안 작업해온 손때 묻은 책상 앞에서 이씨는 “지난 연말 화실 식구들과 송별회를 했다. 송년회 말고 송별회. 그동안 만화 배경 작업과 채색 등을 거들어준 이들과 인사하고 나니 ‘이현세 삶의 1장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입을 열었다.
인생의 한 막, 스스로 내리다
- 갑자기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있나.“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것 같다. 쉼 없이 만화를 그렸고 어느새 65세가 됐다. 꽤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70세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묻곤 했다. 그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거다. 작가로서나 사람으로서나 적은 나이가 아니지 않나. 여태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앞으로 남은 삶은 흔들의자에서 여유 있게 보내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존경하는 최인호 선생처럼 피를 토하고 죽는 그날까지 책상 위에서 글 쓰는 길을 택할 수도 있을 거다. 지금 그 기로에 섰다. 열심히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해보려 한다.”
- 수십 년간 운영해온 화실을 접을 만큼 집중해 고민할 일인가.
“화실을 두면 식구들 월급 챙겨주려고 어느 정도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다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낼 것 같았다. 한국 만화 주류가 웹툰으로 옮겨간 지 꽤 됐다. 단행본을 내는 작가도 작업은 대부분 컴퓨터로 한다. 반면 나는 모든 만화를 종이에 연필로 그려왔다. 발표는 웹툰으로 할지언정 창작 과정은 아날로그 방식을 지켰다. 그러자니 정해진 시간 안에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과 계속 같이 있으면 앞으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일단 혼자가 되자. 혼자가 돼 냉정하게 미래를 생각해보자고 마음먹은 거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이씨는 회색 니트를 입고 메이저리그 뉴욕양키스 구단 야구 모자를 쓴 차림이었다. 군살 없는 체격과 힘 있는 눈빛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그는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얼굴이 엉망이라 모자를 썼다”고 했지만 사진 촬영에 맞춰 패션 아이템으로 택했다 해도 믿을 만큼 제법 잘 어울렸다.
- 은퇴, 노후 등에 대해 얘기하기엔 너무 젊은 듯 보인다.
“아직 그림 그릴 수 있다. 눈도, 손도 괜찮다. 최근 연재 제안을 받은 게 있고, 1997년부터 강의해온 세종대 정년도 2년 남았다. 이 시점에 미래를 고민해보려는 거다. 돌아보면 언제나 마음 끌리는 대로 살았다. 내가 만화를 통해 특별히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생각해보니,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는 거의 다 풀어냈더라. 그럼 지금은 내가 뭘 원하나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러려고 일단 막을 한 번 내리는 거다.”
그렇게 이씨와 마주 앉아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았던 40년을 되짚어봤다. 그의 데뷔 연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이씨가 회장으로 몸담았던 사단법인 한국만화가협회 작가 소개 페이지에는 1979년, 2014년 펴낸 자전에세이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에는 1978년으로 적혀 있다. 등단작으로 거론되는 작품도 ‘저 강은 알고 있다’와 ‘시모노세키의 까치’ 등 여러 편이다. 1980년대 언론에는 그가 SF만화 ‘해저도시와 나비소녀’(나비소녀)로 만화계에 나왔다는 기사도 있다. 이에 대해 묻자 이씨는 “세상에, 나비소녀라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이내 쿡쿡 웃으며 “그야말로 쓰레기였던 만화”라고 덧붙였다.
쓰레기통에서 건져 올린 데뷔작
-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쓰레기라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나.“만약 그 만화를 본다면 쓰레기라는 걸 인정하게 될 거다(웃음). 그 당시 SF 만화가 인기였다. 한 출판사가 트렌드에 맞춰 SF를 그려달라고 해서 작업했는데, 나는 도무지 모르는 분야라 무척 고생한 기억이 난다. 완성 뒤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억에서 지워버렸나 보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데뷔작이 맞는 것 같다. 활동 초반에는 나비소녀 말고도 쓰레기를 많이 그렸다. 사실 전부 다 쓰레기였다.”
이씨는 ‘하하’ 웃으며 “몇 년 후 초기작을 다 태워버려서 이제는 세상에 원고가 남아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 작품을 태웠다니 무슨 얘긴가.
“‘공포의 외인구단’이 완간된 때가 1983년, 내 나이 스물아홉 살 때다. 그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출판사들이 내 과거 원고를 전부 모아 출판하겠다고 나섰다. 이현세 이름만 달면 팔려나가던 때라 제법 큰돈도 제시했다. 순간 마음이 흔들리더라. 나는 알고 있다. 그 작품들이 얼마나 낯 뜨거운 수준인지. 그런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욕심이 생기는 거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초기 원고들을 싹 태워버렸다. 당시엔 CD 같은 별도 저장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원고를 태우면 영영 끝이었다. 그렇게 초기작이 다 없어졌다.”
- 한창 젊을 때였는데 어떻게 그런 선택을 했나.
“어렸으니까 가능했을 거다. 출판 욕심에 마음이 흔들리고, 태워버릴 용기도 내고.”
- 초기작 중 스스로 생각할 때 괜찮은 작품은 없나.
“글쎄. 지금 ‘최후의 곡예사’가 떠오른다. 나는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만화가가 되겠다며 상경해 이런저런 화실을 돌며 문하생 생활을 했다. 몇날 며칠씩 밤새워 그림 그리고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곤 했다. 마음속엔 늘 내 만화를 세상에 내놓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하지만 나만의 캐릭터, 스토리를 쓰는 게 쉽지 않더라. 여러 번 실패하고 좌절하며 의기소침해졌다.
1979년 결혼한 무렵에는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신혼집에 장만한 TV를 틀어놓고 빈둥거리다 ‘명화극장’에서 존 웨인 주연의 ‘지상 최대의 서커스’라는 영화를 봤다. 곡마단 곡예사 이야기인데, 문득 어린 시절 고향에서 서커스를 본 기억이 떠오르더라. 영화 이야기와 내 추억을 엮어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상하권 두 권 분량을 완성했다.”
- 읽어보니 제법 괜찮던가.
“그럴 리가. 완전 쓰레기였다(웃음). 내가 이걸 왜 썼나 싶어 막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잤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니 아내가 그걸 한 장 한 장 다리미로 다리고 있더라. ‘내가 보기엔 무척 재미있는데 왜 버렸느냐’면서.
돌아보면 그때 아내한테 두 가지 마음이 있었을 것 같다. ‘결혼을 했고 이제 곧 아이도 낳아 길러야 할 텐데 왜 일을 안 하는 거야. 이거 갖고라도 일을 좀 해봐’ 하는 마음 하나, ‘읽어보니 그런대로 괜찮구만’ 하는 마음이 또 하나. 어쨌든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약간 양심에 가책이 들었다. 아내가 다려놓은 스토리를 기반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게 바로 ‘최후의 곡예사’다. 그 작품이 다행히 팔리면서 정말 살림을 꾸리고 아이도 낳아 기르게 됐다.
여전히 쓰레기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문제가 많은 작품이다. 그래도 하나 건진 건, 여기서 처음으로 까치 캐릭터를 그렸다는 거다. 삐죽삐죽 솟은 짧은 머리의 반항아. 세상과 부딪쳐 부서져버리는 청춘. 그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게 ‘최후의 곡예사’다. 이후 ‘시모노세키의 까치’ 등을 통해 조금씩 캐릭터를 발전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내 진짜 데뷔작은 ‘최후의 곡예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작품을 그리고 하나하나 까치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알았다. 만화가가 되려면 쓰레기라도 계속 그려야 한다는 걸.
지금 학교에서 제자들한테도 늘 이야기한다. ‘네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한 번 더 그려라. 스케치북을 들고 매일 10장씩 크로키하라. 1년이면 3500장, 10년이면 3만5000장이 된다. 그렇게 온갖 인간 자세와 패션과 풍경을 그리면, 이 세상에서 그려보지 않은 게 거의 없어진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해라. 온갖 아이디어와 나만의 줄거리를 갖게 될 거다’라고. 나는 그렇게 만화가가 됐다.”
‘빨갱이’ 집안의 꼬마 어른
만화가 이현세 씨가 자신의 페르소나 까치 그림 앞에 섰다. [홍중식 기자]
“천재는 네댓 살에 작곡을 시작한 모차르트 같은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말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만화를 붙잡고 얼마나 분투했는지 잘 안다. 그러니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믿지 않을 거다.”
분투 또는 투쟁. 이씨는 만화를 향한 자신의 노력을 설명할 때 이런 단어를 썼다. “나는 만화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살아남자면 더 독하게 매달려야 했다”고도 했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씨 삶은 ‘옴짝달싹 할 수 없게’ 운명 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들은 가족사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이씨 조부모는 1920년대 생계를 위해 만주로 이주했다. 거기서 할아버지가 일본인 순사 총에 맞아 숨진 뒤, 20대에 청상이 된 할머니는 세 아들을 이끌고 고향 경북 울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에서도 가난은 이들 가족을 떠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둘째 아들이 돈을 벌어오겠다며 다시 만주로 떠났다. 그사이 38선이 생기면서 돌아오지 못하게 된 둘째가 어머니 앞에 나타난 건 6·25전쟁 때다. 인민군복을 입고 온 아들은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은 뒤 ‘좋은 세상이 오면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국군이 마을에 진주했다. 이씨 가족은 부역자로 낙인찍혔고, 헌병대에 끌려간 큰아들은 그날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하나 남은 막내아들이 손자를 낳았을 때, 할머니는 그 아이를 홀로 남은 큰며느리 양자로 들이도록 했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그 아이가 바로 이씨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첫 순간부터 큰어머니를 어머니로, 실제 부모님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로 알고 살았다. 큰집 누나 두 명을 친누나로, 친동생은 사촌동생들로 여겼다. 내가 초등학생 때 친부가 감전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역시 삼촌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다. 학교 수업에 빠지면 안 된다고 우기며 장례식장에도 안 갔다. 겨우 아홉 살에 ‘집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되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걸까. 그때 왜 그리 냉정했던 건지 나도 모른다.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지난 내 행동들이 후회돼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 부역자로 낙인찍힌 집안에서 태어나, 철들기 전부터 ‘가장 나이 많은’ 남자로 사는 것이 이후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돌아보면 매순간이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와 두 분 어머니께 많이 사랑받았고, 존중받았다. 내가 자고 있으면 누님뿐 아니라 어머니도 내 발목을 넘어가지 않으셨다. 만화가로 데뷔한 뒤 마초라는 지적을 많이 들었는데, 어린 날의 경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가난하긴 했어도 집 안에서 나는 낙천적으로 자랐다.
다만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연좌제가 무섭던 시절이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내게 늘 입조심을 시켰다. 하지만 내가 말 안 한다고 우리 집이 ‘빨갱이 집안’인 걸 사람들이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어른이 돼도 취직하기 어렵고 군인이나 공무원은 꿈도 못 꾸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때 붙들 수 있는 게 그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제법 소질이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잘 그렸고 상도 좀 받았다. 화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화에 갇힌 20대
이현세 씨 작업실 벽에는 ‘만화 삼국지’ 등 주요 작품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씨는 조만간 이 공간을 접고 ‘인생 2장’을 준비할 예정이다. [홍중식 기자]
“고3 때 신체검사에서 색약 판정을 받은 거다. 당시엔 색약이면 미대를 못 갔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운명은 내게 이렇게 가혹한지 생각했다. 대체재로 떠올린 게 만화다. 만화는 흑백으로만 완성해도 되는 그림 아닌가.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지만, 직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기는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만화는 그리는 것도 죄, 보는 것도 죄, 갖는 것도 죄처럼 여겨졌다. 학교에서 보다 들키면 압수당하고, 만화방 간 게 걸리면 정학당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세상 무엇도 할 수 없는 몸이 돼버리지 않았나. 그렇게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만화를 배우겠다며 상경해버렸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다. 여기서 짚어둘 게 있다. 그의 출생연도에 대한 것이다. 이씨 데뷔 연도와 데뷔작이 여기저기 다르게 적혀 있듯,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이씨에 따르면 실제 출생연도는 1954년이다. 그러나 영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 시골마을에서 종종 그랬듯 부모가 출생신고를 2년 후에, 1956년생으로 했다. 이 때문에 일부 자료에는 그의 나이가 1956년생으로 나온다. 이씨는 학교를 제 나이대로, 즉 두 살 형 누나들과 함께 다녔다. 그러니 사회에 진출했을 때 기록으로 보면 2년의 유예기간이 생겼다. 그는 바로 군대에 가는 대신 만화가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살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 오랫동안 미대 진학의 꿈을 품고 살던 청년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와 버티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마음뿐 아니라 몸도 무척 고됐다. 당시 만화는 예술보다 노동에 가까웠다. 작업실 풍경 또한 공장과 다르지 않았다. 비좁은 방 하나에 네다섯 명씩 앉아 도제 방식으로 작업했다.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는 급료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가에게 하숙비를 내며 살아야 했다. 그때 화실이 모래내 근처에 있었는데, 매일 통행금지 시간 직전이 되면 가좌역 근처를 돌며 담배꽁초를 주워 모았다. 그걸 피우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6개월쯤 지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재수해서 문예창작과 같은 데 들어가자, 글을 쓴다면 또 어떻게 삶을 꾸려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그런데 왜 대학에 가지 않았나.
“운명이 또 한 번 내 발목을 잡았다. 그때 집에 갔다가 친척들 얘기 속에서 우연히 내가 양자로 들인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된 거다. 큰 충격이었다. 그런 일을 갑자기 당하면 첫째 자괴감이 든다. 분명히 그동안 알아챌 만한 단서가 무척 많았는데, 할머니 어머니 누나 동생들 행동에 석연치 않은 게 있었는데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왔을까, 내가 이렇게 우둔한 놈이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그다음엔 배신감이 찾아왔다. 어떻게 모든 식구가, 내가 믿고 의지한 그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오랜 시간 철저히 나를 속여왔지 하는 생각이다. 집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한테서 도망치려 다시 화실행을 택했다. 이때 서울에 올라오고부터는, 나는 힘들어도 의지할 데가 없어져버렸다. 고향과 가족이라는 마지막 안전망마저 사라지고 나서, 정말 미친 사람처럼 만화에만 몰두했다. 거짓말 좀 보태서 말하면, 당시 우리 동네에 있던 모든 집 괘종시계 소리가 내 귀에 다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예민하게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림을 그렸다. 불면증으로 하루에 한 시간도 채 못 잤다. 꼬챙이처럼 말라가면서도 만화만 붙들었다. 스토리도 썼다. 그런데 번번이 쓰레기였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 그러다 까치를 만든 건가.
“그렇다. 까치. 나를 닮은 캐릭터.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내 삶에서 도망쳤던 것 같다. 내 이야기를 세상에 하지 못했다. ‘최후의 곡예사’에서 처음 어린 시절 추억을 조금이나마 끄집어냈을 때, 비로소 스토리가 술술 풀려나가는 걸 경험했다. 솔직한 것, 정직한 것만큼 힘 있는 게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이현세 만화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
이후 까치는 이씨의 페르소나가 됐다. ‘까치의 오계절’ 주인공은 양부모 아래서 자란다. 자기가 부모 원수의 아들임을 뒤늦게 알고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국경의 갈가마귀’ 속 주인공에게 부여한 결말도 자살이다. 구한말 만주에서 살던 조선 소년은 비적들에게 누이와 부모를 잃고 천신만고 끝에 검술을 익혀 원수에게 복수하지만, 결국 같은 민족에게 칼을 겨눌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고 스스로 죽어버린다.
만화라면 모름지기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는 게 상식으로 통하던 시절, 이씨 만화는 세상에 큰 충격을 줬다. 그리고 마침내 ‘공포의 외인구단’이 나왔다. 사랑하는 여인의 소망을 들어주고자 날아오는 야구공을 얼굴로 막아내다 끝내 부서져버리는 까치 이야기는 일대 신드롬을 일으켰다. 만화뿐 아니라 1986년 최재성, 이보희 주연의 영화도 큰 인기를 모았고, 가수 정수라가 부른 주제곡 또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씨 원고료도 치솟았다. 한때 담뱃값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는 ‘공포의 외인구단’ 발간 후 단행본 한 권당 500만 원을 약속받았다. 서울 목동 아파트 분양가가 2000만 원이던 시절, 책 네 권만 내면 아파트 한 채가 생기는 수준이었다.
갑작스러운 성공과 깊은 수렁
- 그 시절 많은 만화방 이름이 ‘까치만화방’으로 바뀌었던 기억이 난다.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만큼 큰 화제를 모은 만화는 없었다고 말한다.“철없던 시절이라 그저 얼떨떨했던 것 같다. 하루아침에, 나 스스로 전혀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이 알려진 거다. 이후 오랫동안 세상의 기대치를 좇아가느라 많이 힘들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우리나라 만화 문화가 전환점을 맞은 건 사실이다. 만화는 어린애만 보는 것이라는 시각이 바뀌고, 만화 유통구조가 대본소에서 서점으로 옮겨갔다. 그런 시대의 개척자라고 봐서 그런지, 당시 언론이나 평론가들이 나를 무척 좋게 평가해줬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도 ‘이현세 작품 세계’라고 포장해줘서, 그걸 받아들여 소화하며 배워나갔다.”
이씨는 “한편으로는 동료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다”고 했다. “내가 친구들 운을 다 혼자 가져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 윗세대만 해도 여러 선배가 각자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자기 몫의 일을 했다. 그런데 내 또래에서는 그게 한 군데 쏠려버렸다. ‘공포의 외인구단’ 성공 후 많은 출판사에서 ‘이현세 스타일’을 원한 거다. 상당수 작가가 자존심을 꺾고 그 요구에 따라주거나, 아니면 만화계를 떠나야 했을 거다. 특히 부드럽고 아름다운 그림 그리던 작가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만큼 그 시절 ‘이현세 스타일’이 새롭고 매력적이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1980년대가 매우 억압적인 시대였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무조건적 복종을 강요했다. 부모가 밥 먹여주고 학교 보내주니 열심히 공부해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라고 했다. 그런데 까치는 달랐다. 까치는 독자들에게 ‘너네는 기계가 아냐. 노리개가 아냐. 인형이 아니라고. 불만을 가져. 그리고 대들어. 저항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무 준비 없이 책을 집어든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확 접하니 충격이 컸던 거다. 그때 독자들이 요즘도 나를 보면 ‘마치 금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 큰 성공 이후 계속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데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
“오히려 캐릭터 틀이 딱 잡히고 나니 수월한 면도 있었다. 거의 모든 독자가 까치 마동탁 엄지를 알았다. 예를 들어 ‘아마게돈’에서 ‘케사로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얘는 딱 봐도 마동탁이다. 그러면 기존에 내 만화를 읽은 독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얘가 총사령관이구나’ 하는 걸 바로 알아버린다. 작가로서 엄청난 자산이 생긴 거다.”
바로 그 ‘아마게돈’으로 이현세는 또 한 번 큰 성공을 거뒀다. 이씨는 30대 중후반, 자신이 삶에서 절정에 올라 있었다고 회고했다. “만화책 한 권 분량을 스케치하는 데 지우개질 한두 번으로 충분했다”고 한다. “머릿속에 펼쳐진 풍경과 상황들이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손과 바로 연결되는, 그야말로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그는 스포츠신문에 연재한 ‘남벌’로도 대성공을 거뒀고, 다른 분야까지 영역 확대를 꾀했다. 제작사를 세워 ‘아마게돈’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든 것이다. 결과는 뼈아팠다. 당시 발행한 백서에 따르면 총 소요비용 25억300만 원, 순손실액이 11억1600만 원에 달한다.
- 1980년대가 최고의 시기였다면 1990년대에는 고난이 이어졌다. 애니메이션 ‘아마게돈’ 실패 이후 ‘천국의 신화’로 긴 소송에 휘말리지 않았나.
“30대에 정점을 맛봤다면, 40대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1997년 내 만화가 음란하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검찰 소환을 당했고, 이듬해 기소됐다. 이후 2003년 대법원에서 무혐의판결을 받기까지, 햇수로 7년을 도리 없이 흘려보냈다. 한 컷 한 컷 그릴 때마다 ‘이건 법에 걸릴까, 안 걸릴까’ 고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내 안에 있던 창작 의욕, 에너지가 다 사라져버렸다. 매일 술을 마시고 골프를 배웠다. 달랑 한 줄로 ‘당신은 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고 나서 세상을 돌아보니, 만화 세계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단행본에서 웹툰으로 대변혁을 맞은 뒤였다.”
만화가로서의 자존심
이현세 씨가 신동아 독자에게 보낸 그림 선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이씨의 좌우명이다.
- 그러나 아직 창세기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 ‘천국의 신화’ 6권 출간 만에 벼락을 맞았다.
“당시 학교폭력이 사회문제가 됐다. 이른바 ‘일진회’가 일본 만화에 나온 용어라는 게 알려지면서 사정 당국이 만화를 단속하겠다고 나선 것 같다. 그것만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천국의 신화’를 문제 삼은 건 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건 신화다. 태초의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지 않았다는 게 기본 설정이다. 그러다 어느 날 서로 교미할 때 얼굴을 마주보면서 상대의 표정을 읽고 감정이라는 걸 배려하게 됐고, 거기서부터 인간이 동물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고 그렸다. 이 부분을 묘사하며 옷을 입지 않고 성교하는 장면을 넣은 게 문제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성인만화에. 당시 검찰에서 약식기소한 대로 벌금 300만 원 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건 그래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창작의 자유’ 그리고 ‘만화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나선 것이다. 중견 만화가로서 느낀 책임감도 그의 결심에 힘을 보탰다. 당시 이씨를 제외하고도 여러 만화가가 형사처벌 대상이 됐다. 일부는 벌금을 납부했지만 이씨 등의 법률 싸움 끝에 ‘미성년자보호법’ 자체가 위헌결정을 받으며 무죄가 됐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었을까. 그렇게 보긴 어려울 듯하다. 길고 긴 소송전을 치르는 사이 이씨는 당뇨, 협심증 등 각종 질병을 얻고 말았다. 대법원 판결 후 다시 ‘천국의 신화’ 창작을 이어갔지만, 이미 기획 초기의 꿈과 열정은 상당 부분 잃은 뒤였다. 그는 “작품을 시작하던 시절 나는 ‘역사는 도전과 투쟁의 기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재판을 치르면서 ‘역사는 그래봤자 순리구나’로 생각이 바뀌었다. 역사를 투쟁의 기록이라고 볼 때는 영웅 개개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이러거나 말거나 결국은 거대한 강물에 휩쓸려버리고 말지’라고 생각하게 되면, ‘영웅 또한 그런 피라미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면 이야기 흐름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작품의 불행이 바로 거기 있다. 내 관점이 바뀌면서 앞뒤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는 거다.”
이씨는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그 뒤 이씨는 골프만화 ‘버디’, 교육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세계사 넓게 보기’ ‘만화삼국지’ ‘그리스로마신화’ 등을 펴내며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 매 작품 인기를 모았고, 명성도 이어갔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 ‘아마게돈’ ‘남벌’ 같은, 출간 때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던 ‘이현세 스타일’ 만화는 보기 어려워졌다.
소송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씨에게 물었다. 그는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쉽긴 하지만 그게 운명”이라고 했다.
- 운명론자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운명론자다. 나는 젊을 때부터 ‘내게 내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살았다.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손이 부러질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그리고 싶은 게 있고 내가 그릴 수 있을 때 마음껏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늘 절박했다. 50대에 찾아온 운명 또한, 내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부서질지언정 최선을 다해 부딪치는 것으로 또 그 운명에 맞섰다. 앞으로의 내 삶도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내가 상상도 못 한 일이 또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 혹시 묘비명으로 생각해둔 게 있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 내 의지대로 죽다. 이렇게 적으면 가장 멋있겠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만든 만화가로 살고 싶었다. 이제는 죽음도 내 의지대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이씨는 ‘한동안 쉬겠다고 마음먹은 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토속문화와 신앙에 흥미가 생겨 관련 자료를 두루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마르케스 소설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고, 중국 소수민족 이야기 ‘어얼구나강의 오른쪽’도 재미있게 봤다고 한다. 이 관심이 언젠가 또 다른 작품 활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까. 기대 섞인 질문에 이씨는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지금은 나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언젠가 ‘죽는 날까지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뜻이 서면, 그때는 다시 화단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한다. “지난 40년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책상 앞에 앉아 신나게 그림을 그리던 때다. 먹 냄새, 연필 냄새, 종이 냄새만큼 나를 들뜨게 하는 게 없다”고 말하는 이씨의 인생 2장이 언제, 어떻게 열릴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