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

재미석학 신기욱의 일갈 “포퓰리즘 유혹 못 떨치면 경제 파탄, 극우정권 온다”

  •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입력2019-01-23 17: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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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남미 휩쓰는 선동적 국가주의 광풍

    • 극우 국가주의 득세는 좌파 포퓰리즘 책임

    • 文정부 포퓰리스트 정책 성적표 초라해

    • 민주주의 외치던 진보가 민주주의 시험대에 올려

    • 집권 내내 과거와 싸우면 무능 좌파 오명 못 피해

    미국 중간선거를 하루 앞둔 2018년 11월 5일,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 유권자가 지지 피켓을 들고 있다. [동아일보 김정안 기자]

    미국 중간선거를 하루 앞둔 2018년 11월 5일,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 유권자가 지지 피켓을 들고 있다. [동아일보 김정안 기자]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역사사회학, 정치사회학, 국제정치학 분야에 두루 정통한 재미 석학(碩學)이다. 신 교수는 학술연구 외에도 한미동맹, 동북아 역사 문제, 남북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정책 과제를 수행해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도 지명도가 높다. 그간 출간한 영문 저서는 20권이 넘는다. 그는 2001년 스탠퍼드대 부임과 동시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설립했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동 대학의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으로 있다. 신 교수가 집권 3년차를 맞이한 문재인 정부에 건네는 제언을 ‘신동아’에 보내왔다.<편집자 주>

    지난해 가을,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위스콘신주에 다녀왔다. 위스콘신주는 지난 대선 전까지 민주당 후보가 7번을 내리 승리한 곳이다. 정작 2016년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 지역은 앞서 1980년과 1984년 대선 때도 로널드 레이건 후보를 지지한 바 있다. 

    공화당 후보인 레이건과 트럼프는 각각 위대한 미국, 미국 우선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위스콘신주에서 만난 주민들과 트럼프의 정책, 특히 미·중 무역 갈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은 ‘미국의 낙농지대(Dairyland)’라고 불린다. 미국 치즈의 약 4분의 1이 위스콘신주에서 생산된다. 농산물이 지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무역 갈등이 심해지면 중국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이 지역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주민들에게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설사 경제적으로 타격이 좀 있다 하더라도 이참에 중국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며 오히려 날 설득하려 했다. 미중 무역 갈등이 경제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심리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실감했다.

    부메랑 된 무상복지

    남미의 트럼프라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동아DB]

    남미의 트럼프라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동아DB]

    위스콘신주에서 나눈 대화는 몇 해 전 내 첫 직장이던 아이오와대학을 방문한 기억과 오버랩됐다. 내가 재직하던 1990년대 초만 해도 이 대학 학생의 90% 이상이 백인이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아이오와주를 떠난 적이 없다는 조사를 재직 중 본 적이 있다. 설마 그럴까 반신반의하던 기억이 난다. 자동차로 4시간만 달리면 시카고라는 큰 도시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여 년 만에 방문한 아이오와대학과 대학타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만 수천 명에 달하고 타운 안에는 큰 중국식당이 들어섰으며, 무엇보다 고급 독일차 딜러가 여럿 눈에 띄었다. 내 지인은 이 고급차들의 주요 고객이 중국 유학생이라고 귀띔해주면서 “비싼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젊은 아시아인들을 보면서 이곳에 사는 백인들이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마음이 쓰리겠느냐”고 부연했다. 아이오와주는 ‘미국의 하트랜드(Heart Land)’라 불리는 곳이다. 대선 때면 이곳에서 첫 선거가 열리기 때문에 정치적 풍향계 노릇을 톡톡히 하는, 규모는 작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트럼프라는 정치적 이단아에게 왜 이들이 열광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처럼 국수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선동주의적 극우 국가주의(ultra-nationalist) 정치가 지구촌 곳곳을 강타하고 있다. 헝가리, 폴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에서부터 브라질, 콜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에 이르기까지 극우파 국가주의적 정치가 득세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마크롱 대통령이 결국 실패하면 이를 대체할 극우 정치인 르펜이 대기하고 있다. 극우 정치인들은 자국우선주의를 기치로 분노와 증오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는다. 1930년대 유럽과 남미 등을 휩쓴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현상이다.

    최근의 극우 국가주의와 과거의 파시즘 사이에는 100년 가까운 시차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강력한 대중 동원을 기반으로 인종차별주의에 근거해 이민자 소수민족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두 현상은 비슷하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대중을 상대로 한 직접적인 정치와 동원이 더 용이해져 그 위험성은 되레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트위터로 정제되지 않은 ‘말 폭탄’을 퍼부으면서 지지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세를 규합하는 게 좋은 예시다.

    스탠퍼드대 동료 교수이자 ‘역사의 종언’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러한 흐름을 ‘정체성의 정치’ 즉 인종, 민족, 젠더 등 귀속 집단의 소속 여부에 기반을 두는 동원정치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 이후 남유럽을 시작으로 남미, 아시아로 이전된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극우적 국가주의의 세계적 부상이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좌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책임이 크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국가 간, 개인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등 자본주의의 모순이 커졌다. 이에 세계 곳곳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고 포퓰리스트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남미에서는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이들 좌파 정부는 복지의 대폭 확대와 친노동자, 서민 정책을 폈지만 그 의도와 달리 결과는 참혹했다. 브라질에서는 좌파 정권 13년 동안 시행된 저소득층 현금 지급, 서민용 무료 주택 공급 등 무상복지 정책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칠레의 바첼레트 정부 역시 좌파 포퓰리즘으로 몰락했다.

    남미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서는 우고 차베스 정부가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방만하게 재정을 지출했다. 이에 국가재정은 바닥났고 민주주의마저 위협받게 됐다.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정부도 국가재정으로 공무원 수를 약 2배로 늘리고 전기·가스·수도 요금에 보조금을 지원하며 공립학교에 약 500만 대의 휴대용 컴퓨터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등 온갖 복지정책을 쏟아냈다. 그 대가는 너무 혹독해서 아르헨티나는 또다시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국수주의로 급회전

    2018년 12월 11일 영국 런던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합의안이 부결돼 브렉시트가 번복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은 ‘(테리사) 메이 총리가 영국을 배반하지 못하게 하라’는 피켓까지 들고 거리에 나섰다. [AP=뉴시스]

    2018년 12월 11일 영국 런던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합의안이 부결돼 브렉시트가 번복되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은 ‘(테리사) 메이 총리가 영국을 배반하지 못하게 하라’는 피켓까지 들고 거리에 나섰다. [AP=뉴시스]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유럽과 남미는 이와 정반대인 국수주의적 우파 국가주의로 급회전하고 있다. 브라질 유권자들은 지난해 좌파 정부를 종식하고 인종차별적 막말 논란 등으로 남미의 트럼프라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칠레 역시 우파 정권으로 넘어갔다. 2월 대선을 치르는 엘살바도르에서도 10년 좌파 정권이 막을 내리고 우파 국가주의 성향 대통령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열리는 그리스 총선에서도 우파 정당이 승리할 확률이 높다. 그리스는 달콤했던 복지정책이 막대한 부채로 되돌아오는 등 좌파 포퓰리즘 탓에 지독한 악몽을 겪은 바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30년대의 파시즘도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을 휩쓸던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우파 지식인들은 파시즘을 새로운 민족주의라 부르며 환호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대두한 이광수의 ‘조선민족론’ 등 혈통적·인종적 민족주의는 유럽의 인종차별주의에 기반을 둔 파시즘과 공통점이 많았다.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 이 개념은 일제의 차별적 동화주의에 대항 논리로 쓰이긴 했다. 한데 기본 레토릭에서 파시즘과 유사한 점이 적잖다. 현재 나타나는 극우 국가주의 역시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본다면, 결국 역사는 또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좌파적 포퓰리즘과 우파적 국가주의는 이념적으로는 서로 양극에 서 있다. 하지만 증오와 분열, 대립의 정치를 연료로 삼는다는 점에선 유사하다. 좌파는 과거 청산과 기득권 세력 타도를 목표로 삼고, 우파는 이민자나 소수민족 등 정치적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중국의 문화혁명이나 독일의 나치즘은 이념적으로는 좌, 우의 극단에 속할지 모른다. 하지만 급진적 이데올로기에 터를 잡고 사회를 선과 악으로 나눈 채 상대를 제거하는 분열의 정치, 또 이를 이루기 위해 대중, 특히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동원의 정치를 폈다는 점에선 매우 유사하다.

    좌파적 포퓰리즘이나 우파적 국가주의가 성공한 역사적 사례는 없다. 문화혁명이 중국의 기득권을 제거하면서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는 사회 전체를 하향 평준화한 데 따른 결과다. 그 직후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최빈국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독일 나치즘은 ‘위대한 게르만의 민족성을 회복한다’는 미명하에 600만 명의 유대인을 ‘불순물’이라며 학살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한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다.

    윌리엄 콘하우저, 한나 아렌트 등 파시즘을 연구한 학자들의 통찰을 빌려보자. 이들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동의 결과, 커뮤니티와 기존 제도가 약화돼 사회 구성원이 원자화하는 대중사회가 출현한다고 봤다. 대중사회는 히틀러나 무솔리니같이 대중 동원에 뛰어난 이들이 힘을 발휘하기 좋은 조건에 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최근에 와서는 소셜미디어를 통한 대중 간 직접적 소통이 대세가 됐다.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뉴스만 습득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편향적 정보에 따른 정치적·이념적 양극화가 더 심해질 위험이 존재한다. UCLA 재직 당시 동료이던 영국계 사회학자 마이클 맨(Mann) 교수는 저서 ‘파시스트들(Fascists)’에서 1930년대 파시즘의 광풍을 비켜갈 수 있었던 곳은 비교적 민주주의 제도가 잘 정착돼 있어 대중이 선동주의 지도자의 동원으로부터 보호받은 나라였다고 분석했다. 맨 교수의 분석이 옳다면, 그래도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된 미국, 영국 등은 극우·극좌의 광풍을 비켜갈 터이다. 반면 민주주의의 역사와 제도화가 불안정한 나라는 정치·사회적 혼란을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도 만족 못 시킬 포퓰리즘

    2018년 8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전국 소상공인 총궐기’ 집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우의를 입은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DB]

    2018년 8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전국 소상공인 총궐기’ 집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우의를 입은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DB]

    그럼 한국은 어떤가. 10년간의 보수정부를 거치면서 ‘글로벌 코리아’는커녕 서민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졌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해졌고, 젊은이들은 ‘삼포세대’라는 자괴감 속에 ‘헬조선’을 외쳤다. 2016년 가을부터 8개월간 모처럼의 안식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당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스펙 쌓느라 고생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 어깨가 축 처진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는 했지만, 정치적 관심과 구호를 넘어 이를 구체적 정책으로 실현시키는 데 실패했다.

    보수정권에 대한 실망과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보편적 복지와 소득주도성장 등 친서민적 정책을 펴왔다. 그런데 이는 좌파적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관계뿐 아니라 기업과 사법부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지속돼 한국 사회는 더욱 분열됐고 증오와 대립만 커지고 있다. 고용과 경제지표는 악화일로다. 사회 갈등은 증폭되는 가운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에 건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오자 다시 거리와 광장으로 나서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칠 수 있을까? 극우 국가주의로 이동하고 있는 유럽이나 남미와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답은 현 정부 스스로가 갖고 있다. 2019년은 그 답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집권 3년차를 맞이하는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공무원 증원, 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 소득주도성장 등 포퓰리스트적 정책을 쏟아내면서 국민의 환호를 받고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구가했다. 정작 그 성적표는 매우 초라하고, 이를 반영하듯 지지율도 급강하하고 있다.

    이미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긍정적 견해를 추월한 ‘데드크로스’를 기록했다는 여론조사도 나오고 있다. 포퓰리즘은 처음엔 환영받지만 점점 수혜자의 기대치를 높인다. 그뿐만 아니라 중독성이 강해 결국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실을 무시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탓에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수익성 악화에 직면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정작 민노총을 비롯해 현 정부 출범에 기여한 세력은 진보 개혁의 후퇴를 비판하며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집단 간 갈등이 위험 수위에 올랐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미비하고 사회적 합의는 결여돼 있다. 민주사회에서는 정당이 그 역할을 해야 하지만 한국의 정당정치는 여전히 미숙하다. 그간 이 역할을 일정 부분 대신했던 시민사회 역시 정치화됐다. 검찰, 경찰 등 공권력은 시민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이젠 사법부조차 적폐청산의 대상이 됐다. 민주사회의 근간인 법치주의마저 도전받는 실정이다.


    분열·대립·경제파탄

    문재인 정부가 집권 기간 내내 과거와 싸우면서 포퓰리즘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면 사회 분열과 대립만 커지고 경제는 파탄 날 것이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는 무능한 좌파 정권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로 인한 대가는 대척점에 선 극우 정권의 탄생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이라고 트럼프, 보우소나루, 두테르테처럼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선동주의적 정치인이 부상하지 말란 법이 없다.

    결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좌파적 포퓰리즘의 유혹을 뿌리치고 우파적 국가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 즉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협치의 정치를 해야 할 까닭이다. 그 출발점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힘을 합해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루었다는 인식이 공유돼야 한다. 두 세력이 서로 경쟁도 하고 대립도 했지만,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산업화-민주화라는 큰 흐름이 이어졌다. 국제사회도 한국을 두고 이 큰 흐름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높이 평가한다.

    오히려 한국인들만 이런 역사적인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설사 현재 집권당 대표의 공언처럼 진보세력이 20년간 집권한다 해도, 견제와 균형이 필수인 민주사회에서 한 축이 무너지면 다른 축도 무너지게 돼 있다. 이러면 어렵게 구축된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분열·대립의 과거 정치에서 화해·통합의 미래 정치로 가기 위해선 집권세력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외치던 진보세력에 의해 한국 민주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한반도는 대외적으로도 격동에 휩싸여 있다.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선 국론을 모으는 일이 절실하다. 국수주의적 국가주의의 발호는 국제질서에도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새로운 지역질서의 모델로 각광받았던 유럽연합(EU)은 브렉시트로 그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미국이 주도하던 다자주의적 무역, 국제기구 등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그는 1945년 이후 미국 안보의 축이었던 군사동맹조차 계약적(transactional) 관계로 보는 실정이다.

    국수주의적 경향이 짙어지면서 각 나라의 사회뿐 아니라, 나라 간 국제질서도 협력과 공존보다는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자칫 파시즘처럼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위험마저 잔존한다. 현재 국제사회 최대 이슈 중 하나인 미·중 간 갈등의 이유도 겉으로는 무역 등 경제 이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수면 아래에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어 양국 간 타협이 어렵고 긴장 국면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즉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와 중화민족의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이 정면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민주화 세력의 맞손

    트럼프와 시진핑 외에도 강한 ‘정상국가’ 일본을 만들겠다며 국수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아베 총리,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을 외치며 21세기 차르를 꿈꾸는 푸틴 대통령, 핵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북한의 김정은이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다. 이들과 맞대응하면서 우리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면 내부적으로 단단히 힘을 모아야 한다. 대북정책만 놓고 봐도 보수는 북한과 문재인 정부를 탓하고, 진보는 미국과 야당을 탓한다. 그 이전에 진보와 보수 간에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북한이나 미국도 설득할 수 있다.

    사색당파와 당쟁을 조선왕조의 패망 원인으로 보는 식민사관이나,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원인을 좌우익 간 분열·대립으로 보는 외국 학자들의 시각이 못마땅하지만, 솔직히 작금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이를 마땅히 반박하기도 어렵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대립과 반목의 양상이 너무 도드라져서다.

    현재 한국이 처한 대내외적 상황이 결코 녹록지 않다. 좌파 포퓰리즘도 우파 국가주의도 결코 해결책이나 대안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대신 양극단의 발호와 도전을 경계하면서 합리적인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양손을 맞잡아야 한다. ‘한(恨)’의 정치가 아닌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잘되어야 의미가 있는 개념 아닌가.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대한민국의 제2의 도약을 이루어낸다는 심정으로 2019년을 맞아야 할 것이다.


    신기욱
    ● 1961년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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