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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한 첫 백인 여성 얀 루프 오헤른

“그냥 잊으라고요? 지금도 밤마다 강간의 공포에 떠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한 첫 백인 여성 얀 루프 오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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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한 첫 백인 여성 얀 루프 오헤른
한국 할머니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 차원의 사죄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때 오헤른 할머니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저들을 도와야 한다. 마침내 내 인생의 암흑기를 털어놓을 시간이 됐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우선 두 딸에게 자신의 참혹했던 시절의 얘기를 들려준 다음 세상을 향해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도쿄 방문을 비롯해서 호주, 북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 전세계에서 열리는 군대 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가해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살던 얀은 1942년 일본군이 그곳을 점령하자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 억류됐고, 억류 2년째 되던 1944년 그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둔 일본군의 만행이 절정에 달했다. 전쟁물자는 바닥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운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국가에서 강제로 끌고 온 여성들을 위안부로 안겨주었다. 그 전쟁범죄에 희생된 숫자가 어림잡아 20만을 넘었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백인 여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스물한 살 처녀 얀은 그때껏 성(性)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수녀가 되기 위해 프란시스코 수녀회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생모와 수녀들)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라고 했다.

그럼 여기서 4월2일 방영된 abc-TV 다큐멘터리를 요약해서 옮겨본다. 다큐멘터리는 대역 없이 오헤른 할머니와 두 딸이 직접 출연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트럭에 소떼처럼 처박혀…

나는 현재 인도네시아로 불리는 옛 네덜란드령(領) 동인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23년에 태어났고 정말로 멋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름답고 커다란 집에 살았는데 요리며 정원 일, 빨래를 해주는 시종들과 운전사가 함께 살았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자바 섬에서 손꼽히는 큰 무역상이었거든요.

태평양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1942년 3월 일본군이 자바로 쳐들어오면서 그 아름답던 시절은 끝장났습니다. 일본군이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일본군 수용소에 억류했으니까요. 나도 가족과 함께 수용됐습니다.

수용소에서 3년 반을 갇혀 지냈는데, 잘 알려진 대로 굶주림, 고문, 체벌, 질병이 만연했지요. 매일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화 ‘엘리스 스프링 가는 길’에 나오는 그대로였습니다.

1944년 3월, 일본군은 17세 이상의 젊은 여자들에게 수용소 건물 앞에 줄 서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높은 계급의 장교들이 오더니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얼굴과 다리 등을. 그것은 앞으로 발생할 일에 대한 선별과정이었습니다.

性病 검사하던 의사에게도 당해

우리는 덮개가 없는 트럭에 강제로 태워져 소떼처럼 처박혔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두려워서 작은 짐가방을 꼭 붙들고 서로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트럭이 커다란 네덜란드 식민지 건물 앞에 멈추자 일본군이 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거기서 일본군의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 우리를 끌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위안소에 있었습니다. 위안소 말입니다. 온 세상이 발밑으로 꺼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강요당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이럴 권리가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이것은 제네바 협정 위반이며 우리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웃기만 했습니다. 그저 웃기만 했단 말입니다. 일본군은 자기들은 우리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일본식 꽃 이름이 들어간 각자의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위안소 문마다 그 이름들이 핀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나는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장교가 사무라이 칼로 위협하는 가운데 아주 잔인하게 강간당했습니다. 그 후 나는 머리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추하게 보이면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모습은 정말 흉측해 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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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lipsy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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