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롄(大漣)에서 한국 업자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하셨다고 했는데 송씨 같은 사람들이 많던가요.
“1996년 봄 다롄에 머물 때는 다행히도 좋은 분을 많이 만났어요. 사람 보는 눈이 생겼지요. 한국에 돈이 많은 것처럼 허풍을 떠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기꾼이고, 묵묵히 일하는 이들은 알고 보면 속이 꽉꽉 찬 분들이었습니다. 따지자면 좋은 사람이 더 많았지만 꼭 이런 이들이 중국 사람이나 조선족에게 사기를 당해요. 한국 사람에게 당한 제게는 이런 것만 보였댔지요. 속고 속이고 참 아수라판이었어요.”
‘한몫’을 잡으려고 한국에서 건너간 사업가들이 분주히 누비던 당시 다롄은 숨가쁘게 혼란스런 도시였다. 사업이 잘돼 만족하는 이도 많았지만 사기극을 연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안씨가 다롄에서 보고 느낀 한국인들의 실상은 초라했다. 대단해 보이던 한국 사업가들이 중국인들에게 속아 큰돈을 날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것을 자주 접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모습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조선족이든 한국 사람이든 다를 게 없었다. 쌀을 도정하는 정미기를 수출하려다 현지 주민에게 사기 당한 인천의 어느 무역업자, 중고 포클레인을 수출하려다 결국 물건만 날린 젊은 기업인 등 안씨가 직접 보고 들은 사연만 해도 끝이 없다.
“포클레인을 날린 분의 사연은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더라고요. 대구의 김사장이라는 젊은 분이었댔지요. 중국에 중고 포클레인을 팔기로 하고 16대를 다롄에 들여왔는데, 회사 일정 때문에 본국에 잠시 들어간 사이에 동업자가 일부를 몰래 팔아먹고 중간 상인들이나 농민들이 중요한 부속품을 뽑아내 팔아먹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포클레인 값만 날린 거지요.”
한국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안씨의 환상이 부서지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사업한답시고 건너와 바람을 피워대는 사업가들 때문에 눈물 흘리는 중국 여성들을 여럿 만난 것이다. 그 와중에 안씨는 잠시 남의 아이를 맡아 기른 적도 있었다.
“김씨라는 한국사람이 민박집 방을 하나 빌리더니 술집에 나가는 스무살짜리 처자하고 동거하더군요. 자식이 없어 씨를 얻으려고 한다는 거지요. 묘족의 젊은 색시는 얼마 후 달덩이처럼 예쁜 딸애를 순산했어요. 그런데 한국 남자는 귀국한 뒤 연락을 딱 끊었어요. 본성이 나빠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사업이 잘 안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스무 살짜리 엄마가 혼자 남아서 아이를 키우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밤에는 일을 나가야 하니까 건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견디다 못한 여자가 아이를 팔아먹겠다고 한국에 연락을 하니까 김씨가 부랴부랴 다롄에 왔어요. 그러더니 나한테 ‘보육비로 월 200위안(한화 30만원)을 줄 테니 맡아 키워달라’고 부탁을 해요. 맡아 키우다 보니 나중에는 친엄마한테 잘 안갈 정도로 정이 듬뿍 들었지요.”
그러나 보내준다던 보육비는 1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안씨는 결국 보육비 한푼 받지 못한 채 친엄마에게 아이를 보냈다. 이미 남자와는 연락이 끊어진 애 엄마에게서는 보육비가 나올 리 만무해 보였다.
“한국에 나와서 김씨가 산다는 의정부를 찾아갔어요. 가서 보니 슈퍼마켓을 하고 있는데 부인이 가게를 지키고 남자는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보육비를 안주는 김씨를 상대로 법원에 소액재판을 청구해 이겼지만 한동안 돈을 받지 못했다. 강제집행에 들어가 가재도구에 압류 처분이 내려지고 나서야 겨우 일부를 받았지만 나머지를 언제 받을지는 기약이 없다.
-중국에 현지처를 둔 한국 남자가 많습니까.
“옛날에는 부지기수였지요. 결혼해서 한국에 나온 여성들도 있지만 한국 남자에게 속아 살다가 버림받은 여자가 많아요. 대개 그런 남자들은 허풍선이가 많지요. 돈을 잘 번다며 물쓰듯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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