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 전대통령과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공주병 혹은 왕자병을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며, 한마디로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전제가 깔린 사고방식이다.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긴 하지만 대체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데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짝을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김영삼과 김어준’이라는 인물 조합 자체를 음모론(?)의 시각에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전직 대통령을 감히 어디다가 비교하는가. 사람에게도 급이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다. TV 토론 프로그램 PD들이 가장 어려울 때가 출연자들이 ‘나는 누가 나오면 안 나간다’거나 ‘누구 이상은 나와야 나도 나간다’는 등으로 등급을 따질 때라고 한다. 그런 우리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필자의 피해의식도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이나 죽음 같은 자연의 현상이나 자기인식, 생(生)의 의미 같은 철학적 명제 앞에서 ‘사람의 급’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YS 독설, 병적인 자기 중심주의
김영삼과 김어준을 ‘자기인식’이라는 정신의학적 코드로 해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나이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김영삼과 김어준이라는 남자를 ‘자기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급을 따지기 이전에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영삼은 1993년 2월25일부터 1998년 2월24일까지 만 5년 동안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었다. 법률적으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이었고 현실적으로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타인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온 YS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첫해 90%대까지 치솟았던 YS의 인기는 임기 말에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퇴임 후 2년 6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는 아예 바닥을 치고 있다. 근자에 YS를 담당하는 기자들이 사석에서 털어놓는 고민을 들어보면 그의 인기가 바닥이라는 게 더 실감이 난다. YS에 관한 기사를 쓰면 “제발 YS를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YS와 붙어먹는 기자 너도 돌대가리”라는 폭언도 퍼붓는단다. YS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박종웅 의원의 육성으로도 어김없이 증명된다.
“내 홈페이지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 10건 중 9건은 욕이다. 심지어 YS를 왜 자꾸 따라다니느냐며 ‘둘이 호모냐’라는 욕까지 올라온다. 사람들이 YS를 ‘또라이’라고 하고 나를 ‘꼴통’이라고 하는 것 다 안다. 또 나를 대학도 안 나온 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다 안다.”
박의원은 YS에 대한 욕은 이제 정점을 지났으므로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누가 맞는지도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 네티즌은 YS의 막가파식 독설을 비난하며 “이젠 손명순여사가 나서야 한다”며 비아냥거린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공개한 낸시여사처럼 손여사가 YS에 대해 솔직히 국민에게 고백하고 모종의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대단한 독설이지만 그게 YS에 대한 요즘 일반 시민들의 솔직하고 감정적인 반응인 듯하다.
어쩌면 뒷골목 술집에서 안주삼아 화제에 올릴 만한 얘기까지를 모두 거론하는 것은 ‘YS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필자 나름의 고민 때문이다. 요즘은 YS에 대한 비난과 폄훼의 발언이 차고 넘친다. 자칫 YS를 향한 ‘입 뭇매’ 하나를 더 보태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인식의 제로베이스가 필요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바닥까지 내려가 YS를 지배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YS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기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문제는 그 정도가 거의 병적이라는 데 있다. 그는 전형적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식 사고를 한다. 내가 침묵하는 건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고, 네가 말이 없는 건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는 식이다.
올해 초 모든 역사를 자신 중심으로 재구성한 책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회고록이 출간되었을 때 한 잡지에 실린 만평이 걸작이다. 비서관이 그에게 자서전에 대한 시중 여론이 ‘저질스럽기까지 하다’는 쪽이라고 전한다. 그랬더니 YS는 “그러게 내가 종이도 최고급으로 쓰고 표지에도 금박을 넣자고 했잖아”라며 흥분하고 있다. 이보다 더 절묘하고 적확하게 YS의 ‘내 멋대로’식 사고를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YS의 엉뚱한 해석과 당당하고 진지한 발언은 만평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뛰어 넘는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걸핏하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YS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내 인생의 낙”이라고 했단다. 물론 그의 말이다. 지난 5월 ‘신동아’인터뷰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면서 “지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대중이 독재자다 하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확신한다. 강력한 야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말도 예사롭지 않다.
“내가 야당 때는 참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결국 박정희가 죽은 거예요. 나를 국회의원 제명 안했으면 박정희는 안 죽었죠.”
그러나 ‘내 멋대로’식 사고의 금메달감은 단연 김일성 사망원인에 관한 그의 진단이다.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건 (자기처럼 기가 센) 사람과 회담할 준비에 과도하게 신경을 쏟다가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듣고 있던 사람은 할 말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럴 때 기가 막힌 표정으로 YS를 쳐다보고 있으면 아마도 그는 ‘내 기에 질려 상대방의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통제력의 착각
심리학 용어 중에 ‘통제력의 착각’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착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현상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은 과대 평가하고, 우연이나 통제 불가능한 요인으로 인한 것은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현상은 때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해서 자신의 정신건강을 지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자기중심적 세상보기에 빠지게도 한다.
‘얼마전 한일전 축구 경기 때 내가 직접 잠실 운동장에 가서 관람을 했더니 우리나라가 1대 0으로 이겼다’ 라거나 ‘내가 아침에 아내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다가 지각을 했더니 오늘 우리 회사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따위의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엉뚱한 해석을 일삼는 YS의 성향은 일차적으론 그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기인한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나 특정 상황들이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주인공 중심으로 전개되는, 3류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감(感)의 정치인’이라거나 ‘정치 9단’이라는 수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실상 YS가 자랑하는 ‘감의 정치’라는 건 다분히 ‘모 아니면 도’식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겠지만 만능이 될 수는 없다. 야구 경기에서 감독이 히트앤드런 작전을 걸어서 적중하면 그 효과는 폭발적이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주자만 나가면 히트앤드런 작전을 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황산벌 싸움을 앞둔 계백 장군이 가족의 훗날을 걱정해 혈육의 목을 베는 역사적 장면의 한 귀퉁이에서 ‘혹시라도 이기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YS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YS의 돌파력이나 파괴력이 남달라 보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의 집념과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인다. 그러한 스타일은 그와 측근들이 즐겨 사용하는 ‘음모론’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확실한 ‘감’을 가지고 우산을 준비해서 나갔는데 햇볕만 쨍쨍하다. 이런 때 YS의 정치적 감각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산을 활짝 펴들면서 ‘나를 망신시키고 나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서 비가 올 것 같은 왜곡된 정보를 내게만 주었다’는 음모론을 외치는 것이다.
작년 5월 페인트계란 사건 때 보인 그의 순발력이 바로 그 예가 된다. 개인적인 망신으로 끝날 뻔(?)했던 일이었는데, 옷을 갈아입으러 자택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측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죽이려는 김대중 정권의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다. 훗날 YS는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야당에도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그 꼴을 당했는데도 야당이 한마디도 안 했다는 것이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던 시절 불퇴전의 민주투사로서 YS가 보여주었던 엄청난 파괴력은 다분히 그의 이런 특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근자에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그의 행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다. YS 특유의 정치적 감각이 실종된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거울보기(Mirroring)’에만 고착된 그의 심각한 정신상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거울보기’다. 자기 얼굴을 직접 볼 수 없고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아기에게 ‘거울’은 엄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는 자기가 하는 행동을 엄마라는 거울에 비춰 보면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엄마가 자기를 보고 웃어주면 자신의 행동이 괜찮았다고 판단하고, 반대로 엄마가 자기를 보고 화를 내면 그때 자신의 행동은 나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사람은 반복적인 거울보기 과정을 거쳐서 자기상(像)을 확립하게 된다.
1954년 정치에 입문한 이후로 거의 반세기 동안 YS의 거울은 언론이었다. 그는 언론이 자신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따라 자신의 현재를 평가하고 또 언론이 잘 보아줌직한 쪽으로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왔다. 지난 40년 동안 신문 1면 톱을 가장 많이 차지한 사람이 바로 YS라고 한다. 언론에 대한 YS의 집착은 거의 광적이다. 언론은 YS 정신세계의 알파와 오메가다.
물론 언론이라는 거울이 비춰야 하는 것은 ‘우주의 중심’인 YS 자신이다. 언론의 지면에서 밀리면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여론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 1983년 5월18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생명을 건 23일의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때도 그의 은밀한 관심은 언론이었다.
단식을 시작한 당일 국내 신문의 톱기사가 반달곰 밀렵 관련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분노케 했다. 단식 4일째부터 석간 1면에 자신의 단식에 대한 기사가 우회적으로 실렸다는 사실을 지금도 그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23일간 계속된 단식투쟁 기간에 국내외 언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빠짐없이 기록한 사람이 바로 YS다. 감옥에 가는 게 연금을 당하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언론이 직접적인 이유다. 연금된 사실은 신문에도 안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YS는 4월18일의 장충단 공원 유세를 언급하며 분노를 터뜨린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이 날 모든 언론의 관심은 그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숫자의 군중이 모여든 서울의 장충단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날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충남지역의 벽촌을 돌아야 했다. 서울 집회가 열린 바로 그 시각, 나는 당의 지시대로 충남 아산의 면 소재지에서 비를 맞으면서 쓸쓸한 유세를 했다. 나의 유세에는 한 사람의 기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대중 후보와 빚은 정치적인 갈등을 잠시 논외로 하고 살펴보면 그 쓸쓸함의 근원은 그곳에 기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자신의 간곡한 만류로 불출마 선언을 하기로 한 날 연락도 없이 잠적해버리자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단다. ‘그 날 언론의 톱은 나리양 유괴범 검거 기사였는데, 이인제가 자기 기사를 톱으로 만들기 위해 행방을 감추고 기자회견을 잠시 미루었을 것이다’라고. 물론 좋게 생각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고리대금업자처럼 뉴스가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게 그다. 그런데 퇴임 이후 YS는 언론을 통한 거울보기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한껏 치장하기 좋아하는 여자가 거울을 못보는 고통처럼 ‘거울보기’가 어려워진 YS의 초조감과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한 번만 몸을 던져도 여론의 중심으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번 세 번 몸을 던져도 겨우 변두리 신세니 초조할 수밖에 없다.
YS부자의 심리적 관계
그는 왜 이처럼 ‘거울보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생의 초기에 확립되어야 할 정상적인 ‘거울보기’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정신의학적으로 ‘거울보기’에 문제가 생길 때 나타나는 병이 바로 ‘나르시즘 인격장애’다. 나르시즘 인격장애는 두 가지 경로로 생길 수 있다.
첫째는 어린 시절부터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경우다. 자신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비춰주는 거울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뻥튀기(나르시즘화)하면서 허한 자기 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무의식적인 절박감에서 스스로를 과대하게 포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을 지나치게 이상화(overidealization)하는 반응만 보면서 자란 경우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각적으로 제공되고 그의 욕구는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 아주 귀한 자식이거나 유달리 과잉 보호적이고 희생적인 부모를 가진 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YS는 전형적으로 둘째 유형이다.
YS의 할아버지는 거제도에서 어장을 하며 큰 부를 축적했는데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YS의 아버지도 어린 YS를 안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주를 끔찍이 여겼다고 한다. YS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이룬 어장을 물려받아 묵묵하고 성실하게 아들의 정치적 뒷바라지를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온 인물이다.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 때마다 아들에게 새로 집을 마련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YS의 인간관계 구축에 만만치 않은 역할을 했던 어마어마한 양의 ‘민주멸치’를 제공한 것도 아버지였다. 대통령 당선 직후 “이걸 따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하고 대통령 당선증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감격하는 아들에게 “이제 됐으니 부정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마라. 돈이 부족하면 내가 멸치잡아 댈 테니까” 라고 한 아버지의 대답은 그들 부자간의 심리적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부자지간의 살가운 정을 보여주는 미담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예순 넷이 된 아들에게 멸치잡아 돈을 계속 대겠다는 아버지의 배려는 제3자의 눈에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농구천재 허재의 아버지가 아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허재가 다니는 학교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아들의 음식점 외상값을 갚아주었다는 에피소드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가 젊었을 적 가족들과 찍은 어느 사진을 보니 YS는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앉아 있고 손여사가 그 옆에 있는데, 아버지 김홍조옹은 손주들과 함께 뒷자리에 서 있다. 여느 가족 사진이라면 연로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나머지 식구들이 자리를 잡을 법한데 그 가족의 중심은 명백히 YS인 모양이다.
모든 인간은 출생 후 1년까지는 정상적인 발달과정의 일부로 나르시즘기가 존재한다. 이때 아기는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채우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배고프면 울고, 울면 즉시 자기 입으로 젖꼭지가 들어와야만 한다. 이때 아기는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없다. 관심의 대상은 배고픔을 달랠 엄마 젖 뿐이다. 그것이 누구 젖이건 상관없다. 고무 젖꼭지라도 우유만 나온다면 엄마의 젖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때의 아기에게 엄마는 자기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젖을 제공하는 대상으로만 의미가 있게 된다. 나르시즘기의 인간에게 대상이란 대상(object) 그 자체가 아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의미로만 존재하는 부분 객체(part object)일 뿐이다.
그런데 YS의 아버지는 그의 어린시절뿐 아니라 평생 동안 그의 아들에게 부분 객체로 존재했던 것 같다.
집안·언론·지역의 YS 과잉보호
그는 1남5녀 중 장남이다. 사촌을 통 틀어서 남자 형제가 한 명 뿐인 그의 집안에서 “그의 출생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축복이요 경사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YS는 평생에 걸쳐 세 곳으로부터 과잉보호를 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의 집안과 언론과 지역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진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후 1년 간의 나르시즘 시기가 지나면 차츰 이 구도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반해, YS는 평생 동안 계속된 과잉보호로 자기욕구만 생각하게 되는 증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지적하는 YS의 오만과 독선은 이러한 심리적 패턴을 바탕으로 한다. YS는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성장했고 그런 태도를 신념화했다.
그의 사진을 가만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게 있다. 사진 속의 그는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사진에서부터 그런 습관이 나타난다. 초선의원 시절 자신의 정신적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병옥 박사 등의 정치선배와 사진을 찍을 때도 뒷짐을 지고 있으며, 46세의 최연소 야당 총재로 국회에서 대표연설을 할 때도 그렇다.
산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 속의 YS도 대부분 뒷짐을 지고 있다. 남들에게 훈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취하는 제스처가 뒷짐이며, 자신의 당당함이나 강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제스처가 뒷짐이다.
YS는 다른 사람을 언급할 때 호칭을 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가 거론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사회적 공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데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호칭없이 이름만 거명한다. 김대중이가, 이인제가, 이회창이는… 매사가 그런 식이다.
DJ가 자기보다 나이가 몇살 많지만 자신이 국회의원이 먼저 되고 대통령을 먼저 했으므로 정치적 선배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자유당 때의 원용덕 장군이나 유신시대의 김형욱 전정보부장 등과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그들 모두가 자신보다 연상이었지만 자기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고 밝힌다. 물론 자신이 그만큼 대가 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그가 잘 사용하는 말 중 하나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나 박태준 전포철회장, 박철언 의원 등은 모두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YS에게 곤욕을 치른 사람들이다. 심지어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한다고 말한다.
YS에게 선악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을 지지하면 선이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거나 자신과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 그건 바로 악이다.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 안에서 칭송받고 존경받아야 할 인물로 자신을 규정한다.
나르시즘은 대인관계 자체를 존재하지 않게 한다. 그의 정신세계에는 자신과 자신의 욕구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비판을 수용하는 일 따위는 나르시즘과 애초에 동침이 불가능한 짝이다.
YS에게 화를 내거나 그의 의견에 반대한 사람은 비록 그가 어제의 동지일지라도 그 순간부터 적이 된다. 그는 지금도 미분화된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주문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지난 해 한 시사 주간지에서 1년 동안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매체 순위를 조사했더니 인터넷 미디어로서는 최초로 딴지일보가 17위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쯤되면 새로운 형태의 언론권력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제도권 언론권력의 오만방자함에 대한 응징을 표방하고 있는 딴지일보 쪽에서 보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심정적인 차원과는 별개로 현실 세계에서 딴지일보의 영향력은 점차로 막강해지는 느낌이다.
98년 7월4일 ‘웹진 형태의 개인 홈페이지’로 출발한 딴지일보는 349일 만인 작년 6월16일 조회수 1000만 번을 돌파했고, 2000년 9월 현재 조회수가 약 2900만 번에 달하고 있다. 하루에 3만 번 이상, 한 달에 100만 번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추세라면 10월이나 11월쯤에는 조회수 3000만 번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이 달성될 것이고, 영향력있는 언론 매체의 순위조사에서도 상위에 랭크될 것이 틀림없다.
이 막강한 딴지일보의 총수이자 발행인이 바로 김어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김어준을 소개하면서 북한의 지도자를 소개하듯 거창하고 긴 수식어를 붙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급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딴죽걸기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단 몇천부를 발행하는 신문사 발행인도 지역 유지로 행세할 수 있는 우리 풍토에서 거의 3000만 번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언론사의 발행인이라면 그의 위상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김어준은 1968년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시험쳤다가 세 번 떨어진 후 홍익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마음을 비운 뒤 공부에 몰두하고 싶어 대학 1학년 때 최초의 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이후 무려 3년 동안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등 40여 개국을 여행했다.
미당의 시구를 빌려서 표현해 본다면 지금의 김어준을 키운 건 9할이 여행이었다. 95년 대학졸업 후 포항제철 해외영업부에 근무하던 어느날 ‘김대리는 지금 배낭여행 중입니다’라는 모그룹의 신문광고를 보고 입사 8개월 만에 퇴사했단다. 물론 여행을 가기 위해서다. 집에는 출장간다고 말한 후 짐을 꾸려서 이집트로 날아갔다.
김어준은 이집트라는 나라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모양이다. 이집트에 가면 사기꾼도 많고, 바가지도 심하고, 나라 전체가 시장통같고 어수선한데, 그런 게 마음에 든단다. 그 이유가 재밌다. 주류라는 게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냥 다들 떠들고 축제 같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삶에 대한 억압이나 부당한 요구, 속임수 이런 게 없어서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가 이집트에서 느끼는 친근함이나 호감은 그대로 김어준과 딴지일보가 추구하는 철학과 일치한다.
이집트에서 귀국 후 여행관련 IP사업과 이벤트 사업, TV 다큐멘터리를 기획 제작하는 일에 종사한다. 특히 배낭여행중에 만났던 입양아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기획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배낭여행과 인터넷을 결합한 신종 여행상품을 개발해서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던 김어준은 IMF를 맞아 수천만원의 빚을 지고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딴지일보는 그때 시간은 남는데 할 거는 없고 그래서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개인 홈페이지라고 한다. 딴지일보를 만들고 처음 몇개월간 김어준은 발행인 집무실이었던 안방 구석에서 그룹총수, 발행인, 편집장, 취재기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윤전기사, 청소부 노릇을 혼자서 다 감당해냈다. 밤 10시부터 시작해 새벽 5시까지 일을 하는 밤샘작업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딴지일보를 통한 수익이나 장밋빛 청사진이 없는 상황에도 그처럼 꿋꿋할 수 있었던 뒷심은 여행 경험이었다는 게 김어준 자신의 진단이다.
여행 경험에서 얻은 역지사지
김어준은 틈만 나면 여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딴지일보를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시각이나 풍부한 소재,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패러디 등은 대부분 그의 여행경험에서 비롯한다. 그가 글이나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하는 중동지방의 여행담을 들어보자.
그는 아랍을 여행하기 전까지는 아랍인들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심이 강하고 배타적이고 어설프고 게다가 테러리스트, 한마디로 나쁜 놈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유태인은 머리 좋고 역경을 이겨낸 민족, 우리편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아랍을 여행하면서 김어준은 큰 충격을 받는다. 아랍 버스에 올라와 검문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은 아랍의 편에서 보면 일본순사였고, 팔레스타인인의 폭탄투척을 그들의 등뒤에서 봤더니 바로 우리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김어준이 느낀 충격의 강도나 철학적 고민이 그대로 실려 있는 에피소드다. 그렇게 선입견을 없애고 뒤집어서 생각해 본 경험이 딴지일보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도 그에게 값진 교훈을 주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김포공항처럼 흡연박스가 따로 없이 사람들이 청사 안에서 담배를 피운단다. 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의 권익을 존중해 흡연박스를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환기시설에 더 투자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하면 되지 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권리를 제약하는가.
김어준은 그런 경험들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한 발상 전환의 필요성을 체득한다. 그가 강조하는 다양한 시각이란 역지사지(易地思之)에 다름 아니며 균형감각의 또다른 표현이다. 그의 균형감각은 모차르트의 경쾌함을 진중하게 표현할 줄 아는 신동처럼 다분히 천성적이다. 김어준의 균형감각은 그의 분신이랄 수 있는 딴지일보에 그대로 묻어 있다.
김어준은 올해 초 8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딴지일보 인수 제의 건을 거절했다. 팔고 싶지 않은 게 첫째 이유고, 둘째는 앞으로도 자신이 생각한 방향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감상적인 이유만으로 인수제의를 거절했다면 그건 딴지일보의 김어준이 아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8조원짜리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당하고 호기롭다.
김어준은 YS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오만과 독선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의 오만과 독선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꼬집지 않는다. 오히려 귀엽고 유쾌하다. 딴지일보가 ‘우짜겠습니까, 니가 참아야지’ 따위의 철저한 무(無) 서비스정신을 표방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딴지기자들은 자신들의 신문을 조폭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김어준총수가 짱이므로 딴지에 충성을 맹세한 기자들은 자신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총수에게 일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만과 독선, 독재가 또 있겠는가. 김어준은 딴지일보를 ‘1인신문’으로 운영할 때부터 이런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딴지 1호를 인터넷에 띄우고 혼자 하릴없이 조회수를 올리다가 야후코리아 서핑팀장에게 메일을 하나 보낸다.
‘임명장. 귀하를 본지의 제1호 홍보담당 임원으로 직권에 의거 낙하산 임명함. 반항은 금물이며…. 딴지그룹 발행인’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야후의 서핑팀장은 딴지의 홍보담당 임원이 되어 딴지일보를 네티즌들에게 알리는 1등 공신이 되었단다. 창간사설도 그러한 김어준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쓰윽 한번 돌아보자. 왜? 글쎄 보자면 한번 보자. 딴지일보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제 목소리 한번 내보려는 작고 희한한 지랄빵이다. 때론 실수하고 그러더라도 봐주기 바란다. 귀엽잖은가. 발행인.”
딴지의 보도원칙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그런 오만과 독선을 바탕으로 한다. 독자의 항의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독자에게 변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딴지의 독자들은 김어준과 딴지의 ‘귀여운 오만과 독선’을 충분히 수용하고 즐기기까지 한다. 잠재적인 피학 성향의 충족 때문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적절하게 가동되는 쌍방향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로 또 같이’의 관계라고나 할까. 김어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독자들이 딴지와 관련해서 어떤 ‘제안’을 해올 때는 충분한 답변을 합니다. 하지만 딴지가 잘못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을 해오면 그냥 놔둡니다. 왜냐하면 그 지적이나 비판 자체는 그 독자가 언론으로 기능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1인언론’의 실현이 딴지의 모토이기 때문에 저는 지적이나 비판을 하는 독자도 하나의 언론으로 간주하고 싶은 겁니다. 딴지라는 하나의 언론매체와 그것을 향유하는 독자의 관계는 거부합니다. 그래서 아무 대꾸도 안합니다. 정 귀찮게 구는 독자가 있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 그럼 니가 만들어.’”
얄미울 만큼 한계가 명확하다. 2년간 체중이 24kg이나 증가한 데다 수염까지 길러 얼핏 산적을 연상케 하는 외모지만, 김어준을 볼 때마다 여우같다는 느낌을 받는 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성향이 부모님의 영향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좀 특이하게 김어준은 부모의 완전 방임 속에서 자랐다. 공부를 잘해도 잘했다는 말을 안하고, 못해도 ‘공부해’라는 말을 안하고, 그래서 한때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고 심각하게 생각했단다. 맛있는 게 있으면 부모님들만 드시면서 ‘너는 먹을 날이 많이 남았잖아, 이 자식아’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김어준의 아버지는 환갑이 넘은 아들에게 멸치잡아 돈을 대겠다는 YS의 부친과는 아주 대조적인 스타일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게 거의 없는 대신에 통제나 참견도 일절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그런 관계 속에서 해주는 것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통제없는 시스템 속에서 자율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마음대로 하되 그 결과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딴지일보가 말을 막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무책임한 짓은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출판인 김규항은 김어준을 독특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운동권이라든가 제대로 학습을 했다든가 하는 따위의 경험이 거의 없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대단히 정확하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늘 상식에 근거해 판단하려 한다고 말한다. 실상 딴지일보도 우리나라에서 30년 이상을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느낀 문제점을 발언하는 것으로, 그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 단순하고 당연한 시각에 3000만 번 이상의 환호와 지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처음에 “그러다 오빠가 잡혀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많이 했단다.
김어준은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좀 다르다.
“저 페미니스트 아니에요.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남자 여자 차별 안 해야 하는 거 상식 아닌가요? 너무 당연한 걸 가지고 지가 페미니스트라고 잘난 척하는 남자들, 저 이해 못해요.”
역시 상식의 수준을 역설한다. 다른 웹진은 적당히 폼을 잡지만 딴지가 그의 표현처럼 ‘씰데없는’ 폼을 잡을 필요가 없는 건 상식을 존중하는 그의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균형감각을 담보로 한 상식의 존중
상식의 존중은 균형감각을 담보로 한다. 균형감각이 둔해지면 상식이 아닌 일도 상식이라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와 타자(他者)사이에서 ‘나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서른 두 살인 김어준은 그 쉽지 않은 일에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내던지고 있다. 지금 일부에서는 딴지일보가 이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서 어떻게 기능하고 어떻게 자리매김될 것인가를 사회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유익하고 바람직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런 연구에서 딴지일보가 우리에게 던지는 자기 인식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도 한번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딴지일보는 김어준이라는 이 젊은 총수와 ‘암수한몸’이기 때문이다.
원래 총수(總帥)란 대기업 등 큰 조직체나 집단을 거느리는 사람을 말한다. 어쩌면 그는 멀지 않은 장래에 딴지일보를 8조원 규모의 회사로 키워 진짜 총수로 취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김어준이 ‘딴지그룹 총수’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크고 복잡한 마음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의 총수’로 등극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으로 추석을 앞두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을 설파하는 김어준의 말을 들어보자.
“왜 방송은 추석 때마다 성룡 영화를 그토록 재방 삼방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PD들이 골라냈을 텐데, 그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니넨 그거 재밌니? 니들이 재미없으면 우리도 재미없어’.”
재미있고 존경스러운 젊은 총수다.
미국의 어느 젊은 기자가 ‘미국 국회의원들은 모두 다 저능아다’라는 신문 기사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 문장을 미리 본 고참기자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 기사가 나가면 국회의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니 한 구절만 추가하자. 다시 고친 문장은 이랬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다 저능아다.’
기사가 나간 후 항의한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었단다. 국회의원들은 모두 그 ‘한 명’이 바로 자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