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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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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보드카가 오늘날 러시아의 대표적인 국민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드카는 무엇보다도 웬만한 재료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는 편의성이 크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진 나라와 달리 자연 조건이 열악한 러시아로서는 큰 매력이었다. 또 보드카는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오랜 사회 환경을 고려하면 대중 술로 자리 잡기에 알맞았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보드카를 증류한 후 그 증류액을 여과시킬 때 사용되는 숯의 주원료가 되는 자작나무가 러시아 타이가(한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침엽수림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이라는 점이다. 이는 위스키나 코냑의 숙성에 쓰이는 오크(oak) 나무가 없는 러시아로서는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15세기 러시아에 전해진 보드카

보드카가 러시아에 소개된 것은 15세기로 알려져 있다. 이전 러시아에서 주로 마시던 술은 보드카와 같은 증류주가 아닌 미드(mead)라는 발효주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증류주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증류 기술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드는 바로 ‘신동아’ 8월호 ‘고대 스칸디나비아 영웅들의 술’에 소개된 것과 같이 벌꿀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기록에 의하면 986년 당시 러시아 대공(Grand Prince) 블라디미르(Vladimir)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한 것도 이슬람교의 금주(禁酒) 교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드를 마시는 즐거움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그 대신 술에 관해서 보다 융통성이 있는 교리를 가진 비잔틴 기독교(오늘날의 정교)를 받아들였다.

특수경찰 선술집 ‘카박’



옐친이 사랑한 술 러시아가 선택한 보드카

술을 마시지 않았던 레닌은 보드카를 사적으로 만들면 중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15세기 초(14세기 말인 1398년이라는 설도 있다) 러시아를 방문한 제노바의 상인들에 의해 처음 증류 기술이 소개되면서 러시아에서 보드카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만들어진 보드카는 품질이 좋지 않았다. 초창기 증류 기술이 조잡했기 때문에 술에 불순물이 많이 포함돼 그 맛과 향이 나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앞서 설명한 가향 보드카였다. 물론 오늘날의 가향 보드카와는 만드는 목적 자체가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가향 보드카가 보드카의 초창기에 보다 가까운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훗날 점차 증류기술이 발전하고, 이윽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증류 후 자작나무 숯으로 여과를 하면서 보드카의 품질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또 불순물을 대폭 줄여 더 이상 나쁜 품질을 숨길 목적의 가향 보드카는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어쨌든 보드카는 러시아에 처음 소개된 이후 빠른 속도로 러시아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공포 정치를 시행해 ‘잔혹한 이반(Ivan the Terrible)’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고, 차르(Tsa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이반 4세(Ivan IV·재위기간 1530~1584) 시대에는, 비록 자신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잔혹한 명령을 수행하는 특수경찰들을 위한 선술집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카박(Kabak)이라고 불렸던 이 술집에서는 음식은 일절 없이 보드카와 다른 술만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후 집권자의 의도에 따라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17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의 웬만한 마을에는 보드카를 파는 카박이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음주로 인한 피해가 늘었고 사회문제가 됐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로마노프 왕조의 첫 차르 미하일(Mikhail·재위기간 1613~1645)은 해결책으로 부분적인 금주정책을 시행했으나, 그의 아들인 차르 알렉시스(Alexis·재위기간 1645~1676) 시대에 와서 정책이 변경되면서 카박은 다시 전 러시아에 걸쳐 번성했다. 알렉시스는 나아가 알코올 생산과 판매에 관해 국가 전매권을 제도화하고 민간 제조를 일절 금지했다. 이로써 보드카 판매로 얻어진 모든 수익은 황제의 금고로 귀속됐다. 보드카에 대한 국가 전매권은 그 후 200년 가까이 유지된다.

그러다가 1861년 또 한 번의 정책 변화가 일어나면서 보드카 생산과 판매에 대한 전매권이 없어지고 대신 세금으로 대체됐다. 이 제도는 1894년 국가 전매권이 부활되기까지 불과 33년간 지속됐지만 재빠른 민간 사업자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유명한 스미노프(Pierre Smirnoff·1831~1898)가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레닌, 술은 공산주의에 병적인 존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군대 전투력 유지를 위해 금주 정책을 펼쳤다. 여기에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새로운 집권층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고양할 목적으로 금주 정책을 추진했다.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던 레닌은 술이야말로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병적인 존재라고 표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오로지 공산주의 이론을 가지고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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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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