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 후 한국에서 고아들을 돌보고 싶다는 크리스틴 헤니씨.
“아버지는 강한 분이세요. 재미있고요. 엄마랑 비슷하세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뭘 하든 믿고 맡기셨거든요. 사랑이 넘치는 분이에요. 저와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선 좀체 보기 힘들 정도로 다정한 사이예요. 지금도 집에 가면 자기 전에 굿나잇 키스를 해드리죠.”
대니얼 헤니는 얼마 전 한 토크쇼에 출연해 아버지가 ‘전형적인 블루칼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매니저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대니얼 아버지의 직업은 기계공(mechanic). 대니얼이 ‘맥가이버’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번에 아내와 함께 방한하지 않은 이유는 장시간의 비행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란다.
“돈 벌고 싶지 않냐?
이번엔 대니얼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대니얼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대니얼은 어렸을 때 매우 창의적이었어요. 두 살 때부터 옷도 잘 입고, 뭘 하든 아주 재미있어했죠. 잠에서 깨면 춤을 추며 돌아다니고,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가 그대로 흉내 내 웃음을 주기도 하고요. 하여간 재미있는 아이였어요.”
-농구도 잘했다죠.
“제가 살던 미시간의 작은 마을에서 운동을 잘하는 건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티켓 같은 거였어요. 형제자매가 없으니 혼자 할 수 있는 농구를 몇 시간이고 연습했고, 그러다 농구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대니얼의 고향인 미국 미시간주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더 데일리 뉴스’ 7월18일자엔 대니얼 관련 기사가 크게 실렸다. 대니얼을 미시간주 출신의 세계적인 모델로 소개한 이 기사엔 그의 학창 시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의 모교인 칼슨 시티 크리스털 고등학교의 농구팀 코치와 동문들에 따르면 대니얼은 한 경기에서 혼자 28점을 득점하며 소속 학교를 우승으로 이끈 팀의 리더이자 포인트 가드로 방어와 패스, 리바운딩과 득점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 신문은 또 대니얼이 매일 8마일씩 뛸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했으며 몸 관리를 위해 지방질을 먹지 않고, 칼로리가 낮은 다이어트 음식만 섭취했다고 소개했다.
고교시절 농구선수로 이름을 날린 대니얼은 일리노이대 시카고 캠퍼스에 진학해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경영학과 연극을 전공하면서 농구선수로 기량을 닦던 그가 패션모델의 길로 들어선 건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다.
“모델 지망생인 친구를 오디션에 데려다주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에이전트가 다가오더니 ‘돈 벌고 싶지 않냐?’며 모델을 한번 해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거죠.”
그때가 2001년. 그후 대니얼은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고, 미국뿐 아니라 대만·홍콩 등지에서 모델로 활약했다. 2003년부터는 파리와 밀라노 컬렉션 무대에도 섰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톰 포드는 그에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양인’이란 찬사를 보냈다.
-농구선수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매일 밤 기도했어요. 아마도 여섯 살 때부터일 거예요. 잠자리에 누워서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하며 시작하는 기도 끝에는 늘 ‘제발 NBA에 진출해서 마이클 조던처럼 최다 득점을 하는 훌륭한 농구선수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빌었어요. 하지만 NBA로 진출하기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농구선수로 성공하는 걸 포기한 뒤에 다른 길을 찾다가 모델이 된 건가요.
“경제적인 어려움이 먼저 찾아왔죠. 농구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돈을 벌고 싶었는데, 때마침 모델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