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할 뿐이었다. “여보, 손님 오셨어, 나와 봐요”하고 아내를 불러내는 남편의 커다란 음성이나 칡뿌리를 캐어와 말끔히 씻은 후 말없이 문안으로 디밀어주는 손길, 냉이와 풋마늘을 조물조물 무치면서 한 저름 집어 입 안에 넣어주는 아내의 웃음 같은 것들. 그 부부는 손이 온다고 미리 낚시와 그물로 숭어와 망둥이를 잡아뒀다. 남편은 능란한 솜씨로 숭어로는 회를 치고 망둥이로는 맑은 어탕을 끓인다. 몸집은 커도 부엌일이 몸에 착 붙었다. 아내는 곁에 서서 풋마늘과 머위나물과 냉이를 제때 맞춰 데쳐서 헹군다.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찼다. 방바닥에 손을 대보고 조금 식는다 싶으면 남편은 얼른 아궁이께로 달려 나간다. 아궁이 곁엔 가지런히 패놓은 장작더미가 실팍하다. 이 모든 것이 한 100년쯤 전의 세상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린 듯하다.
덩달아 벙싯벙싯 웃음이…
뜰 안을 다사롭게 비추는 햇살과 꽃망울을 잔뜩 매달고 선 산수유와 간간이 음전하게 우는 산비둘기 울음은 거기 깃든 사람을 두터운 평화 속에 잠기게 만든다. 흥성하고 고요했다. 이 집 막내 새벽이가 기르는 거위 ‘뭉치’의 꽥꽥대는 소리와 낯선 사람의 다리에 마구 매달리는 고양이 ‘오디’와 ‘복분자’의 애교와, 마당을 바퀴처럼 굴러다니는 강아지 ‘구름이’와 ‘깜돌이’의 경주가 자그만 소란을 일궜지만 그건 고요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본디 사람 사는 모습인 것을! 도적골 뜰에 앉아 이집 식구들처럼 나도 덩달아 벙싯벙싯 웃음이 도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 고양이 이름이 오디와 복분자라고요? 먹는 열매 이름이네요?
“예. 근디 열매 이름이 아니라 술이름인데유, 하하.”(장경희씨)
도적골 주인 장경희는 화가이기 이전에 농부이고 어부다. 서산의 갯벌에서 나고 자랐다. 낙지와 굴과 맛조개와 게가 숨는 곳을 손금 들여다보듯 환하게 안다.
“저 사람이 갯벌에 나가 한 삽만 푹 뜨면 먹을 것이 줄줄이 나와요. 만날 봐도 신기하다니깐요. 여기 갯가엔 철따라 먹을 것 투성이에요. 낼 아침에 우리 산꿜파래 뜯으러 갈 건데 같이 안 가실래요. 이 계절에 잠깐만 나오고 곧 사라지는 파래인데 달고 쌉쌀하고 시원해요.”(안주인 김영자씨)
“서울 시장에서 파는 시퍼런 파래하곤 본적부터가 달르쥬.”(장씨)
이른 아침 썰물 때 갯가에 나가 산꿜파래를 뜯자는 유혹은 강렬했다. 이튿날은 마침 새벽이의 생일이었다. 이튿날 밀물이 들어오기 전 우리는 트럭으로 곰섬(웅도)이 코앞에 보이는 가로림만(加露林灣)으로 나갔다. 서산 앞바다엔 재미있는 이름의 섬이 많기도 하다. 솔섬, 새섬, 매섬, 닭섬…. 이 중에서 제일 큰 게 곰섬이다. 만에서 섬까지 이어지는 바다는 하루 두 번씩 길을 연다. 물때를 미리 알아뒀다가 바닷물이 빠질 때 얼른 이 갯벌에 들어와 굴이니 게니 파래를 캐내야 한다. 장경희씨는 서둘러 어깨 아래까지 올라오는 비닐 옷을 갈아입더니 그물망 하나를 들고 갯벌로 내려간다. 이 갯벌은 장경희씨의 그림 소재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 안에는 갯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굴, 게, 낙지, 새우, 바지락, 나문재, 함초와 갯벌을 뒤집는 호미와 굴 캐는 이의 손과 주름진 얼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화면은 뽀글뽀글 구멍만 남기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갯벌이다.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수한 생명이 살아서 꼼지락대는 터전이다.

남편 장경희씨는 캔버스가 아니라 주로 재활용 나무판에 그림을 그린다(왼쪽). 아내 김영자씨가 빚은 모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