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불교가 전통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선조 500년 동안에 굳어진 거예요. 벗어야 할 멍에입니다. 숨어서 살아남아야 하는 조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건데 그것을 마치 대단히 소중한 전통처럼 여기는 겁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은둔해야 했고 내면적이고 정적이어야 했죠.”
달마와 원효
▼ 사회참여적이고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시는 거죠?
“저는 현실을 떠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봐요. 현실을 떠난 수행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삶과 수행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거죠. 분리되는 것은 진짜 불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득도를 했다는 고승들은 대부분 속세와 떨어져 수행했지요?
“대표적으로 대비되는 인물이 달마 선사와 원효 대사입니다. 원효는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누비면서 민중과 함께했던 인물이고, 달마 선사는 소림굴이라는 인적이 끊긴 심산유곡에 들어가 면벽좌선(面壁坐禪)했던 인물이지요. 어떤 게 진짜 불교냐 하고 하나를 선택할 문제는 아닙니다. 시대상황에 따라 다른 거죠.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매일 탁발했습니다. 문전걸식한 거죠. 그게 바로 현장이지 않습니까. 마을 간에 싸움이 나자 말리러 달려갔습니다. 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 말리러 갔습니다. 살인마가 나타나 온 사회가 불안과 공포에 떨자 살인마를 직접 설득하러 찾아가기도 합니다. 늘 현장에 있었지요. 그렇지만 부처님에게 그런 모습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조용히 숲 속에서 좌선하고 명상하는 모습도 있죠. 수행해야 할 때도 있고 현장에 있어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그가 강조하는 ‘현장 수행’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회원 수 1000여 명의 이 단체는 전국 곳곳에서 귀농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대안교육운동, 생명환경운동, 생태공동체운동을 펼치고 있다.
▼ 전에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선(禪) 수행자들의 문제점을 비판했던데요. 공동체적 삶은 돌보지 않고 개인 수행만 하는 게 문제라는 거죠?
“개인 수행도 잘하면 좋다고 봐요. 그런데 세상과 분리된 개인 수행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느냐는 거죠. 여기 개인 수행을 잘하는 훌륭한 분이 있습니다. 그 옆에서 누군가가 어떤 일로 몹시 고통스러워합니다. 고통스럽고 불행한 존재가 곁에 있는데 혼자 수행 잘해서 평화롭고 행복하다면 그게 진짜 바람직한 평화와 행복인가? 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웃의 고통에 아랑곳없이 홀로 평화로움을 맛보는 게 훌륭한 수행이라면 그런 수행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수행이 정말 중요할까요? 옆에서 죽거나 말거나.”
▼ 대부분의 스님에게 수행이란 자기 깨달음을 위한 것이잖아요?
“그렇죠. 그게 가장 훌륭한 일이라 생각하고 인생을 걸죠. 그런데 저는 의심이 들어요.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물고 늘어지는 거죠. 그게 진짜라고 하는데 잘못 알고 있다, 착각하고 있다는 거죠. 거기에 대한 응답만 나올 수 있다면 저는 지리산 아니라 히말라야에 들어가도 좋다고 봐요.”
스스로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도법 스님은 세상과 분리된 개인 수행을 비판했다.
“못해. 먼 훗날 천지개벽하면 깨달음이 이뤄지고 그러면 다 해결된다는 식이거든요. 불교는 극락세계를 얘기하고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면 불교 2600년 역사와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극락세계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됐는가. 여전히 다음과 미래를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곤란하지 않은가. 지금 살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오고 희망이 제시돼야지, 손에 잡히지도 않고 검증할 수도 없는 죽은 후의 먼 훗날을 얘기하는 건 곤란하다는 거죠.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거고 세상을 속이는 거죠.”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말한다.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않고 날것을 드러낸다.
▼ 우리 사회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요. 사회적·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커집니다. 경제 수준은 높아지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팍팍해지는 걸까요?
“본질적으로는 세계관과 가치의식의 문제라고 봅니다. 실체론적,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다보니 나만 따로, 우리끼리만 따로 사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걸 추구해요. 소유 가치를 중심으로 삼을 거냐, 존재 가치를 중심으로 삼을 거냐에 따라 삶의 길이 달라져요. 이원론적 세계관과 소유 가치가 얼마나 나쁘고 위험한지 깨달아야 해요. 동시에 관계론적 세계관과 존재 가치가 우리의 살길이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경전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뒤에서 살인강도가 막 쫓아오니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갑니다. 앞에 태산 같은 불구덩이가 있어요. 타 죽게 생겼으니 얼른 피한다는 것이 물에 빠졌어요. 결국 물에 빠져 죽었지요. 불에 타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결과는 같죠. 근본에 대한 바로잡음이 없으면 악순환이 되풀이되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근본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임시처방만 계속합니다. 문제가 옮겨 다닐 뿐이죠. 해결은 안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