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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술꾼’ 윈스턴 처칠과 ‘샴페인 금발미녀’오데트의 로맨스

폴-로저 샴페인과 처칠 마티니

‘위대한 술꾼’ 윈스턴 처칠과 ‘샴페인 금발미녀’오데트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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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에서 얻었다”는 한마디로 세계의 주당들을 허리 숙이게 했던 윈스턴 처칠. 그는 거의 매일 점심에는 맥주를, 저녁에는 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거나 샴페인을 마시는 위대한 술꾼이었다.
  • 오늘날 베르무트 병을 한번 쓱~ 보면서 마시는 것으로 유명한‘처칠 칵테일’과 유명 샴페인 회사 폴 로저(Pol-Roger)의 마담 오데트와의 만남으로 탄생한‘처칠 샴페인’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술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위대한 술꾼’ 윈스턴 처칠과 ‘샴페인 금발미녀’오데트의 로맨스
오늘날의 20, 30대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 윗세대는 ‘굵은 시가를 입속 깊숙이 물고 마치 불도그같이 찡그린 얼굴에 손으로는 승리의 ‘V’ 사인을 그리는 사람’하면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에 대항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이 바로 그 사람이다. 처칠의 대표적인 사진에서 보이는 시가 흡연 장면과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얼굴, 그리고 승리의 V 사인은 오랫동안 대영제국의 강인함과 여유로움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실제 처칠은 세계 각종 매체가 선정하는 역사상 위인 목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인물로, 2002년 영국 BBC가 100만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술 얘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처칠의 인생을 조망해보자.

윈스턴 처칠은 1874년 영국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독립성이 강하고 반항적인 성격이었던 그의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탓인지 1893년 삼수 끝에 샌드 허스트의 왕립사관학교에 힘들게 입학했다. 처칠은 당시 보병 대신 기병 병과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기병이 보병에 비해 의무 취득 학점기준이 낮았고, 기병 병과에서는 그가 싫어하는 수학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4년 12월 졸업할 때는 150명 중 8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전쟁 특파원으로 높아진 명성…결국 총리까지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일반적인 진급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실제 전쟁 현장을 체험하고 이를 글로 기록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전쟁터에서의 직책을 구했다. 당시 그의 역할은 오늘날의 ‘전쟁 특파원’과 같은 것이었는데, 전쟁터에서 경험한 내용을 신문에 기고함으로써 처칠은 대중적인 관심과 함께 상당한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칠의 첫 해외 근무지는 1895년에 파견된 쿠바였다. 당시 스페인군과 쿠바 게릴라 간 전투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는데, 처칠은 영국 신문에 전선 상황을 기고했다. 이때 처칠은 그의 평생 기호품 중의 하나인 시가에 빠져들었다. 1896년 10월 처칠은 당시 영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인도 봄베이로 전출된다. 그곳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 파슈툰 부족과 영국군이 벌인 격렬한 전투에 직접 참가해 그 경험을 기사로 섰다. 그리고 훗날 이를 책으로 출판했다. 1898년에는 이집트로 파견된다. 처칠은 그곳에서 다시 수단으로 가 실제 전투(옴두르만 전투)에 참전하는데, 이때도 전쟁 특파원으로서 전황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리고 1898년 10월 런던에 돌아가서는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정리해 이듬해 출간했다. 1899년 5월 처칠은 실질적으로 군 생활을 그만두고 정계 진출을 꿈꾸면서 보수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처칠 생애의 가장 큰 전기는 그해 남아프리카에서 발발한 제2차 보어전쟁(1899~1902)에서 마련된다. 1899년 10월 모닝포스트 특파원 자격으로 보어전쟁에 참가한 그는 어느 날 적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처칠은 수용소에서 기회를 엿보다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일약 ‘영국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듬해 총선에서 한 번 낙선했던 올덤 지역구에서 보수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다. 이후 처칠은 낙선과 당선 등 여느 정치인들과 같은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게 되고, 1904년에는 반대당인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발발할 당시 처칠은 해군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한 작전의 실패에 대한 일종의 문책성 인사로 장관직을 그만둔다. 얼마 후 그는 대령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 이후에는 정치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5년 다시 보수당에 합류한다. 1930년대 초 정당 내 알력 때문에 수년간 정치 활동을 쉬게 되었는데 그 기간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여 당시 가장 원고료가 높은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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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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