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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호

“큰 일은 원칙대로, 작은 일은 타협하라” 삶의 버팀목 된 호숫가 대화

이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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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이란 말엔 따뜻한 울림이 있다. 때론 자애롭게 안아주고 때론 준엄하게 꾸짖던 가르침이 떠올라서일까. 저마다 가슴 한켠에 참다운 깨달음을 준 스승의 추억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참 스승과 참 제자를 찾기 어려운 시대, 각별한 사제의 정을 돌이켜보는 온기 가득한 지면을 마련했다. 빛바랜 사진첩을 펼치듯, 아련한 기억을 되새기며 고마운 선생님의 이름을 불러보자.
이인호

1997년 유럽기행 산문집 ‘시대의 우울’ 발간에 맞춰, 나(왼쪽)는 추천사를 써주신 이인호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핀란드로 향했다. 주 핀란드 한국대사관 사택에서 이인호 선생님과 함께.

이인호 선생님을 멀리서 흠모하던 여러 제자 중의 하나에 불과한 내가, 선생님과의 인연을 감히 글로 써서 공식적인 지면에 발표하는 영광을 누리다니. 25년 세월의 감회가 새삼스럽다. ‘신동아’에 기고할 글을 위해 지금 이 책상에 앉기 전까지 ‘내 인생의 허와 실’을 반추하며 잔뜩 수그러들고 있었는데, 나의 삶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주 엉터리는 아니었나 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0년 관악캠퍼스는 남자들 세상이었다. 전체 여학생의 비율이 남학생의 10%에 불과했고(내가 속한 인문계열 1학년을 통틀어 여학생이 20명도 안 되었다), 여자 교수님은 더욱 드물었다. 내가 수강 신청했던 교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이었고, 그래서 나는 1980년 어느 가을날까지 여교수를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울려퍼지는지, 여성과 교수의 조합이 대체 어떤 이미지로 내 앞에 전개될지 알지 못했다.

당당한 모습을 열망하다

그날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5·18민주화운동으로 닫혔던 교문이 다시 열린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2학기 축제기간에 개교기념 학술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심포지엄을 청강하며 이인호 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말이 ‘축제’이지 교내에 전경이 상주하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어떤 놀이도 토론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신입생들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대학측에서 초대한 대중가수의 콘서트 같은 ‘반동적인’ 프로그램들을 거부하고 학술발표회 같은 심각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불온한 시대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을 표현하며 동시에 젊음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서울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여학생들 사이에 ‘미국의 유명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똑똑한 여자교수님’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1학년 여학생의 대다수가 이인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러 심포지엄이 열린다는 학생회관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당시 나와 가까웠던 누군가의 충동으로, ‘러시아’라는 주제와 여교수님에 대한 호기심에 끌려 나도 2층인가 3층의 어느 회의실에 들어가 벌써부터 운집한 청중을 제치고 한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자리가 없어 서 있거나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운동권에 포섭되지 않았던 열아홉 살의 순진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2단계 혁명론’이니 ‘멘셰비키’ ‘볼셰비키’니 하는 어마어마한 단어들을 애써 머릿속에 주워 담던 나의 모습이, 우중충한 창밖의 풍경과 더불어 지금도 선연하게 어제의 일처럼 떠오른다.

매혹의 중성적 목소리

그날 내 옆에 누가 있었는지, 동행했던 벗들의 얼굴을 나는 잊었다. 심포지엄이라는 딱딱한 형식으로 소개된 러시아 지성사의 붉은 페이지들도 속절없는 세월에 바래졌으나, 선생님의 독특한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내가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내 어머니의 ‘밥 먹어라’ ‘이제 들어오니’ ‘빨리 자라’ 같은 일상적인 언어들과 집안에서만 울리는 순종적인 목소리에 익숙하던 내게는, 마이크를 타고 드넓은 강당을 휘어잡는 정열적이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선생님의 음성이 무척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여성성이 도드라지지 않는 중성적인 소리에 실려 도도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래의 사상과 개념들을 나는 미처 따라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어려운 말들을 하나도 더듬지 않고 역사니 혁명이니 하는 심각한 단어들이 여성의 몸에서 나올 수 있을까, 신기했다. 선생님의 강연은 내게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세례와도 같았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목소리에 반해 ‘나도 저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 나만의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내가 대학에 입학해 나의 앞날에 대해 품었던 최초의 구체적인 꿈이며 욕망이 아니었는지. 선생님이 나처럼 여자였기에, 스무 살 무렵의 내게 그토록 강렬한 영감을 주었으리라.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우리는 모두 선생님에게 반했고, 그래서 여학생끼리 모이면 자연스레 이인호 교수님이 화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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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소설가 ymchoi3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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