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두산베어스 대 롯데자이언츠 2차전 경기가 9월30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다. 연장 10회 초 1사 1,2루 상황에서 롯데 이대호가 역전 3점 홈런을 날리고 홈인해 로이스터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8월 초 다시 위기가 왔다. 손민한과 송승준이 다시 부진의 늪으로 빠지며 롯데는 8월6일 5위로 내려앉았다. 이후 한 달 내내 4강 티켓을 두고 삼성라이온스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9월 첫날 정수근이 다시 음주 논란에 휩싸였다. 롯데는 9월8일까지 5연패를 기록했고 4위 삼성과의 승차는 2게임으로 벌어졌다. 롯데가 쥔 마지막 반전 카드는 삼성과의 맞대결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삼성과의 2경기에 올인했다. 이때 그가 발탁한 후보 선수들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며 롯데는 2경기를 모두 가져갔다. 4위에 복귀한 롯데는 이후 4게임도 연거푸 승리하며 4강 티켓을 확정지었다. 각본 없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시즌 초 5할 승률에서 13경기나 뒤지고, 막바지 순위 싸움이 한창인 9월 초 5연패를 당하는 등 2차례나 큰 위기가 왔음에도 포스트 시즌 티켓을 따냈기에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 뜻 깊은 한 해가 됐다”고 말했다. 7년 연속 하위에서 맴돌다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면서 선수단의 가슴에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태도가 뿌리 깊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롯데는 2009년에도 포스트 시즌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롯데는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조정훈의 호투로 1차전을 기분 좋게 따냈다. 하지만 2차전에서 0대 6으로 패하면서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두산의 홈구장인 잠실에서 1승1패를 했으니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는 평이 많았지만 정작 롯데의 홈구장인 부산 사직구장에서의 성적은 더 나빴다. 사직에서 열린 3차전과 4차전에서 롯데는 두산의 불방망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대패했다.
2010년에도 롯데는 수많은 부상 악재를 겪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해 위기를 넘겼다. 2010년 6월 수비의 핵인 유격수 박기혁이 왼쪽 복사뼈 골절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되면서 롯데의 부상 악재가 시작됐다. 에이스 조정훈은 오른 팔꿈치 부상으로 6월 중순 이후 시즌을 완전히 접었다.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정훈과 함께 마운드를 책임졌던 장원준은 7월16일 허리 통증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홍성흔이 기아전에서 윤석민의 투구에 손등을 맞아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조성환도 기아 윤석민의 투구에 맞아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
화끈한 공격 야구 선보인 2010년
이런 상황에서 2009년 우승팀이자 시즌 5위 팀인 기아의 추격은 거셌다. 기아는 8월 중순 롯데와의 격차를 2경기로 줄이며 4강 희망을 살려냈다. 그러나 2009년과 마찬가지로 2010년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기존 선수들의 공백을 잘 메웠다. 로이스터 감독이 2군 경기를 보고 직접 발탁을 지시한 어린 투수 김수완과 이재곤이 조정훈과 장원준의 공백을 잘 메워줬다. 타선에서 전준우, 문규현, 김주찬, 손아섭 등의 활약이 홍성흔, 조성환의 공백을 메웠다. ‘신진 세력’의 힘을 등에 업은 롯데는 8월17일부터 6연승을 내달리면서 기아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고 4위를 확정했다.
3년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한 롯데는 한국 야구계의 강팀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특히 타격 7관왕에 오른 이대호를 필두로 홍성흔과 가르시아, 강민호 등 즐비한 강타자들을 앞세워 화끈한 ‘빅볼 야구’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대호-홍성흔-가르시아로 이어지는 롯데의 클린업은 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클린업 트리오로 군림했다.
과거 롯데는 ‘소총부대’ 즉 단타를 주로 치는 선수들만 모아놓은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두 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1984년과 1992년에도 공격력을 앞세워 우승했다기보다는 마운드의 우위, 그것도 최동원과 염종석이라는 에이스의 역투로 이긴 거나 다름없었다. 2000년대 들어 이대호라는 거포가 나타났지만 그 역시 홈런 타자의 이정표나 다름없는 30홈런을 한 번도 돌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이런 팀을 단 3년 만에 완벽한 대포 군단으로 바꿔놓았다. ‘노 피어’ 야구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한 타자는 멕시코에서 온 용병 카림 가르시아였다. 그는 초지일관 ‘노 피어 스윙’으로 일관하는 타자였다. 배트가 볼에 스치지도 못하는 식의 어이없는 삼진도 종종 당했지만 일단 배트에 공이 맞기만 하면 여지없이 담장을 넘어가는 큰 타구를 만들었다. 로이스터 감독과 함께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롯데에 있었던 가르시아는 3년간 매년 30개가량의 홈런과 80타점 이상의 타점을 생산해냈다. 단 한 시즌도 타율은 3할을 넘지 못했지만 그가 투수들에게 주는 공포감과 위압감은 상당했다. ‘확률은 낮지만 저 선수에게 한 번 걸리면 여지없이 홈런을 맞는다’는 이미지가 투수로 하여금 공격적인 투구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