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
영욕으로 점철된 정도전의 삶은 오토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일생을 떠올리게 한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통일을 성취하고 후진국 독일을 단시간 안에 유럽의 강자로 등극시켰지만, 빌헬름 2세와의 갈등으로 결국 총리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고려 말 목숨을 내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다음 조선 왕조 개국을 주도했으나 태종(이방원)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결국 목숨까지 잃고만 정도전의 일생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지식인 정치가’의 길을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의 집터는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 이 부근을 지날 때면 그의 비극적 최후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고, 그가 남긴 현재적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임 향한 일편단심’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충숙왕 복위 6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자는 달가(達加)이며, 호는 포은(圃隱)이다.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60년 문과시험에 합격했으며, 1362년 예문검열·수찬이 되었다. 이후 정몽주는 대내 개혁을 모색하고 대명(對明) 외교를 주도하는 등 고려 후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활동했다.
정몽주의 일생은 위기의 고려를 쇄신하는 데 일관했다. 그는 이성계 세력과 연대해 친원(親元) 권신세력과 맞서서 기울어가는 고려를 바로 세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정도전, 조준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反)이성계 세력의 중심을 이뤘다. 권력 갈등이 예각화되는 과정에서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는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죽었다.
우리 역사에서 정몽주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정몽주의 비극적 최후는 곧 고려의 최후이기도 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을 미리 알았으며, 그래서 말을 거꾸로 타고 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비극적 최후 직전에 이방원은 널리 알려진 ‘하여가’로 정몽주를 회유했지만,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했다. ‘단심가’의 메시지는 고려에 대한 ‘임 향한 일편단심’에 집약돼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가를 처음 배운 게 초등학교 시절인데,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고결한 비장함이 가득하다. 정몽주는 유교적 의리 문화의 상징이다. 의리란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전통사회에서 신하가 한 왕조 또는 한 군주를 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익과 권력의 향배에 따라 도리를 저버리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사육신과 생육신은 정몽주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그들은 단종에게 충을 다하기 위해 세조를 거부했다. 당대에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후대에는 영광을 얻었다. 정몽주의 ‘임 향한 일편단심’은 사육신 성삼문의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과 정확히 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